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고맙습니다. 역시 푸티밖에 없어요.”
“돕고 살아야죠.”
“공문은 최대한 빨리 작성해서 마법사 쪽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푸티는 적당히 친절하면서도 틈 없는 모습을 보좌관들에게 보이며 본인의 입지를 공고히 다졌다. 집무실을 나서는 푸티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이 맛에 폐하의 시종을 하지!’
아무리 힘들어도 이 자리를 고수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람들에게 받는 감사 인사 때문이었다.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만들어주는 그런 인사들.
폐하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주변 이들에게 적당한 조언을 해주는 친절하고 일 잘하는 시종! 푸티가 바라는 완벽한 시종의 모습이었다.
***
서호는 방을 나가다 말고 계속 자신을 돌아보는 로제타에 웃어버렸다. 집무실에 가겠다고 말을 해놓고 붙잡아 달라는 듯 계속 뒤를 돌아보는 게 얼마나 웃긴지 본인은 알까.
“로제타, 그냥 공부하는 거예요. 항상 머무는 이 방에서요. 더군다나 푸티도 함께 있잖아요.”
로제타는 서호를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쉽게 깨지는 유리 인형처럼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게 싫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로제타의 일상을 망가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로제타가 서호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첫날이니 내가 함께 있는 게 좋지 않겠나?”
서호는 습관처럼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로제타의 손을 떼어냈다.
“어린애도 아니고 괜찮아요.”
“…알았다. 마법사 아리스?”
로제타가 아리스를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숙였다.
“네, 폐하.”
“잘 부탁하지.”
아리스에게 건조하게 인사를 건넨 모습과 상반되게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서호를 돌아보던 로제타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방을 떠났다.
로제타가 방을 나서고 나서야 제대로 인사를 할 분위기가 잡혔다. 서호는 그가 로제타에게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낸 지 사흘 만에 마련된 수업에 고마움을 느꼈다.
‘신경을 써 줬으니 더 열심히 해야지.’
아리스가 자리에 앉아 푸티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가볍게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해야 할지 정도만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아까 인사했지만, 이서호예요. 서호라고 불러주세요.”
“성은 없고 아리스입니다. 아리스라고 불러주세요.”
그 말에 서호는 저번부터 궁금했던 것을 입에 담았다.
“푸티도 그렇고 안겔도 성을 알려주지 않던데요.”
아리스가 작게 탄성을 내뱉더니 물었다.
“공부하면서 이곳 상식도 알려드릴까요?”
서호로서는 반가운 말이었다.
“그래도 되나요?”
서호와 아리스의 시선이 푸티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 모두 로제타의 마음은 푸티가 제일 잘 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푸티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푸티가 반대하지 않자 아리스가 곧바로 서호의 질문에 답했다.
“우선 신전 소속들은 성을 버립니다. 저희 마법사들도 황실 마법사로 들어오는 순간 성을 버리고요.”
“푸티는요?”
“푸티는 평민이라 그런 겁니다. 평민은 성이 없거든요.”
“아, 그렇구나.”
“뭐, 저도 평민이긴 합니다.”
역시나, 신분제가 존재하는 곳이긴 한 모양이었다.
“푸티는 폐하의 직속 시종이니 그래도 준 귀족 취급을 받고요.”
그렇게 말한 아리스가 푸티를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 능청스러운 얼굴에 질색하는 푸티를 보며 웃음을 흘린 서호가 물었다.
“성을 버리는 이유는 뭐예요?”
“황실에 충성하고 신전을 위해 헌신하라는 의미입니다.”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우선은 오늘 만나기로 한 이유부터 해결하죠. 글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요?”
“네.”
“말은 통하시는 것 같은데, 본래 쓰던 언어는 아니라고요?”
“네.”
“글을 읽는 건 가능합니까?”
서호가 두리번거리며 무언가 읽을 것을 찾자 아리스가 품에 있던 종이를 꺼내 서호에게 넘겼다. 다행히 자연스럽게 뜻이 이해됐다.
“네, 잘 읽혀요.”
“그럼 금방 익히시겠네요.”
“그런가요?”
“네.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서호는 안도했다.
“다행이에요.”
“그럼 오늘은 가볍게 철자 정도만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래요.”
철자 정도야 어렵지 않은 것이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쉽게 뜻을 읽어낼 수 있게 돼서인지 서호는 빠르게 철자를 외웠다.
아리스가 대단하다는 듯 서호를 바라보며 손뼉을 쳐주자 조금 민망해질 정도였다. 서호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데 아리스가 물었다.
“너무 일찍 끝난 것 같은데, 그럼 다시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상식이요?”
“네.”
확실히 너무 빨리 끝나기는 했다. 잠시 고민하던 서호가 제일 궁금했던 것을 꺼냈다.
“그럼 새벽의 힘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알려주세요.”
“새벽의 힘이요?”
아리스가 사용한다는 마법 역시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일 궁금한 건 로제타와 관련된 일이었다. 로제타가 서호를 신경 써주는 만큼 서호 역시 로제타에게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관심이 갔다.
사실 이곳에 오게 된 뒤, 하루 중 대부분을 로제타와 함께하고 있으니 다른 곳에 관심이 갈 일도 없었다.
“네, 마법 같은 건 대충 예상이 가는 것 같은데… 신력이라고 하면서 새벽의 힘이라고 부른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힘이에요?”
서호는 성력과 신력의 차이가 뭔지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둘 다 신과 연관된 힘인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왜 나누는 거지?’
또 로제타의 그 검은 안개를 신력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새벽의 힘이라고 부르는 걸까?
서호의 물음에 아리스가 푸티의 눈치를 살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줄지 말지를 아리스 혼자 정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호가 재빨리 아리스를 따라 푸티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푸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푸티의 허락에 서호가 환하게 웃으며 아리스를 쳐다보자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어차피 곧 아시게 되실 테니까 괜찮을 겁니다. 폐하의 옆에 계시면 아실 수밖에 없죠. 정확히 말하면 신력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아리스가 하얀 종이에 ‘신력’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마법도 바람, 물, 불, 번개를 만들기도 하고 지진을 일으키는 등 여러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신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죠. 정확히 말하면 신력은 마법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정순한 힘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직도 뭔가 아리송했다. 서호가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데 아리스가 손을 불쑥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그의 손에 조그만 불덩이가 생겨났다.
서호의 눈이 동그래지자 아리스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서호가 조심스럽게 아리스의 손 위로 손을 가져가자 그가 경고했다.
“뜨거우니 만지지는 마시고 그냥 이게 진짜 불인지만 확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서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스의 손 위의 불을 관찰했다. 정말 불이 맞았다. 서호가 빤히 불을 쳐다보는데 그가 불을 없애더니 설명을 이었다.
“저희가 1의 힘으로 조그만 불씨를 만들 수 있다면, 불의 신력을 가진 사람은 1의 힘으로 뜨거운 용암을 만들 수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몸에 전혀 무리가 가지도 않죠. 대신 불만 쓸 수 있지만요.”
아리스는 설명을 꽤 잘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서호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한 마법에 특화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요?”
“뭐, 그것도 맞는 말이죠.”
“그럼 새벽의 힘은 무슨 힘인데요?”
불의 힘이라면 불과 관련된 거라는 게 딱 특정이 됐지만 새벽이라니 참 모호했다.
“사실 신에게 이름을 받아 신력을 쓰는 사람들은 역사에 몇 없었죠. 그래서 처음 폐하께서 새벽이라는 이름을 받았을 때 저희도 그게 무슨 힘인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폐하께서 힘을 쓰고 나서야 알게 됐죠.”
한번 숨을 고른 아리스가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폐하의 힘은 밤에 가까운 새벽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밤에 가까운 새벽. 서호는 로제타의 검은 안개를 떠올렸다.
“겉모습이 검은 안개라서요?”
“그런 뜻도 있고, 능력이 아침보다는 밤과 어울리죠. 소멸 비슷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소멸 말고도 여러 능력이 있지만 보통은 그걸 많이 쓰세요.”
설명을 들어도 명확하게 딱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서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렵네요. 제가 생각하는 새벽이랑은 다른가 봐요. 정확히는 제 이름하고 다른 거지만….”
“네?”
서호가 설명했다.
“로제타와 푸티는 들었지만, 제 이름의 뜻이 새벽 호수라는 뜻이거든요.”
“정말요?”
놀란 얼굴의 아리스에 서호가 웃으며 답했다.
“네. 재미있는 우연이죠?”
“그렇네요. 그런데 다르다니요?”
서호는 부모님께서 종종 하시던 말씀을 떠올리며 말했다.
“부모님께서 제 이름을 새벽 호수라고 지으신 건 태몽 때문이에요.”
“태몽이요?”
“그러니까 아이를 갖고 나서 꾸는 꿈이요.”
아리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자의 반응이 좋으니 자연스레 말이 줄줄 나왔다.
“꿈속에서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 겁에 질려 뭔가에 쫓기듯 도망가고 있는데 갑자기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그 빛을 향해 달려가자 숲 한가운데에 동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호수가 나타났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