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30화 (30/155)

#30

암흑에 휩싸인 공간에 나타나 은은한 빛을 내뿜는, 속이 훤히 보이는 맑고 깨끗한 호수. 그걸 보는 순간 어머니는 안심이 됐다고 했다.

“호수에 가까이 다가갔더니 그 안에 빛이 갇혀 있더래요. 뭐, 그냥 그렇게 느끼신 거겠죠? 아무튼 그래서 어둠이 무서웠던 어머니가 호수에 뛰어든 거죠.”

저 호수에 빠지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호수 아래 가라앉아 있던 빛을 품에 가득 안았는데 그 빛 중 일부가 하늘로 솟으면서 어둠이 걷히고 해가 뜨기 시작했대요. 어스름하게 빛이 돌면서 시커먼 어둠이 푸른빛을 띠고 점점 밝아지는 걸 지켜보다가 잠에서 깨어나셨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어머니는 서호를 가졌다는 걸 알았을 때 그 꿈이 태몽이었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서호의 이름이 서호가 된 거고.

서호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우스갯소리로 그때 품에 안았던 빛을 전부 쥐고 있었으면 천재가 태어났을 거라고 하셨죠.”

부모님이 떠오르자 조금 숙연해졌다. 서호가 태연한 척 쾌활하게 말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아무튼 제 이름에 들어있는 새벽은 해가 뜨는 무렵의 새벽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서호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던 아리스가 돌연 낯빛을 굳히고는 물었다.

“재미가 있어서 듣고 있기는 했는데, …이거 제가 먼저 들어도 되는 겁니까?”

“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서호가 반문했으나 아리스가 푸티를 돌아보며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푸티, 새삼스럽긴 한데 이 이야기 들었다고 하면 폐하께서 싫어하실 것 같아?”

그러자 푸티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호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 로제타가 싫어할 거라니?

“왜요?”

그러자 푸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서호님의 모든 것에 처음이 되시길 바라세요.”

“음?”

서호가 묘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자 푸티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폐하께서는 서호님을 많이 아끼시고 특별하게 여기시잖아요.”

“확실히 로제타가 제게 잘해주는 건 맞죠.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고 싫어할까요?”

서호의 물음에 푸티와 아리스가 서로 눈을 마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둘의 웃음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서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리고 애당초 이곳으로 온 게 로제타 때문이니까 이미 이곳에서의 제 시작은 로제타 아닌가요?”

어색하게 웃던 아리스가 그런 서호의 말에 입꼬리를 내리고 답했다.

“…음, 그것도 폐하께서 직접 들으시면 참 좋아했을 것 같은데.”

푸티가 무언가 결심한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아리스가 푸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푸티, 수고해.”

“도대체 둘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서호의 중얼거림에 아리스가 신경 쓸 필요 없다며 답했다.

“그냥 폐하께서 서호님을 정말 매우 많이 아끼신다는 소립니다.”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고 그냥 상황을 무마하려고 하는 말 같았으나 덕분에 부모님을 떠올리며 가라앉던 기분이 좀 나아진 것도 같았다.

빈말일지라도 누군가 그렇게 자신을 생각해 준다는 게 위안이 됐으니까.

***

몇 번 더 별것 아닌 농담을 주고받은 뒤, 아리스가 물었다.

“자, 그럼 서호님,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할게요. 오늘 다른 일정이 있으신가요?”

“안겔님을 만나기로 했어요.”

첫 만남 이후로 사흘이나 지나서야 다시 마련된 자리였다. 정말 몸이 안 좋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이쪽은 물을 걸 생각할 시간이 많아 좋았다.

“신녀님요?”

“아리스님도 신녀님을 아세요?”

아리스가 서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서호님, 아리스라고 편하게 부르세요.”

서호가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아리스는 편하게 부르지 않으실 거죠?”

아리스가 묘한 눈으로 서호를 바라보며 답했다.

“네, 아무래도 폐하의 손님이시니 저보다 위치가 높으신 게 맞습니다. 이것 역시 상식이에요. 그러니 푸티가 따로 언질을 주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굳이 말을 높이실 필요도 없습니다.”

황제의 손님이라는 게 생각보다 신분이 꽤 높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서호라는 인물 자체는 이곳에서 보잘것없는 위치이겠지만 로제타는 황제이고, 서호는 어떤 의미로든 앞으로 로제타와 엮이게 될 사람이니 말을 높이는 것 아닐까.

대충 정리를 마친 서호가 답했다.

“그래요? 그래도 말까지 놓는 건 좀 그래서.”

“그럼 그냥 호칭이라도 편하게 해주세요. 저를 편하게 부르시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호칭 문제를 정리한 아리스가 다시 신녀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무튼 신녀를 만나신다고요.”

“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셔서요. 미리 물어볼 것들을 준비해 왔는데….”

서호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자 아리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질문을 미리 준비하셨습니까?”

서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또 궁금한 게 생겼다고 부르기도 힘들 것 같아서요.”

로제타와 사이가 나쁜 걸 뻔히 알면서 궁금한 것이 있다고 안겔과 따로 연락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니 미리 질문을 준비해 놓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었다. 아리스가 서호가 꺼낸 종이를 가리켰다.

“제가 먼저 한번 봐도 괜찮을까요?”

“네. 그리 대단하지는 않아요.”

서호에게서 종이를 받아 간 아리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종이를 건넸다.

“역시 읽을 수 없네요.”

그제야 서호는 그가 종이에 한글을 썼다는 걸 기억해냈다.

“맞아요. 여기 말을 읽을 수는 있는데 제가 쓸 수는 없었으니까.”

“앞으로 글을 쓰는 것 위주로 공부를 하면 되니까요. 읽는 것 자체는 가능하시니 금방 배우실 겁니다.”

“네.”

“그래서 뭘 물어보실 건가요?”

서호가 뭉뚱그려 이야기를 꺼냈다.

“과거의 사례를 좀 알아볼까 해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한 게 추가되면 더 물으려고요. 사실 이미 중요한 이야기는 전부 다 들어서 꼭 들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요.”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요. 학생이셨다고 들었는데 공부를 잘하셨나요?”

서호가 장난스럽게 답했다.

“못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러자 아리스가 장단을 맞추는 것처럼 익살맞은 얼굴로 말했다.

“아하, 그 말은 매우 잘했다는 뜻이군요.”

서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서호는 남들이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다니지는 못했어도.

“뭐.”

그러자 아리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는 분이시군요? 친해지려고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나도 아리스가 마음에 들었어요.”

“다행이군요. 다만 폐하 앞에서는 너무 티 내지 말아주세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던 차에 푸티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리스님!”

푸티의 큰 소리에도 아리스는 전혀 겁먹지 않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 혼났네요. 무서워라.”

여전히 능청맞은 태도에 푸티가 씩씩거리며 아리스를 노려봤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서호는 작게 웃었다. 안겔의 문제가 조금 걸리긴 했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

아리스가 돌아간 뒤 푸티와 단둘이 남게 된 서호가 그를 불렀다.

“푸티.”

“네, 서호님.”

로제타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참이었다.

아직 서호가 읽을 만한 책이 준비되지도 않았고 딱히 무언가 할 일도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다른 이와 대화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물론 대화 상대라고 해봐야 로제타 아니면 푸티였지만.

“안겔과 로제타는 정확히 어떤 사이예요? 푸티는 로제타를 가장 가까이에서 돕고 있으니까 잘 알죠?”

이곳에 오고 난 뒤 원래보다 질문이 많아진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호에게 이곳은 매우 생소한 곳이었으니 궁금한 게 많았다.

곧이어 있을 안겔과의 만남이 걱정되기도 했고 시간을 보내기에도 나쁘지 않은 화제였다.

“신녀님과 폐하의 관계요?”

정확히는 객관적인 시점에서의 로제타와 안겔의 관계가 알고 싶었다.

도대체 그 선명한 적의는 어쩌다 생긴 것일까. 정말 로제타의 말처럼 그저 신에게 이름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인 걸까?

푸티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는 폐하의 시종이다 보니 폐하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우선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 감안하고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푸티는 참 솔직했다.

“참고할게요.”

“그분께서는 폐하를 질투하시죠. 그리고 폐하께서는 그분을 귀찮아하시고요.”

“귀찮아한다고요?”

그건 좀 의외였다. 안겔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며 눈물을 보이기에 로제타 역시 안겔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귀찮다니.

귀찮다는 감정보다는 더 큰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다 한 명은 적의를 내보이는데 한 명은 귀찮아한다. 관계가 조금 이상했다.

‘역시 그 눈물, 무기로 쓰는 건가?’

저번에 생각했던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지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황제라고 하지만 푸티나 아리스가 로제타의 눈치를 너무 보는 것 같기도 하지.’

자신이 본 것과 다른 로제타의 모습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 푸티가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 종종 찾아오셔서 시비를 거시거든요.”

시비라는 건 푸티의 관점인 걸까? 아니면 객관적인 관점에서도 그런 걸까? 서호는 푸티의 말을 끊지 않고 계속 들었다.

“이번에 그분께서 주신 거울 역시 시비 비슷한 게 아닐까 싶었는데 다행히 아니었죠. 서호님이 나타나셔서 저는 좋습니다.”

로제타만큼은 아니지만 대놓고 드러내는 호의에 서호가 물었다.

“푸티는 나한테 굉장히 친절하잖아요. 그건 내가 로제타의 운명이기 때문인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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