#33
“허억!”
서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뜨자 보인 건 아직은 조금 어색하지만 그래도 곧 익숙해질 천장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서호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돌아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이곳은 로제타의 방이었다.
서호는 허리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 불쾌한 꿈이었다.
‘그래, 꿈이야.’
정말 현실감 넘치는 이상한 꿈.
서호는 아직도 웅웅 울리는 것 같은 귓가를 매만지다 몸이 흠뻑 젖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머리카락만이 아니라 옷도 전부 젖어 있는 것을 보니 식은땀을 꽤 흘린 것 같았다. 목 뒤로 흘러내린 땀을 닦아낸 서호가 이불을 걷었다.
그때 방 밖에서 푸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호님, 일어나셨습니까?”
푸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더 안심됐다.
“일어났어요.”
푸티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폐하께서는 잠시 집무실로 가셨습니다. 서호님이 많이 피곤한 것 같으셔…, 서호님?”
서호의 몰골을 확인한 푸티가 깜짝 놀라 서호에게 다가왔다. 서호가 괜찮다는 듯 작게 웃으며 답했다.
“아, 이상한 꿈을 꿔서요.”
“이런, 방에 들어와서 확인해 볼 걸 그랬습니다.”
서호가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괜찮아요. 씻고 싶은데….”
“네, 준비해 드리게…. 서호님? 발목에 그게 뭡니까?”
경악한 것 같은 푸티의 반응에 서호가 의아해하며 그를 돌아봤다.
“네?”
푸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물었다.
“폐, 폐하께서 그러신 겁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호가 발목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무슨 말이에요? 발목에 뭐가….”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는 발목을 발견한 서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꿈을 꾸긴 했다. 그런데 정말로 발목에 멍이 들어 있다고?
“서호님.”
꿈에서 겪은 일이 현실에까지 이어지니 불안하고 겁이 났다. 서호는 시커먼 발목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푸티에게 부탁했다.
“로제타를 불러주세요.”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로제타가 옆에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서호가 이곳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는 로제타였으니까.
푸티가 서호를 부축하며 말했다.
“…우선 씻고 계시면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서호가 그런 푸티의 손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와달라고 하면….”
“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서호는 푸티의 도움을 받아 욕실로 향했다. 푸티가 목욕을 끝내면 로제타가 돌아와 있을 거라 서호를 다독였지만, 큰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서호는 애써 침착해지려 노력하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
“폐하!”
로제타는 번쩍 눈을 떴다.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지셔서….”
로제타는 보좌관들의 말을 무시하며 몸을 확인했다. 딱히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최근 서호를 살피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신의 힘을 가진 자신이 쓰러지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폐하, 몸에 이상이 있으십니까?”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옆에서 보좌관들이 시끄럽게 굴고 있었으나 로제타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며 다시 한번 몸을 살폈다.
‘확실히 몸에 이상은 없….’
이상이 없지 않았다. 신의 힘 중 일부가, 아니 반절의 힘이 사라졌다.
“어의를 부를까요?”
괴이한 현상에 로제타는 눈을 찌푸렸다. 평소 사용하지 않는 힘이었으니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상한 것은 이상한 것이었다.
‘줬다 뺏는 건가?’
아무리 쓰지 않는 힘이라도 다시 뺏다니? 딱 그 정도의 생각만을 하고 있던 로제타는 주변에 몰려든 보좌관들을 물렸다.
“시끄럽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로제타의 말투에 보좌관들이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로제타는 앞에 놓인 서류들을 내려다봤다. 요새 일을 열심히 한 덕인지 이 서류를 끝으로 한동안 일은 없을 것이다.
‘회의 전까지는 쉴 수 있겠지.’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서호가 잠들었을 때 빨리 끝내려고 집무실을 찾아왔던 참이었다.
‘서호에게는 휴가를 받았다고 해야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서명을 마친 로제타가 집무실을 떠나려는데 누군가 집무실을 문을 두드렸다.
“폐하.”
로제타는 그를 찾아온 사용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사용인이 깊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푸티가 폐하께 빨리 방으로 돌아와 주십사 청하였습니다.”
“푸티가?”
“네, 급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푸티가 급한 일이라고 로제타를 부를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서호.
로제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면서 보좌관들에게 말했다.
“한동안 나오지 않을 것이다.”
뒤에서 보좌관들이 답하는 것을 대충 흘려들으며 로제타는 그대로 방으로 달려갔다.
뛰듯 방으로 달려간 로제타는 문을 벌컥 열어젖히려다 서호가 놀랄까 싶어 조용히 문을 열었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건 서호가 아니었다. 푸티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왔다.
“폐하, 빨리 오셨습니다.”
로제타는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서호는?”
푸티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서호님은 지금 씻고 계십니다.”
그러고 보니 욕실 쪽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서호가 어디 있는지 확인한 로제타가 푸티에게 물었다.
“서호가 부른 건가?”
“네.”
“왜?”
푸티가 작게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시작했다.
“폐하, 흥분하지 마시고 화를 내지도 마세요.”
뜬금없는 소리였다.
“뭐?”
“서호님이 겁에 질리셨으니 차분하고 침착하게 그분을 달래주세요.”
겁에 질리다니, 흉흉하고 쌀쌀한 바람이 허공을 갈랐다.
“무슨 소리지? 서호가 왜 겁에 질려?”
시커먼 연기가 로제타에게서 뿜어져 나왔으나 푸티가 몸을 덜덜 떨면서도 욕실을 힐끗 쳐다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폐하, 제발. 목소리를 낮추세요.”
로제타는 기운을 갈무리하며 답했다.
“…무슨 일이지?”
“서호님이 깨어나신 것 같아 방 안으로 들어오니 서호님의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으셨습니다. 꿈을 꾸셨다고 하셔서 목욕 준비를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푸티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서호님의 발목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멍이 들어 있었어요.”
로제타가 눈을 찌푸렸다.
“발목에?”
푸티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설마 하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로제타를 바라보며 물었다.
“폐하께서 하신 일은 아니지요?”
로제타가 경멸이 가득 찬 눈으로 푸티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푸티가 움찔 몸을 떨었다.
“네, 아닌 줄 알았습니다. 서호님은 곧 나오실 겁니다. 하지만 폐하.”
푸티가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번 경고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화를 내거나 무서운 표정을 하지는 마세요. 서호님이 불안해하고 계시니까요.”
“그래.”
로제타가 답을 하기가 무섭게 욕실 문이 열렸다. 수증기와 함께 물에 젖은 서호가 욕실에서 나왔다. 서호는 욕실을 나서자마자 로제타를 찾았다.
“푸티, 로제타가 왔나요?”
로제타는 목욕하고 나왔음에도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은 서호에게 다가가며 걱정스레 물었다.
“서호, 불렀다고?”
“아, 로제타.”
로제타를 발견한 서호가 안도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아 보여 로제타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무슨 일이야?”
내가 모르는 사이 누가 서호에게 접근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갑자기 본래 세상이 그리워졌나?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머뭇거리던 서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잠시만 안아주면 안 돼요?”
“응?”
로제타가 그의 귀를 의심하며 서호를 쳐다봤다. 하지만 서호는 간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로제타의 입술이 달싹이던 그때 서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손만 좀 잡아줘도….”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로제타가 서둘러 서호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따뜻하게 젖은 몸이 로제타를 꼭 껴안아 왔다.
로제타는 자신의 몸에 닿는 서호의 몸과 코끝으로 들어오는 그의 향기에 넋을 잃었다. 분명 똑같은 샤워젤을 쓴다는 것을 아는데도 그의 향기는 로제타의 것과는 달랐다.
따뜻한 체온과 그를 꽉 껴안은 손. 로제타는 당연하다는 듯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도 어찌할 수 없는 변화였다. 하지만 로제타는 알았다.
‘지금은 아니야.’
로제타에게 안긴 서호는 명백히 겁에 질려 있었다. 로제타는 덜덜 떨리는 서호의 몸에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서호의 등을 감쌌다.
로제타는 당장이라도 몸이 으스러지게 서호를 껴안고 싶은 욕망을 참아내며 최대한 다정하게 그를 다독였다.
“서호, 괜찮나?”
로제타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으나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상한 꿈을 꿨는데….”
목에서 따뜻하고 조금 젖은 숨결이 느껴졌다.
“그래, 푸티에게 들었어. 발목을 좀 보여주겠어?”
서호가 머뭇거리며 몸을 떼어냈다.
“…네.”
정말 아쉬웠지만 차라리 지금은 조금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로제타는 여전히 불안한 듯 그를 바라보는 서호에게 웃어 보이며 침대로 서호를 부축했다.
“괜찮아. 침대에 잠시 앉아 봐.”
서호는 로제타가 이끄는 대로 침대 위에 앉아 다리를 올렸다. 로제타는 기다란 가운 아래로 보이는 서호의 발목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의식하지 않아도 시선이 자연스레 예쁜 발목으로 향했다.
얇은 발목과 연분홍빛 복사뼈에 시선이 사로잡히는 것은 잠시였다. 서호가 보여주는 반대쪽 발목을 보는 순간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턱이 단단히 맞물리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몸에 열이 뻗쳤다. 스멀스멀 신력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려는 찰나 푸티가 로제타를 툭 쳤다. 로제타는 푸티를 공격하려는 신력을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