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25화 (25/155)

#25

“순한 얼굴의 그분요?”

“그래.”

종이 울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푸티라는 시종은 빠르게 방에 도착했다. 서호가 푸티에게 눈인사를 건네자 푸티가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로제타의 부름에 그를 돌아봤다.

“푸티.”

“폐하.”

“서호의 준비를 도와라.”

“네, 폐하. 그럼 준비를 도와드리는 동안 폐하께서는 잠시 집무실로 가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푸티의 말에 서호가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집무실….”

집무실이란다. 아직 대학 생활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서호에게 집무실이라는 단어는 매우 멋있게 느껴졌다.

‘진짜 어른 같다.’

서호가 감탄하는데 그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로제타가 서호를 돌아봤다. 묘한 시선에 서호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로제타는 황제니까 일이 많겠네요. 집무실까지 있다니 멋있어요. 다녀와요. 여기 시종님이 있으니까요.”

서호의 말에 푸티가 깜짝 놀라 말했다.

“부디 편하게 푸티라고 불러주시고 말을 편안히 해주십시오.”

로제타의 눈치를 살피는 푸티를 알아차린 서호는 이곳이 그가 살던 곳과 다른 곳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래요, 푸티. 말은 조금 더 친해지면 놓을게요. 로제타? 얼른 가 봐요.”

그때 로제타가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이런 걸 좋아하는 건가?”

“네?”

서호가 되물었지만 로제타가 빠르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다녀오겠다. 금방 오지.”

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로제타가 사라지고 방 안에 시종과 둘만 남게 되자 서호는 어색함을 느꼈다. 당연하게 로제타를 보내긴 했는데 막상 시종과 단둘이 있게 되니 불편해졌다.

서호가 조심스럽게 푸티를 돌아봤다가 몸을 움찔 떨었다. 푸티가 매우 부담스러운 눈으로 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호님.”

서호를 바라보는 푸티의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그 시선에 서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서호라고 불러도 돼요.”

그러자 푸티가 절대 안 된다는 듯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어찌 감히. 저는 이것이 편합니다.”

순한 얼굴이 고집스럽게 변한 것을 확인한 서호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서호는 불편했지만, 푸티가 저게 편하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나라마다 각각 생활 양식이나 문화는 다른 법이니.

서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푸티가 서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그럼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네. 부탁합니다.”

씻는 걸 남이 도와주는 건 굉장히 부끄러운 과정이었다. 푸티에게 도움을 받아 준비를 마치며 서호는 앞으로는 적어도 씻는 것만큼은 푸티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 다짐했다.

***

안겔은 응접실에 앉아 로제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결국 로제타는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았지만, 안겔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소식을 전해준 푸티의 앞에서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안겔은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응접실에 앉아 로제타가 오기를 기다렸다. 약속 시각이 가까워질수록 안겔은 점점 더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워졌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운명의 상대는 무엇을 물어볼까? 로제타가 옆에 있는데 어떻게 해야 그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닐까?

‘아, 재밌을 것 같아.’

안겔은 손을 들어 찢어지듯 올라가는 입가를 가리며 계속 상상을 이어 나갔다. 언제나 태연하고 여유롭던 황제의 얼굴이 못나게 일그러지면, 그리고 그 얼굴을 직접 눈앞에서 보게 되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안겔이 한참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녀님.”

푸티의 목소리에 안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를 짓고 방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반겼다.

로제타와 푸티, 그리고 이곳 사람과는 약간 생김새가 다른 사내 하나가 차례로 들어섰다. 안겔은 먼저 로제타에게 인사했다.

“폐하.”

“신녀.”

로제타에게 인사를 마친 안겔이 곧장 사내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분이….”

안겔이 말을 흐리자 단정한 낯의 사내가 옅게 웃으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이서호예요. 서호라고 불러주세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담백하게 인사를 건넨 사내는 꽤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인사를 하며 눈을 맞춰오는 사내의 눈은 짙은 색임에도 불구하고 맑고 깨끗했다. 더군다나 로제타와는 달리 예의가 바른 것처럼 보였다.

‘제법….’

안겔이 서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서호님. 안겔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안겔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서호가 안겔의 말에 무어라 이야기를 하려는데 로제타가 둘 사이의 대화를 끊어내며 말했다.

“우선 앉지.”

안겔은 순순히 자리에 앉으면서 다시 서호에게 말을 걸었다.

“서호님, 우선 갑작스레 이곳으로 오게 되셔서 많이 당황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 궁금한 것이 있으신가요?”

안겔은 몰래 로제타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저 반반하고 여유로운 얼굴이 변할 만한 답이 들려오기를 기다리는데 서호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제가 지금 말이 통하잖아요. 이 현상이 계속 유지될까요? 아니면 따로 글자를 공부해야 하나요?”

안겔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네?”

“네?”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서호에 안겔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궁금한 게 그거라고?’

물론 소통과 관련된 부분도 중요하긴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이 세계로 끌려왔으면 울고불고 화를 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말이라니?’

멍하니 서호를 바라보던 안겔이 애써 표정을 정리하며 답했다.

“아, 말이요.”

“네, 아무래도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불편하니까 공부를 해둬야 하나 싶어서요.”

안겔이 기억을 더듬어 봤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언어와 관련된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 대단한 내용이 아니니까.’

안겔이 다시 눈앞에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사내가 반사적으로 눈을 휘며 웃어줬다.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카락과 주변 이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맑은 눈동자가 사내의 웃음과 굉장히 잘 어울렸다.

‘깨끗한 인상이야.’

소복이 쌓인 흰 눈 같은 맑은 느낌. 눈 밑에 귀엽게 올라오는 애교살을 눈에 담던 안겔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돌아봤다가 로제타와 눈이 마주쳤다.

답을 재촉하는 로제타에 사내를 향해 무럭무럭 자라나던 호감을 애써 죽인 안겔이 다시 서호를 돌아보며 답했다.

“언어와 관련된 내용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자 서호가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구나. 그럼 글자 공부를 해둬야겠네요.”

되묻거나 의심하는 기색 없이 아쉬움만을 표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에 있는지도 몰랐던 양심이 고개를 드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기분에 안겔이 애써 인상을 펴려 노력하는데 대화를 듣고 있던 로제타가 귀엽다는 듯 서호를 쳐다봤다.

“서호는 참 공부에 열정적이구나.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글이라니.”

바로 눈앞에서 로제타의 흐뭇한 얼굴을 보게 된 안겔이 입술 끝을 비틀다 재빨리 표정을 정돈하고는 서호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또 다른 궁금한 점은 없으신가요?”

안겔의 물음에 서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제가 오늘 만남을 갑작스럽게 전해 들어서요. 질문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어요. 제가 꼭 알아야 할 점이 있나요?”

서호는 안겔의 예상과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본래 세상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울고 매달릴 거라는 예상이 깨진 것도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이상하게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바른 사람처럼 보여서 그런가?’

태도나 말투, 뭐 하나 모난 곳 없었고 예의도 발랐다.

로제타처럼 화려한 미인은 아니지만 단정한 미인이었고 그 태도와 어울리는 온화한 인상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싫지 않다고 해서 두 사람의 평화를 빌어주기에는 안겔이 로제타를 너무 싫어했다.

‘생각보다 사이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서호에게서는 불안함이나 분노를 찾을 수 없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곳으로 넘어온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황제가 스스로에게 불리한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하지도 않았을 것 같고.

‘아니면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지.’

처음 자신에게 물은 것이 글자와 관련된 이야기이니만큼 거울과 관련된 이야기는 어느 정도 들은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안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럼 우선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안겔은 그가 이곳으로 끌려온 이유가 로제타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들으셨겠지만, 서호님은 거울을 통해 이곳으로 오셨죠. 그리고 서호님을 부르신 건 서호님과 붉은 실이 연결된 폐하이시고요.”

“네, 들었어요.”

안겔은 두 사람을 단단히 연결한 붉은 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에게 연결된 실이 점점 강해지면서 서로를 끌어당긴 거라고 보시면 돼요.”

질문이 있냐는 의미로 그를 바라보자 서호가 입을 열었다.

“그 붉은 실이 운명의 상대와 연결된다고 들었어요. 제가 있던 세계에도 붉은 실에 관한 이야기가 있긴 한데, 보통 그건 연인이 될 운명이라고 여겨요. 여기도 그런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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