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지금 되게 자연스럽게 이쪽 말이 입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런 것들도 다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내가 가르쳐 주겠다.”
“로제타는 일이 많잖아요. 황제는 일이 많은 게 맞죠?”
“그리 많지는….”
서호는 로제타의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호는 로제타의 입에서 안겔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부정적인 말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무리하지 말고요. 푸티는 어때요?”
그러자 여태까지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나 있던 푸티가 재빨리 답했다.
“저는 남에게 글자를 가르쳐 줄 수준은 못 됩니다.”
“그럼….”
그때 푸티가 의견을 냈다.
“폐하, 마법사 아리스는 어떨까요? 그분은 서호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던 로제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네. 그리고 내일 안겔님과의 약속은….”
로제타가 서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호, 또 만나고 싶나?”
안겔과 로제타의 관계가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내일 안겔을 만날 필요가 있었다. 또 안겔을 불러들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것을 물어보고 알아둬야 할 테니까.
“네, 물어볼 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로제타는 불편하면 오지 말아요.”
아무래도 본인을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건 불편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서호 혼자 안겔을 보는 게 나았다.
하지만 로제타는 단호하게 서호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다. 그대를 홀로 보낼 수는 없어. 같이 가지.”
서호가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고 하는데 푸티가 나서서 답했다.
“그럼 약속은 그대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개를 숙인 푸티가 곧바로 방을 떠났다. 푸티의 뒷모습과 로제타를 번갈아 바라보던 서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랄까, 두 사람은 장단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푸티가 로제타의 마음을 잘 읽고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느낌이었다. 로제타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순식간에 대화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 참 능숙해 보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로제타를 돕는 시종이라 그런가?’
서호의 웃음에 로제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서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래서 마법사 아리스는 도대체 누구예요?”
“그대가 잠에서 깨어난 날, 방 안에 사람이 한 명이 더 있었는데….”
“음.”
서호는 흐릿한 시야 속 보이던 갈색 머리의 사내를 떠올렸다.
“아, 그 사람요?”
마법사. 서호의 세계에서는 동화 속에서나 존재했던, 불을 내뿜고 바람을 날리는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마법사였다. 서호의 눈이 반짝였다.
***
푸티는 작게 한숨을 쉬며 빠르게 방을 벗어났다.
서호는 참 여러모로 유한 사람이었다.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서호가 로제타를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폐하를 어려워하지 않는다고 해야겠지.’
물론 서호가 로제타를 어려워하고 꺼렸다면 그건 그것대로 푸티를 힘들게 했겠지만 아무튼 서호가 로제타를 가까운 사람으로 여기면서 푸티는 여러모로 등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힘들어.’
서호가 있을 때는 로제타가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서호가 잠들었을 때나 서호가 없을 때 그가 어떻게 변할지는 푸티도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푸티는 최대한 로제타의 기분을 살피며 눈치껏 두 사람의 대화에 간간이 끼어들었다.
로제타가 화를 내지 못하게, 그리고 서호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게 적당히 로제타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이다.
다행히 그런 푸티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조금 전 로제타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아이고, 피곤해라.’
푸티는 통통 스스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로제타의 보좌관들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마법사 아리스에게 공문을 보내야 했다.
사실 푸티가 로제타에게 마법사 아리스를 추천한 것은 서호를 향한 로제타의 독점욕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분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시니까.’
식사도 방에서, 식사를 나르는 시종도 오로지 푸티뿐이었다.
서호가 안겔을 보러 갈 때도 최대한 사용인들을 물리고 자리에 있는 사용인들도 서호가 지나갈 때는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아직도 서호님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고.’
푸티는 자연스레 로제타가 다른 이들에게 서호를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푸티는 이미 한번 서호를 본 적이 있는 마법사 아리스를 꺼내 들었다. 서호를 직접 눈으로 본 이는 네 명뿐인데 그중 서호를 가르치기 적절한 사람은 아리스였다.
‘신녀에게 공부를 시켜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안겔을 떠올리자 푸티는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서호가 안겔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울먹거리던 로제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름 끼쳐.’
푸티는 어떤 의미로든 자신이 로제타의 사람이라는 것이 좋았지만 그래도 서호와 같은 의미로 로제타의 사람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로제타가 알면 경을 치겠지만 사실 푸티는 서호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안타까우셔.’
그도 모르는 사이에 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다른 세계로 끌려왔는데, 그 일들을 벌인 주범은 아름다운 얼굴과 눈물을 무기로 서호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 않는가.
그 얍삽한 행태에 몸을 부르르 떨던 푸티는 집무실 앞에 멈춰 서서 표정을 정리했다.
이런 생각은 속으로만 해야 했다. 다른 이들에게 굳이 이런 속마음을 알릴 필요도 없었고.
‘나는 훌륭한 시종이니까!’
로제타는 푸티 혼자서만 욕하는 것이지 다른 이들이 로제타를 욕한다면 그건 곧 푸티를 욕한 것이 되었다.
푸티가 자연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매달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잔뜩 긴장해 문가를 바라보던 보좌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푸티를 반겼다.
“아, 푸티!”
“또 폐하인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한 보좌관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보탰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계시면 몸이 긴장해서….”
“물론 업무 효율은 잘 올라가지만요.”
“진짜 너무 긴장해서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니까요?”
서호 덕에 로제타가 일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서호가 집무실이라는 단어에 반응했기 때문인지 로제타가 보좌관들과 함께 집무실에서 일하는 것이다.
덕분에 일은 많지만 상사가 있어도 상사가 없는 것처럼 일하던 보좌관들이 로제타의 눈치를 보느라 굉장히 불편해했다고 사용인들에게 전해 들었다. 한참 푸념을 늘어놓던 보좌관 중 하나가 푸티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폐하께서는 어째서 집무실로 오신 겁니까?”
그러자 다른 이들도 관심이 있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맞아요. 보통 방에서 일을 보시잖아요.”
“설마 앞으로도 그러시는 겁니까?”
보좌관들의 질문에 푸티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마 앞으로도 종종 집무실로 오실 것 같아요.”
“네?”
“어째서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보좌관들이 하얗게 굳어졌으나 푸티는 말을 얼버무렸다.
“사정이 있어서요.”
죽는 소리를 내며 한참 앓던 보좌관들이 이내 푸티에게 집무실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나저나 푸티는 어쩐 일입니까?”
푸티가 본론을 꺼냈다.
“공문을 보내야 할 게 있어서요. 황실 마법사 아리스에게요.”
“아, 그 정도야 간단하죠.”
보좌관이 서류 한 장을 꺼내며 물었다.
“뭐라고 보내야 할까요?”
“폐하께서 글자 공부를 가르쳐 줄 선생을 구하시거든요.”
“글자 공부요?”
보좌관 중 반절 정도의 눈빛이 번쩍였다. 역시 소문을 들어 어느 정도 상황을 아는 이들이 있는 듯했다.
아니,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이미 다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서호가 로제타의 방에 나타난 그 날, 로제타의 방 앞에는 많은 마법사가 있었다.
푸티가 나름 단속을 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전부 입을 다물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대놓고 존재를 밝히기도 했고.’
황제궁의 사용인들 역시 그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 적어도 황제궁 내에는 이미 서호에 관한 이야기가 퍼졌다고 봐야 했다.
‘아직 서호님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나돌지는 않는 것 같지만, 폐하의 운명이 나타났고 폐하가 그분을 애지중지한다는 건 다 퍼졌겠지.’
푸티는 정보를 달라는 듯 그를 바라보는 보좌관들에게 그저 웃어 보였다.
“더는 안 돼요. 하지만 곧 알게 되실 거예요.”
푸티는 언제나 그에게 친절한 보좌관들에게 나름의 조언을 건네기로 했다.
“폐하께도 따로 여쭤보시지 않는 걸 추천해요.”
푸티의 말에 보좌관 중 하나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여쭤보면 안 되는 겁니까?”
푸티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싫어하세요. 아예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좋겠어요. 잘못하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아요.”
웃고 있으나 단단한 푸티의 입매를 확인한 보좌관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정도입니까?”
더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탐색하는 눈빛들이 느껴졌다.
“네, 그러니까 폐하께서 집무실에서 일하러 오셨을 때 괜히 무언가 알고 있다고 티 내지 마세요.”
푸티가 더는 말하지 않을 것을 알아차린 보좌관들은 그 이상 그에게 매달리지 않고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말할 수 있는 거였다면 이미 푸티가 말을 전해줬을 거라는 걸 그들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