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서호의 물음에 푸티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좋으시다면 저도 좋으니까요.”
로제타가 좋기에 푸티 역시 좋다니.
“푸티는 헌신적이네요.”
“폐하께서는 사랑받는 황제이십니다. 제국의 백성은 폐하를 지극히 사랑하고요. 이렇게까지 황권이 강해진 게 얼마 만일지 모를 정도로 폐하께서는 백성들에게, 그리고 신을 믿는 귀족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고 계십니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서호는 눈을 깜빡이며 푸티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 신녀님 같은 경우는 드물 겁니다. 뭐, 그분도 폐하에게 가지는 감정은 애증 비슷한 거겠지만, 아무튼 기본적으로 사람들 대부분이 서호님에게 호감을 느낄 겁니다.”
서호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제가 로제타의 사람이라서요?”
어딘지 달라진 어조를 느낀 것인지 멈칫한 푸티가 망설이다가 물었다.
“솔직하게 답하길 바라세요?”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푸티가 조금 굳은 얼굴로 답했다.
“맞습니다. 오로지 폐하의 운명이시기에 다른 이들에게 쉽게 호감을 사실 겁니다.”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니까 서호가 아니라 로제타 때문에.
서호가 아까부터 거슬렸던 부분을 물었다.
“로제타가 그렇게 사랑받는 이유는 뭔데요?”
그러자 푸티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신에게 사랑받는 인간이니까요. 정말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신에게 이름을 받은 인간이시죠.”
깔끔하게 떨어진 그 답은 서호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서호는 푸티를 가만히 바라봤다.
푸티는 뭐가 문제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한 듯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서호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로제타나 나나 별로 다를 바가 없네요.”
“네?”
서호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푸티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다른 이의 존재 때문에 호감을 얻고 사랑을 받는다니 참 가볍고 공허한 감정이에요.”
왜 로제타가 이곳에 친구도 소중한 이도 없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곳에 도착한 뒤 서호가 받은 안겔의 적의와 푸티와 아리스의 호의는 전부 로제타에게서 비롯된 거였다.
사실 그 점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원래 세상에서도 서호는 남들과 쉽게 어울리는 성격이긴 했다. 물론 모든 이들에게 호감을 살 수는 없으니, 당연히 서호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를 향한 감정이었어.’
자신의 행동을 보고, 자신이라는 사람 자체를 보고 파생된 감정이었다는 소리다.
‘지금처럼 로제타라는 뒷배경을 향해 쏟아진 건 아니었지.’
서호가 매우 짧은 시간, 몇 안 되는 사람을 만나고 느낀 이 묘한 감정을 과연 로제타는 느끼지 않았을까?
서호가 로제타라는 뒷배경에 가려져 있는 것처럼 그 역시 신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에게 가려져 있었다.
서호의 경우는 로제타가 인간이기라도 했지, 로제타는 그 대상이 신이었다. 사람들은 로제타를 로제타로 보지 않고 오로지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별로야.’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게 확실한 이 세계에서 신이 갖는 위치는 어느 정도일까? 서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 것인지 푸티가 창백한 얼굴로 서호를 불렀다.
“…서호님.”
“그래서 로제타는 그렇게 간절하게 저를 부른 걸까요?”
그래서 그렇게 애절하고 위태롭게, 사무치게 울음을 흘렸던 걸까.
‘나처럼 외로워서.’
그를 알아봐 줄 사람이 필요했을까? 이 모든 게 비약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호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풍요 속의 빈곤.’
넘치는 사랑을 받는데 그것들은 모두 알맹이가 없었다. 왜 로제타가 안겔을 귀찮아한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 알맹이 없는 감정을 몇 번이나 느끼지 않았을까?’
한참 침묵하던 푸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푸티의 얼굴이 어두웠다. 푸티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서호는 부러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혼자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또 그렇다고 해도 내가 로제타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되실 겁니다.”
단호한 답에 서호가 조금 놀라 푸티를 바라봤다.
“단언하네요.”
그러자 푸티가 환하게 웃으며 서호를 바라봤다.
“네. 지금 확실해졌습니다. 서호님은 폐하께 좋은 영향을 끼칠 겁니다.”
반드시 그럴 거라는 확신이 담긴 그 말에 서호는 조금 안심했다.
“고마워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서호를 믿어줬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도 진실로 로제타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긴 하구나 싶어서 안심이 됐다.
‘이상하지.’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인데 왜 이렇게 로제타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서호는 다짐했던 대로 딱히 불편함을 티 내지 않고 평범하게 안겔을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몸은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조금씩 적의가 새어 나오던 저번 만남과는 달리 오늘 안겔의 표정에는 작은 흠 하나 보이지 않았다.
‘로제타를 싫어한다는 걸 아니까, 이게 더 불안하네.’
서호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로제타를 의식하며 최대한 빨리 대화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저 때문에 무리하시면 안 되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묻고 싶은 내용이 있으신가요?”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곳 상식을 배우고는 있는데 사실 제가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요.”
“네. 당연한 거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안겔님에게 물어도 좋은 범위인지 알 수가 없네요. 그래서 말인데, 우선 저와 비슷한 과거 사례를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도 될까요?”
서호의 물음에 안겔이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가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다만 기록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오래된 기록이라서 중간중간 비어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알아주세요.”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네.”
“서호님처럼 제국으로 끌려오신 분들은 기록에 따르면 총 네 명입니다. 서호님이 다섯 번째죠.”
서호는 로제타를 힐끗 바라봤다.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안겔에게는 관심도 없는지 서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끌려왔다는 말을 쓴 것 같은데.’
서호가 과민반응을 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분명 로제타를 자극하려는 의도로 꺼낸 말 같은데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서호와 눈이 마주친 것이 마음에 드는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서호가 그런 로제타에게 마주 웃어주며 안겔의 말을 은근슬쩍 정정했다.
“이곳에 오게 된 분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네요.”
서호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어쨌는지 안겔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뭐, 기록이 되지 않은 걸 수도 있으니까요.”
“네.”
“남성분이 오신 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와 네 번째 분은 여성분이셨고 세 번째 분이 남성분이셨어요.”
안겔이 로제타와 서호를 번갈아 바라봤다.
“애당초 이 거울을 얻을 수 있는 분들은 신전과 긴밀한 관계였던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이곳 분들은 다들 고귀한 신분이셨죠.”
그때 여태껏 안겔의 이야기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서호만을 바라보고 있던 로제타가 불쑥 끼어들었다.
“서호, 내가 제일이다.”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투에 서호가 웃음을 터트리며 로제타를 바라봤다.
‘정말 어린애 같다니까.’
어이가 없어서 웃고 있는데 안겔이 그 웃음을 잘라내듯 말을 이었다.
“…물론 이 거울을 얻게 된 황제는 폐하가 처음입니다.”
서호는 로제타를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안겔에게로 돌렸다. 서호와 눈이 마주친 안겔이 평온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분들 중 남성분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어요. 그러니까 세 번째 분이요.”
“네.”
“그분께서는 푸른 눈을 가진 사내분으로….”
그 뒤로 세 번째 사내에 관한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
안겔과의 대화가 끝난 뒤 로제타와 서호는 평소처럼 시간을 보냈다.
서호는 종종 무슨 생각에 잠긴 듯 흐릿한 눈을 하긴 했으나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신경이 쓰이긴 하겠지.’
세 번째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는 별것 없었다. 이 세계로 왔을 때의 나이는 삼십 대였고 그를 불렀던 후작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갑작스레 변한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방황을 좀 하긴 했지만 기록을 보건대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다른 이방인들 역시 모두 마찬가지라는 게 안겔의 결론이었다.
‘초반 이야기는 많았지만 후반부 이야기는 다 추측뿐이었지.’
안겔이 정말 몰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아는데도 말하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로제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과거가 나와 무슨 상관이지?’
안겔이 말한 과거 이방인 중 몇몇은 이 세계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린 모양이지만 서호는 지금 매우 잘 적응하고 있었다.
‘설령 서호가 적응에 힘들어한다고 해도 도와주면 되는 거고.’
질문거리가 더 생길지 모르니 황궁에 더 머무르겠다는 안겔의 말이 거슬리긴 했으나 그녀와의 만남 이후로도 로제타의 기분은 괜찮았다.
침대에 누워서도 생각에 잠겨 있던 서호가 깊은 잠에 빠지자 잠이 든 그를 부드러운 얼굴로 살피던 로제타가 푸티를 따로 불러들였다.
로제타가 부를 거라는 것을 예상했던 푸티가 그를 따라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방구석으로 향했다. 서호가 대화 소리에 깨어나지 않도록 하는 배려였다.
제국에 오기 전 겪었던 불면의 시간 때문인지 서호는 유독 잠자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챈 로제타는 서호가 잠자리에 들면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깨우고 싶지 않다면 아예 방을 나서서 다른 곳에서 대화해도 될 텐데, 그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욕심 때문인지 로제타는 항상 방 한쪽에서 서호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듣곤 했다. 조금 떨어진 침대에서 잠든 서호를 쳐다보던 로제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특이사항은?”
“특별히 없었습니다. 다만 아까 신녀님과의 대화에서 서호님이 이야기하셨던 것처럼 이곳 상식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마법사 아리스님께요.”
다정한 눈으로 서호를 바라보고 있던 로제타의 얼굴에 약한 경계의 빛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