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안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예리한 질문이었다.
운명이라고 해서 그 관계가 꼭 긍정적일 필요는 없었다. 인생의 친구가 될 수도,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최악의 원수로 지내게 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사람 간의 관계였다.
안겔이 모호하게 답했다.
“운명이 꼭 연인이 될 필요는 없죠. 연인이나 절친한 친구 외의 다양한 관계까지 모두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다만 붉은 실이 연결된 이상 어떤 식으로든 끈끈하게 엮이게 되어 있답니다.”
안겔이 지금도 로제타에게서 서호의 발목으로 끈덕지게 영역을 넓혀가는 붉은 실을 살피는데 그 시선을 따라 움직이던 서호가 물었다.
“붉은 실을 볼 수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보이세요?”
“네, 그렇습니다.”
안겔의 답에 서호의 눈에 흥미가 돋았다.
“안겔님에게만 보이는 건가요?”
“일단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서호가 감탄하며 안겔을 바라봤다.
“대단하시네요!”
순수하게 감탄하는 그 얼굴에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안겔의 입이 열리려는데 로제타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도 있는데.”
서호가 로제타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가요?”
로제타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뻔뻔하게 말했다.
“나도 나만 가진 능력이 있어.”
그 유치한 행동에 안겔이 기함하며 로제타를 돌아봤다. 잠시나마 서호의 관심이 그녀에게 쏠렸다고 그새를 못 참고 그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이었다.
안겔은 코웃음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서호는 로제타의 바람대로 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래요?”
서호가 흥미를 보이자 로제타가 재빨리 새벽의 힘을 풀었다. 그들의 주위로 검은 안개가 퍼지기 시작하자 안겔은 손에 힘을 주고 입술을 깨물었다.
시커먼 신력을 보는 순간 그날의 굴욕이 떠올랐고 정말 화가 나지만 동시에 두려워졌다. 그녀를 향한 힘이 아님에도 식은땀이 났다. 안겔이 침착함을 되찾으려 애를 쓰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됐다.
“이건 뭐예요?”
안겔은 공포심을 몰아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폐하께서 가지신 신력입니다. 제가 가진 성력과는 조금 결이 다르죠.”
어떻게든 로제타를 엿 먹이기 위한 행동이었으며 동시에 그를 자극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서호라는 사람 자체가 선하고 성격이 좋으며 적응력까지 뛰어난 모양이니 최악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로제타가 그 더러운 성격을 모두 내보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로제타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서호에게 친밀하게 구는 것이 좋을 테고.
“신력이요?”
서호의 물음에 안겔이 친절한 미소를 꾸며내며 설명을 시작했다.
“폐하께서는 아버지에게 가운데 이름을 받으셨죠.”
“가운데 이름… ‘오로라’요?”
“네, 맞아요. 새벽이라는 뜻을 지닌 그 이름을 받으면서 폐하께서는 신력을 가지게 되셨어요. 그 신력에는 새벽의 힘이 깃들어 있고요.”
안겔의 답에 서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서호가 신기하다는 듯 로제타를 돌아봤다.
“로제타도 이름에 새벽이라는 뜻이 있네요?”
차가운 눈매로 안겔을 바라보고 있던 로제타는 서호가 그를 돌아보자 다시 부드럽게 표정을 풀고 그를 마주 보다 서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되물었다.
“그대도 이름에 새벽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나?”
“네. 서호, 그러니까 ‘새벽 서’에 ‘호수 호’를 써요. 제 이름은 새벽 호수라는 뜻이에요.”
안겔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새벽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그건 정말 운명 같지 않은가. 안겔이 그런 생각을 한 것처럼 로제타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음이 틀림없었다.
서호의 말이 끝나자 로제타의 얼굴이 번쩍거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반대로 그렇게 로제타의 얼굴이 피어날수록 안겔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서호는 그 우연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똑같이 이름에 새벽이라는 뜻이 들어가니까 이상하네요.”
한참 기쁨을 즐기던 로제타가 탄성을 터트리듯 말했다.
“그대와 나는 정말 운명이군!”
서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네요. 정말 운명이 맞나 봐요.”
안겔은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진 두 사람을 보며 입매를 일자로 다물었다.
이건 안겔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안겔은 이런 걸 바라고 로제타에게 거울을 선물해준 것이 아니다.
안겔이 시커멓게 가라앉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서호가 그녀를 돌아봤다.
“안겔님?”
서호의 부름에 안겔은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이름이 참 예쁘시네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로제타가 신력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는 소리죠?”
“네.”
서호가 안겔과 로제타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 다 대단하네요.”
그러자 로제타가 엷게 웃으며 답했다.
“별로 대단치 않은 힘이다.”
“엄청 대단한 것 같은데….”
“그대가 더 대단하다.”
“뭐라는 거예요?”
서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황제를 돌아봤다. 안겔은 더 이상 표정을 관리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별로 좋지 않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일 다시 이야기해도 될까요?”
서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저도 질문할 걸 좀 더 생각해 올게요.”
화가 나는 와중에도 참 성실한 사람이다 싶었다. 하지만 그를 향한 호감보다도 로제타를 향한 악의가 더 컸다. 황제가 신력을 언급한 순간 터져 나온 감정이 제어가 안 됐다. 안겔이 입술을 깨물며 로제타를 향해 인사했다.
“폐하, 죄송합니다.”
“그래.”
안겔은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뒤로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어떻게든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곧장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푸티가 뒤에서 안겔을 불렀다.
“신녀님.”
“푸티.”
푸티가 안겔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많이 안 좋으신가요?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 탐색하는 듯한 시선에 안 그래도 비틀린 심기가 삐죽 솟아올랐다.
“아니!”
안겔이 목소리를 높였다가 그녀에게로 모이는 사용인들의 시선에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에요. 혼자 가겠어요.”
푸티는 안겔의 상태를 확인해 보더니 뒤로 물러났다.
“네, 알겠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시면 불러주세요.”
“그래요.”
안겔은 곧바로 그녀에게 주어진 손님방으로 향했다. 행복해하는 황제의 모습이 정말이지 너무도 꼴 보기 싫고 화가 났다.
‘어째서 항상….’
***
서호는 오늘 만났던 안겔을 떠올렸다. 여러 의미로 시선이 가는 여자였다. 은발을 가진, 계산적으로 웃던 여자.
계산적이라는 것이,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면 가식적이라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그러니까.’
서호 또한 일단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좋게 보이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었다.
안겔에게 자신은 처음 만난 사람이었고 로제타는 황제였다. 로제타는 편한 자리라고 했지만, 신녀에게까지 그 자리가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태도가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호가 안겔에게 시선이 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역시 그 색이 좀….’
안겔은 서호에게 이곳이 진짜 다른 세계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은발에 은안, 그리고 그녀에게서 은연중에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
‘신녀라서 그런 걸까?’
안겔의 주위에서는 은은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마법, 성력, 신력이라는 이야기 자체도 물론 신기했고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줬으나 아직 제대로 그 능력을 경험해 보지 않은 서호는 그냥 ‘그런 게 있구나’ 정도의 감상만 느낄 뿐이었다.
물론 서호가 거울을 통해 이 세계에 오는 데에는 그 세 가지 중 무언가가 작용했겠지만 그래도 신기한 능력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물건을 띄우고 불을 피워내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들.
아무튼 서호는 두 눈으로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안겔은 일단 겉모습부터가 지구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 시선이 갔다.
‘로제타의 얼굴도 현실감이 없지만 금발에 푸른 눈은 나름 흔한 색이잖아?’
사실 거기까지였으면 안겔은 이렇게까지 서호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여기가 진짜 내가 살던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 정도의 감상이 전부였을 테고.
‘로제타의 신력도 봤으니까 그냥 그렇게 넘어갔겠지만.’
안겔이 보여준 마지막 그 표정이 서호를 불안하게 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은 거지?’
딱딱하게 굳다 못해 일그러졌던 얼굴.
표정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모습은 너무 적나라한 적의를 내뿜고 있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거울을 통해 로제타에게 운명의 상대를 찾아주려고 했던 것은 신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대표 격이 안겔이며 그녀가 거울에 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고도 들었다.
그런 안겔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신전 전체가 자신을 반기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너무 비약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와 같은 적나라한 적의는 서호로서는 처음 느껴 보는 어둡고 짙은 감정이었다.
‘내가 로제타의 옆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로제타의 열렬한 환영과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푸티의 반갑다는 시선을 받고 난 뒤라 그런지 누군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게 많이 신경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