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서호?”
서호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로제타를 돌아봤다.
“네?”
로제타가 걱정스러운 듯 서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식사가 입에 맞지 않나?”
서호는 고개를 저었다. 평소 서호가 먹던 음식과 완전히 다르긴 했지만, 딱히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기에 맛있게 먹었다.
“아니요. 맛있어요.”
서호의 답에 로제타가 눈매를 좁혔다.
“입이 짧은가?”
입이 짧냐니. 그러니까 음식 투정을 하냐는 소리인 걸까, 아니면 많이 먹지 않느냐는 의미인 걸까?
둘 중 뭐가 됐든 간에 입이 짧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편식하냐고요? 적게 먹었다는 건가…. 입이 짧다는 소리를 듣기에는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은데요?”
실제로 서호는 평소 먹던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음식을 먹었다. 이미 배가 차다 못해 조금 과하게 먹었다 싶은 느낌이었고.
서호의 말에 로제타가 눈을 찌푸렸다.
“많이 먹은 것 같지 않은데.”
서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로제타는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로제타는 서호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매우 적은 양의 음식을 먹었으니까.
물론 로제타의 태도가 서호를 향한 호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밥을 잘 먹지 않는다고 먹을 것을 챙겨주는 사이라니, 요 몇 달 서호에게는 존재하지 않던 관계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더 먹으면 더부룩해져요. 로제타는 내가 먹은 양보다 훨씬 적게 먹었잖아요?”
서호의 지적에 로제타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도 종종 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면모에 웃음이 나왔다.
‘특히 틈만 나면 우는 거 말이야.’
로제타는 정말 별것도 아닌 일에 눈물을 쏟는 편이었다. 서호는 저 툭 튀어나온 입이 혹시나 다시 울음소리를 낼까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사실 아까부터 이야기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로제타.”
“왜 그러지?”
서호는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오롯이 서호의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로제타뿐이라서 만약 로제타가 안겔과 가까운 사이라면 조금 곤란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만 한 적의는 그냥 넘길 수 있는 가벼운 감정이 아니어서 서호는 우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안겔님은 어떤 분이세요?”
서호의 물음에 로제타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신녀? 왜?”
“그냥 여기서 로제타와 푸티 다음으로 만난 사람이 그분이니까요. 궁금해서요.”
로제타가 말을 고르듯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내게 물었었지. 신전에서 나를 위해서 거울을 준 게 아니냐고.”
“그랬죠?”
“본래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좋아하는 건 힘든 일이지만, 특히 신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전에는 내가 신에게 이름을 받았기 때문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 그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로제타는 너무 담담하게 말했다. 황제라는 자리에 있기 때문인 걸까?
뭐가 됐든 적의에 익숙해진다는 게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서호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로제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안겔은 나를 싫어하는 쪽이지.”
그 시선은 서호를 향한 것이 아니라 로제타를 향한 시선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로제타를 좋아하지 않으니 로제타의 운명이라는 자신도 싫어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서호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로제타가 눈썹을 찌푸렸다.
“예전에는 하찮은 질투 때문인 줄 알았는데, 이제 와 보니 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 같군.”
아까는 어린애처럼 굴더니 이번에는 또다시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상대에게도 저렇게 여유롭게 굴 수 있다니.
‘이것도 황제라서? 아니면 그냥 로제타의 성격이 그런 건가.’
로제타가 불쑥 서호의 손을 붙잡았다.
“그래서 말인데 그대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로제타가 어깨를 아래로 축 늘어트린 뒤, 서호의 눈치를 보듯 말했다.
“나는 그대가 신녀에게 존칭을 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네?”
“그대가 신녀와 가까워지면 나는….”
로제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우울한 낯을 했다.
서호는 이다음 이어질 흐름을 알 것 같았다. 여기서 서호가 빨리 답을 해주지 않으면 이 어른스러우면서도 어린애 같은 사내는 다시 눈물을 글썽일 것이다.
‘뭔가 눈물에 이용당하는 느낌인데….’
문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저 눈에서 또 눈물이 나올까 걱정이 된다는 거였다.
‘몇 달 내내 우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 건가?’
서호가 로제타의 울음에 반응하는 것은 조건 반사적인 반응일지도 몰랐다.
서호는 자신의 눈치를 보며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로제타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로제타는 저렇게 걱정을 하며 서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서호는 일단 붉은 실로 연결된 로제타의 운명이었다.
‘안겔의 말대로라면 어떤 식으로 엮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되든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사이고.’
자신을 원해서 몇 달 동안 울어댄 사람에게, 이렇게 자신을 향한 감정이 넘쳐흐르는 이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기란 힘들었다.
특히 최근 외로움을 느끼던 서호에게 로제타의 감정은 더 크게 다가왔다.
‘누가 나를 저렇게까지 원할 수가 있다는 게….’
물론 저 아름다운 얼굴도 서호가 로제타에게 호감을 느끼는 데 큰 이유가 됐겠지만, 아무튼 서호로서는 안겔보다는 로제타를 더 신경 쓰는 게 당연했다.
서호는 로제타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 입을 열었다.
“로제타가 원한다면 안겔이 없는 자리에서는 그렇게 할게요.”
서호의 말에 로제타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음 지었다. 그 탓에 로제타의 눈에 넘칠 듯 고여 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결국 울렸네.’
너무 생각을 오래 한 탓인지 결국 고인 눈물이 떨어져 버렸다. 서호가 이제는 익숙하게 눈물을 닦아주는데 로제타가 어리광을 피우듯 말했다.
“그 여자가 있는 곳에서도 그래도 돼.”
“서로 가까워지지 않으려면 차라리 예의를 차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상대에게 예의는 지키고 싶은데.”
“그건….”
잠시 망설이던 로제타가 짧게 고민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호는 밝아진 얼굴을 보며 안심했다. 우는 것도 아름답긴 했지만 그래도 밝은 얼굴이 더 좋았다. 서호는 로제타의 얼굴에 남은 눈물 흔적을 마저 닦아내고 손을 떼어냈다.
로제타와 사이가 안 좋다고 안겔을 나쁘게 보지는 않겠지만 저쪽에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다.
‘거리를 두는 게 좋겠지.’
안겔이 로제타가 신에게 이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싫어한다던 로제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런 근본적인 부분에서의 부딪침이라면, 서호가 로제타의 운명인 이상 안겔과 서호와의 관계도 긍정적으로 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냥 지금처럼 적당히 예의를 갖추면서 행동하는 게 낫겠어.’
로제타의 직속 시종이라는 푸티와 친해지기 위해 그에게는 조금 더 친근하게 행동하고 있었으나, 안겔에게는 굳이 그런 노력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대가 나와 제일 친했으면 좋겠다.”
서호는 안겔에 관한 생각을 지우고 눈앞에서 부끄러운 듯 웃고 있는 로제타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지금은 로제타와 제일 친한데요.”
로제타가 눈을 빛내며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도.”
서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마 그렇게 되겠죠? 나한테 제일 친절하고 다정한 건 로제타니까요.”
로제타가 얼굴을 붉혔다. 그 붉음을 눈으로 좇으며 서호는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저렇게 잘난 얼굴을 싫어하기도 힘들 텐데.’
아무리 화가 나도 저 얼굴을 보면 모든 게 상관없어질 것 같았다. 더군다나 로제타는 성격도 좋았다.
‘잘 우는 걸 보면 오히려 마음이 약한 편 같은데.’
잘 우는 예쁜 사람. 그게 이틀간 서호가 본 로제타에 대한 평가였다. 그리고 로제타의 말에 따르자면, 그를 싫어하는 안겔.
서호는 새삼스럽게 안겔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
몇 번 더 서호에게 안겔과 친하게 지내지 말 것을 당부하고 그러겠다는 답을 들으며 행복해하던 로제타가 이내 다시 어른스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신녀가 도를 넘게 행동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나를 싫어해도 근본적으로 신녀는 신을 섬기는 이니까.”
이제 와 어른스러운 척을 해봤자 아까 어리광을 피우듯 굴던 모습이 남아 있어 멋있어 보이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서호는 안겔에게 답을 들었을 때부터 생각하던 것을 로제타에게 부탁했다.
“참, 로제타. 내가 글공부를 할 수 있게 책 같은 걸 좀 가져다줄 수 있어요?”
“글?”
서호가 안겔과의 대화를 상기시켰다.
“안겔이 그랬잖아요. 언제까지 대화가 통할지 알 수가 없다고요.”
“그러고 보니 그랬지.”
자연스레 말이 해석되고, 입에서도 나오고 있어 편했는데 어느 순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굉장히 불편할 것 같았다. 물론 이 능력이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비를 해두는 것이 좋았다.
‘어차피 여기서 나는 할 게 별로 없잖아.’
로제타는 황제이기도 하니 바쁠 것이고, 따라서 그에게 공부를 도와달라고 하는 건 곤란할 것 같았다. 그러니 일단 혼자라도 공부를 해볼까 싶었다.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순간 머릿속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너무 빨리 받아들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서호는 그 생각을 붙잡지 않았다.
‘어차피 거기엔 이제 아무도 없는데.’
흘끗 로제타를 바라보던 서호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마무리했다. 어쨌든 앞으로 이곳에 살려면 필수적으로 글자는 알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