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24화 (24/155)

#24

로제타가 다시 푸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풍이 도는 듯 부드럽고 따뜻하던 얼굴은 사라지고 다시 푸티가 아는 무심한 얼굴로 돌아온 로제타가 명령했다.

“내일 따로 보자고 전해.”

“네, 그럼 손님방을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푸티는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는 푸티의 발걸음이 아까와는 다르게 매우 가벼웠다.

황제가 멀쩡해진 것에 기뻐하는 거냐고?

‘물론 그것도 좋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신녀가 결국 바람을 맞았다는 사실이었다.

‘흥.’

푸티는 오늘 내내 여유가 뚝뚝 떨어지던 안겔의 얼굴이 일그러질 것을 기대하며 기쁘게 걸음을 옮겼다.

***

황제라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단어인가.

황제가 사라진, 아니, 왕이 사라진 나라에서 살던 서호는 유럽 귀족이라고만 해도 눈이 휘둥그레질 텐데 황제란다.

그제야 방이 왜 이렇게 넓은지, 왜 신전에서 로제타에게 거울을 선물해 줬는지도 이해됐다.

‘그게 다 황제라서야.’

서호는 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입을 다물고 있는 로제타를 힐끗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로제타가 반사적으로 눈을 휘며 웃었다.

그 빛나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 얼굴로 황제라니, 잘 어울리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나라의 얼굴이라니, 백성들도 참 으쓱하겠다 싶었다.

‘그래, 저 얼굴이면 황제를 하고도 남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합리화를 마친 서호가 여전히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로제타를 불렀다.

“로제타.”

“그래.”

서호의 불음에 로제타의 머리 위로 전구가 번쩍 켜진 것처럼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서호는 그 얼굴에 홀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물었다.

“황제라고요? 그러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로제타가 빠르게 답했다.

“맞아. 하지만 만약 그대가 싫다면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서호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네?”

“소박한 삶을 원한다면 내가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겠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것 같은 얼굴에 서호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사람이 왜 그렇게 극단적이에요?”

황제라는 자리가 내려오겠다고 말한다고 쉽게 내려올 수 있는 자리도 아니겠지만, 설령 내려온다 해도 그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황제라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나 때문에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온다면 그게 더 부담스러워.’

서호가 절대 안 된다는 의미를 담아 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말고, 그냥 설명을 해줘요.”

“어떤?”

“로제타에 대해서요. 여태까지도 계속 내 이야기만 했죠?”

생각해 보니 아까 그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 서호는 로제타의 얼굴에 홀려 자신의 이야기만 줄줄 늘어놨었다.

그러니 이제 로제타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였다. 서호가 감을 잡지 못한 것 같은 로제타를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부모님이 누구고,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말해 봐요.”

로제타가 감동받은 사람처럼 숨을 흡, 들이마시더니 기뻐하며 물었다.

“…내가 궁금한 건가?”

서호가 황당함을 숨기지 않고 답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로제타가 날 불러왔다면서요.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꾼 사람인데 당연히 궁금하죠.”

“아.”

서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걸까. 로제타의 눈가가 촉촉해지고 얼굴이 붉어졌다.

‘또 울어? 황제가 이렇게 울보여도 괜찮아?’

서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제타를 불렀다.

“로제타?”

다행히 로제타는 울지 않았다. 몇 번 숨을 고르던 로제타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부모님 이야기를 먼저 하지.”

“네, 해봐요.”

“우선 내 어머니 신시는….”

서호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로제타가 이야기하는 삶을 들었다. 큰 기복 없이 전해지는, 듣기 좋을 만큼 낮은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

서호는 눈을 번쩍 떴다. 로제타의 이야기를 듣다가 스스로도 언제 잠든 건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눈을 한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방 안에 햇빛이 가득했다. 서호는 멀뚱멀뚱 눈을 깜빡거리다가 새삼 감탄했다.

“와.”

이렇게 편안하고, 깊게 잠을 잔 게 얼마 만인지.

눈을 떠도 부족한 수면 때문에 쉽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그렇다고 또 잠이 들면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제대로 잠들지도 못하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숙면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몸도 가뿐하고 기분도 좋았으며 머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서호가 기지개를 켜며 부드러운 이불에 몸을 비볐다.

그때 누군가 서호를 불렀다.

“서호?”

로제타의 목소리였다. 서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네.”

지금이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보아하니 늦잠을 잔 게 분명했다. 서호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온 로제타가 부드럽게 웃으며 서호의 머리를 매만졌다.

“잘 잤나?”

“네, 잘 잤어요.”

로제타가 서호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여태까지 피로가 너무 많이 쌓였던 것 같다. 미안하다.”

서호는 머리에서 자연스레 그의 귓가로 내려오는 로제타의 손을 붙잡아 내리며 단호하게 답했다.

“그건 사과해야겠네요.”

잠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고 나니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로제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안했어.”

로제타의 사과를 받은 서호는 윤이 나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잘 잤고요?”

얼굴을 보아하니 아주 잘 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서호는 받은 인사를 돌려줬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었기에 조금 어색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서호의 물음에 로제타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그가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렸다.

“나는 잘 잤어.”

“다행이네요.”

부드럽게 미소 짓던 로제타가 이내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서호, 준비가 끝나는 대로 신녀를 만날까 하는데. 물론 그대가 만나고 싶지 않다면 만나지 않아도 좋아.”

“만나야 하니까 말을 꺼낸 거 아니에요?”

서호의 물음에 로제타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냥, 그대의 몸이 괜찮은지 확인을 받을까 싶어서.”

“그럼 만날게요. 어려운 자리는 아니죠?”

“그래, 편한 자리다.”

신녀, 들어 본 적 있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잠결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은발의 여자.

“신녀라면 거울을 선물해준 분이죠?”

“그래, 신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지.”

서호가 의심을 숨기려 애쓰며 어렵사리 물었다.

“그러니까 진짜 신의 말을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요?”

“응?”

“아니, 저희 세계에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요.”

“진짜 신의 말이다.”

“와, 그럼 엄청 대단한 사람이네요.”

정말 다른 세상이라는 게 실감 났다. 이곳은 마법만이 아니라 신을 모시는 이들이 사용하는 성력이라는 것도 있다고 들었다.

신이 있다는 증거가 좀 더 눈에 잘 보이는 곳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신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라니, 매우 신비롭고 대단하게 들렸다.

서호가 눈을 빛내자 로제타가 서호의 손을 붙잡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다.”

서호는 멀뚱멀뚱 로제타를 바라보다가 이내 납득했다.

‘그러고 보니 왕이나 황제는 보통 신의 아들이라고 불리거나, 신화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법이지?’

자신이 살던 세계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분명히 그랬다. 아마 로제타도 그런 의미로 말을 꺼낸 것 같았다.

“그렇구나. 대단해요. 로제타.”

아까보다 덤덤한 반응에 로제타가 다시 한번 말했다.

“내가 더 대단하다.”

서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아빠가 더 대단하다고 외치는 다섯 살짜리 유치원생 같았다.

로제타는 생각보다 귀여운 편이었다.

“그럼요. 알아요. 그래서 욕실은 어디에요? 준비해야 한다면서요.”

꼭 신녀를 만나는 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로제타가 너무 멀끔한 얼굴로 서 있어서 슬슬 자신의 몰골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방금 일어났잖아. 분명 엉망일 거야.’

서호가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거리는데 로제타가 말했다.

“시종을 불러주겠다.”

“시종요?”

“그래.”

시종이라니, 정말 황제는 황제구나 싶었다.

“진짜 시종?”

로제타가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서호를 바라봤다. 그런 로제타의 반응에 서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정정했다.

“아니, 아니에요. 근데 굳이 시종이 없어도 되는데요. 혼자 씻을 수 있어요.”

“물론 나도 알고 있어. 그대는 혼자서도 잘 씻지.”

서호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떻게 알아…. 내가 씻는 것도 봤어요?”

조금 날카로운 서호의 말투에 로제타가 바로 사과했다.

“미안하다.”

잠을 못 자게 했던 행위에 대한 사과를 받았듯이 씻는 걸 지켜본 행위 역시 사과를 받아 마땅했다.

“네, 그건 미안해해요. 아무튼 혼자 씻을 수 있는 걸 알면서 왜 시종을 불러요?”

로제타가 서호의 기분을 살피다가 답했다.

“그대는 뭐가 어디 있는지 모를 테고, 그곳과 이곳에서 다르게 사용되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건 그렇네요.”

서호가 딱히 더 화를 내지 않자 로제타가 종을 울렸다.

“전날 봤던 그 시종이 올 거다.”

서호는 로제타가 황제임을 알려줬던 착한 인상의 사내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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