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23화 (23/155)

#23

‘그러니까 저 거울이 집에 있는 나를 보여줬다고?’

고풍스럽게 장식된 커다란 거울은 사물을 비추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꽤 평범했다.

‘로제타는 거울이 자기는 비춘다고 했지만, 나는 안 보이는걸.’

참 신기한 세상이었다. 게임이나 영화에서나 봤던 마법과 신이 존재하는 곳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고 우기기에는 서호가 이 세계로 왔다는 것부터가 그 존재를 증명하는 꼴이었기에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서호는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로제타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 세상에 마법과 신이 존재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런 얼굴이 현실에 있었다면 벌써 시끄러워졌겠지.’

솔직히 저 얼굴이 있는 세상이니 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서호가 이 세계가 그가 살던 세계와 다른 곳이고 자신은 본 적도 없는 힘이 있다는 걸 받아들였다고 해서 궁금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서호는 자신이 생각을 정리하는 걸 기다려 주던 로제타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이런 거울을 얻게 된 거죠?”

“신전에서 내게 거울을 선물했다. 내 운명의 상대가 이 세계에 없어 평생 외로울 거라고 하더군.”

신전에서 선물을 줄 정도라니 로제타는 생각보다 더 부자인 것 같았다.

“로제타를 위해서 준 선물인 거네요?”

로제타가 어딘지 모르게 냉소적인 얼굴로 답했다.

“글쎄.”

그 태도에서 뭔가 다른 이유가 있나 보다 싶었으나 서호는 더 묻지 않았다. 아직 그런 깊은 내용을 물어볼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서호가 이제 무얼 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로제타가 입을 열었다.

“나보다는 그대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서호는 로제타가 굳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지난 몇 달간 자신을 지켜봤었으니까.

“나를 봤다고 했잖아요.”

누군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는 것이 소름 끼칠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저 얼굴 때문이겠지?’

얼굴에 홀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어이가 없었다. 서호가 헛웃음을 흘리는데 로제타가 답했다.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말이 통하지도 않았고. 그곳은 너무 다른 세상이라 그대의 집을 보는 것만으로는 그대를 전부 파악하지 못했어. 미안하다.”

이곳과 말이 다르다는 것 역시 이미 인지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서호는 그 부분에 대해서도 몇 개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하지만 로제타가 다시 눈물을 글썽이기에 우선은 그를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왜 미안해요? 그러니까 저는…. 이름은 이서호고 나이는 스무 살이에요.”

이다음에는 무얼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로제타가 물었다.

“스물이 넘었나?”

로제타는 매우 놀란 것 같았다.

‘도대체 몇 살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로제타가 작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다행이군.”

“네?”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었으나 로제타가 서호를 재촉했다.

“나는 스물네 살이다. 그래서? 계속해 봐.”

흥미가 가득 담긴 그 눈에 서호는 결국 그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는 원래 학생인데….”

뭔가 로제타에게 완전히 말려드는 느낌이었지만 그게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 이상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머리가 아플 것도 같았고, 눈을 반짝이는 로제타의 반응도 마음에 들었다.

‘나 혹시 답 없는 얼빠인 건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연스레 아름다운 것에 더 끌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제 와 깨달은 사실이지만 자신은 답이 없는 얼빠였다.

***

푸티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가 다른 이들을 데리고 방을 나온 뒤로 꽤 시간이 흘렀다.

‘이쯤이면 잠시 찾아가서 살펴봐도 괜찮겠지.’

로제타가 사내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자리를 비웠지만 그래도 자신은 직속 시종으로, 황제의 방 앞을 지키는 것이 일이었다.

또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손님인 안겔이 이곳에 있으니 로제타에게 언제 안겔을 만나러 올 것인지 확인을 받아야 하기도 했다. 푸티는 응접실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안겔을 바라봤다.

‘정말 이상하지.’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안겔은 평소와 달리 내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였다.

‘진짜 웃음이야.’

푸티는 못마땅한 눈으로 안겔을 바라보다가 마법사 아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얼떨결에 안겔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온 아리스는 태연하게 안겔과 대화를 나누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가 재밌어 죽겠다는 듯 푸티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쳤다.

‘능청스럽기도 하지.’

더군다나 그는 아까부터 푸티와 안겔을 관찰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푸티와 안겔의 사이가 어떤지 살피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푸티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저렇게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푸티를 놀리고 있는 것이다.

푸티가 그를 외면하며 안겔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안겔님.”

“네.”

안겔이 부드러운 얼굴로 푸티를 돌아보자 푸티는 그에 지지 않는 웃음을 얼굴에 달고 말했다.

“잠시 폐하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안겔이 시간을 확인했다.

“아, 그래요. 시간이 꽤 흘렀네요.”

역시 평소와 달랐다. 로제타가 약속 시각에 조금만 늦어도 그렇게 푸티를 닦달하더니 오늘은 응접실로 물러난 지 1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얌전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안겔은 더 기뻐하는 눈치였다.

‘뭐야, 진짜.’

푸티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안겔을 바라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 전 자연스레 고개를 숙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거든, 종을 울려주시면 다른 시종이 들어올 겁니다.”

“알았어요.”

그대로 뒤로 물러나려던 푸티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아리스를 발견하고 삐딱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기 마법사 아리스가 잠시나마 말벗을 해드릴 겁니다.”

살짝 엉덩이를 들었던 아리스가 어색하게 다시 의자에 앉아 안겔을 바라보자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럼.”

아리스가 자신을 이곳에 두고 가지 말라는 듯 푸티를 애절한 눈으로 바라봤으나 푸티는 가볍게 그를 무시하고 방을 나섰다.

응접실을 나서 로제타의 방으로 향하는 내내 푸티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수많은 사람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언가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푸티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푸티는 그런 이들도 전부 무시한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미 소문이 퍼졌겠지만….’

안겔과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사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됐다. 로제타에게 허락을 받기 전까지는 이 이상 무엇도 알려줄 수 없었다.

그렇게 빠르게 발을 놀려 로제타의 방에 도착한 푸티는 텅 비어 있는 방 주변을 살피고 문을 두드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안에서 로제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 푸티는 로제타와 사내에게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폐하.”

푸티가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하려 하는데 로제타의 뒤에 있던 사내가 멍하니 되물었다.

“…폐하?”

그 반응에 푸티는 로제타가 사내에게 아직 스스로의 위치를 알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로제타는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사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응? 문제가 있나?”

사내가 기겁한 얼굴을 하고는 로제타에게 물었다.

“내가 아는 그 ‘폐하’요?”

경악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푸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살폈다. 로제타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사내에게 물었다.

“서호, 왜 그러지?”

푸티는 사내의 이름이 서호라는 걸 알게 됐다.

‘서호? 이름이 특이하네.’

하긴 아예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니 이름을 짓는 방식이 달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푸티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로제타와 사내의 대화는 계속됐다.

“로제타, 혹시나 해서 묻는데 로제타의 직업은 뭐죠?”

“직업?”

로제타가 쉽게 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사내가 고개를 돌려 푸티를 향해 물었다.

“저기, 혹시 로제타가 황제나 왕, 그런 건가요?”

“아.”

갑작스러운 사내의 질문에 푸티가 놀라 로제타를 바라봤다. 그러자 로제타가 답을 해도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의 허락이 떨어지자 푸티가 입을 열었다.

“네, 그러합니다. 정확히는 보레알리스 제국의 황제 폐하이십니다.”

“정말 황제라고요? 황제?”

사내는 로제타가 황제라는 것이 굉장히 충격이었는지 계속 똑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푸티마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로제타가 불안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사내를 불렀다.

“서호?”

그러자 사내가 손을 들어 올려 로제타의 입을 막더니 단호하게 답했다.

“잠시만요. 잠깐만 정리 좀 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입을 꾹 다물고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아까 사내의 말처럼 생각을 정리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는 사이 로제타가 푸티에게 불쑥 다가와 물었다.

“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로제타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푸티가 재빨리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답했다.

“신녀님을 언제까지 저렇게 두어야 하는지 여쭙기 위해 왔습니다. 아예 방을 내어드리고 내일 만나자고 말씀을 전할까요?”

“…잠깐 기다려.”

로제타가 사내를 불렀다.

“서호?”

“네?”

“혹 어디 불편한 곳이 있나? 몸이 아프다든가, 평소와 달리 몸이 무겁다든가?”

로제타의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오랜만에 푹 자서 그런지 몸은 오히려 가뿐한데요?”

“그렇군.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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