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갑자기?”
푸티는 만능의 답을 내놓았다.
“서호님이 원하셔서요.”
그러자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던 로제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티는 그런 로제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폐하.”
로제타가 건조한 눈으로 푸티를 돌아봤다. 평소처럼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시선이었다.
그럼에도 푸티는 평소와 달리 그 눈이 정말 감정이 없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안겔과의 만남 전 서호와 나눴던 대화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 대화에 푸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 폐하께서는 참 상처가 많으신 분이구나.’
로제타가 언제나 그렇게 사람 같지 않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귀찮아하고 신경질적인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그래, 우리 폐하께서는 섬세하신 분이야.’
그렇게 섬세하고 마음이 여리니 운명의 상대를 보고 싶다고 그렇게 밤낮없이 울어 젖히셨던 것 아닌가.
푸티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득 담아 로제타를 바라봤다.
로제타의 눈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으나 감수성이 풍부해진 푸티는 그런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서호님이 폐하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십니다. 직접 알려주시면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금방이라도 축객령을 내릴 것 같이 냉랭하던 얼굴에 일순간 봄바람이 맴돌았다. 날카롭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래?”
“네. 그러니 교육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폐하께서는 그저 서호님과 즐거운 시간만 보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서호와 함께하는 시간은 모두가 즐거운 시간인데….”
푸티는 서호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 안타까워하는 로제타를 달랬다.
“본래 교육을 주고받는 관계는 그리 행복한 관계는 아니지요.”
“그런가?”
“네, 그리고 조금 자제를 하시는 편이….”
“자제?”
누그러지던 로제타의 목소리가 다시 딱딱해졌지만 푸티는 겁먹지 않고 조언을 건넸다.
“언제까지 서호님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평소라면 주제넘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테지만 서호의 말을 듣고 나니 로제타에게 서호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푸티는 로제타가 정말 서호와 잘됐으면 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가 앞으로도 잘되기 위해서, 로제타는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푸티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서호님이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온 것부터가 폐하의 부름 때문이었으니 이곳에서 서호님의 시작은 폐하라고 하셨습니다.”
푸티는 서호의 말을 적당히 인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서호가 그 말을 꺼냈을 때부터 이 이야기를 로제타가 들었다면 참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본래 첫 기억은 강렬한 것이 아닙니까. 다른 이들을 만나 봐야 폐하만큼 크게 각인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푸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며 로제타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로제타는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푸티는 오늘 안겔이 말했던 과거의 기록을 떠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까 신녀님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운명이라고 항상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종종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생기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도 했고.
그러니 로제타는 더욱 조심해야 했다. 운명이라고 모든 게 잘 풀릴 거라는 기대 따위는 처음부터 해서는 안 됐다.
푸티가 간언했다.
“조금 자유롭게 풀어두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늘 서호님과 함께하겠습니다.”
푸티의 말에 로제타가 삐뚜름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너를 믿어라?”
의심 가득한 로제타의 말투에도 푸티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자신을 믿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제가 아니라 서호님을 믿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푸티가 서호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폐하를 참 많이 생각하고 계십니다. 좋은 의미로요.”
잠들어 있는 서호의 얼굴을 바라보던 푸티가 다시 로제타를 돌아봤다. 푸티가 그랬듯 마찬가지로 서호를 바라보고 있는 로제타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푸티를 보자마자 사라졌지만.
“그러니 지금처럼 하시되 조금 여유를 찾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로제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의 긍정에 안도한 푸티가 그대로 물러나려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폐하.”
아무리 생각해도 서호와의 대화가 마음에 걸려 이대로 자리를 비우기가 좀 그랬다.
푸티의 부름에 기분 좋게 서호를 바라보고 있던 로제타가 귀찮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 푸티를 돌아봤다. 푸티가 그런 로제타를 향해 애정을 듬뿍 드러내며 말했다.
“물론 저를 포함한 백성들이 폐하를 처음 사랑하게 된 계기는 폐하께서 위대한 이름을 하사받으시고 신의 힘을 얻게 되셔서였지만 지금 백성들은 진심으로 폐하를 사랑합니다.”
로제타가 감동하는 것을 기대하며 푸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 가득 띠고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저희 평민들에게는 좋은 분이시니까요.”
“뭐?”
“그러니 다른 이들의 사랑이 알맹이 없는 공허한 감정이라고 상심하지는 마시….”
“뭐라는 거지?”
건조한 로제타의 목소리가 푸티의 말을 잘라냈다. 푸티가 멍하니 로제타를 바라봤다.
“네?”
로제타가 작게 혀를 찼다.
“귀찮아. 푸티, 내가 너를 내 옆에 두는 건 네가 눈치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푸티는 그의 위에서 권태로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로제타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로제타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내가 아니라 권력을 사랑함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호수 같다고 칭송받던 색이 푸른 눈은 가뭄에 시달린 것처럼 잔뜩 메말라 있었다. 로제타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깊은 마음을 품지 마, 귀찮아.”
푸티가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로제타가 물러가라는 듯 손을 대충 내젓고는 서호에게로 걸어갔다.
푸티는 그런 로제타를 따라 멍하니 시선을 이동했다. 권태롭고 메말랐던 밀랍 같던 것이 서호의 옆으로 향하자 사람이 됐다.
로제타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서호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내 운명. 어쩜 자는 것도 이리 아름다운 건가.”
그런 로제타를 보던 푸티가 조용히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고 방에서 충분히 멀어진 푸티가 혀를 찼다.
‘그럼 그렇지.’
외로워하다니, 다른 이의 거짓된 사랑에 힘들어하다니!
로제타가 그럴 리가 없었다. 푸티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의 멍청함을 욕했다. 괜히 서호의 분위기에 휩쓸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버렸다.
로제타가 인간이 되는 건, 다른 이의 감정에 흔들리는 건 서호 한정일 뿐이었다.
***
발가락 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차가워.’
차가운 그것이 발가락을 시작으로 점차 위로 올라왔다. 그것이 피부에 닿는 면적이 점점 더 커지고 나서야 서호는 발에 닿은 무언가가 손이라는 걸 깨달았다.
커다랗고 차가운 누군가의 손. 무언가를 찾듯 더듬거리며 서호의 발을 감싼 손이 아래로 내려가 발뒤꿈치를 부드럽게 매만지더니 은근히 위로 올라왔다.
복사뼈를 둥글게 만지는 손이 너무 차가워 뼈가 아린 것도 같았다. 살이 에일 듯한 차가움이었다. 그럼에도 서호는 몸을 움직일 수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복사뼈를 한참 만지작거리던 손이 위로 올라와 발목을 움켜쥐었다.
차갑고 소름 끼치긴 했으나 부드럽던 손길이 순식간에 강압적으로 변했다. 절로 악 소리가 났다. 하지만 서호의 비명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몸이, 입이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발목을 세게 붙든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손은 더욱 차가워졌다.
‘발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
서호는 몸부림을 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서호가 몸을 움직이려 할수록 손은 서호의 발목을 비틀 것처럼 꽉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서호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잡아끈다고?’
손이…. 서호의 발목을 세게 움켜쥔 손이 서호를 아래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서호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다시 발에 힘을 줬다.
발끝까지 힘을 꽉 주자 드디어 발이 움찔 떨렸다.
서호는 그대로 잡히지 않은 발을 들어 그의 발목을 붙들고 있던 손을 세게 걷어찼다.
타격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손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더 억세게 서호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니 두 번은 쉬웠다. 서호는 내리 발을 찼다. 이상하게 절대 끌려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다. 이렇게 폭력적이었던 적이 없는데, 서호는 미친 사람처럼 아래로 발을 마구 내질렀다.
떨어지라고,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여기 있을 거라고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서호의 몸 안에서 크게 울려 퍼졌다.
여기에 남아서, 그의 곁에 있겠다고.
‘그?’
서호는 순간 당황했다. ‘그’라니? 그가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곳에 남아 있겠다고 한 거지? 왜 이토록 필사적인 걸까.
이렇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서까지 이곳에 남아 있겠다고 한 이유는?
갑작스러운 의문에 서호의 발이 멈칫하자 거의 떨어져 나갔던 손이 다시 서호의 발목을 감쌌다.
그 차가움이 느껴진 순간 서호는 다시 발에 힘을 줬다. 뭐 때문에 남고 싶은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저 정체 모를 손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은 확실했다. 서호가 그대로 발을 내지르려는데 누군가 서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남겠느냐.]
중후한 그 울림에 서호는 생각할 틈도 없이 속으로 답했다.
‘네.’
그러자 그 목소리가 잠시 고민하는 듯싶었다.
정말 웃기지만 서호는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아끄는 것을 물리쳐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서호는 매달리듯 말했다.
‘남고 싶어요. 여기 있을래요.’
그러자 목소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 아이가 너를 원하니…. 네게 힘을 나눠주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겠지. 새벽이 너를 도울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몸에 기이한 활력이 감돌았다. 귀에서 시작된 그 울림을 타고 어떤 힘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반짝거리고 투명하게 빛나는 무언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몸이 가벼워졌다. 서호가 그대로 발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저 손을 떨어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으로 퍼져나가던 것이 발에 모이자 서호는 그대로 발을 내질렀다. 커다란 타격감과 함께 드디어 발목을 감싸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서호는 그대로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