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22화 (22/155)

#22

‘신이 같은 걸까?’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서호가 붉은 실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붉은 실에 대해 안다면 운명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쉬울 테고 조금 더 쉽게 자신에게 마음을 열 수도 있었다.

“그래? 그쪽 세계에도 붉은 실이 있구나.”

“그쪽 세계…. 역시 여기 내가 살던 곳과 완전히 다른 곳이죠?”

“맞아.”

로제타는 기민하게 서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파악해야 했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거겠죠?”

질문하며 거울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는 서호의 얼굴에 얼핏 어두운 기색이 비쳤다. 하지만 그래도 생각 외로 그렇게까지 절망하고 슬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혹시 몰라. 그때처럼 속으로는 슬퍼하고 있을 수도 있고.’

로제타가 그의 얼굴을 살피다가 조금 늦게 답을 했다.

“…그래.”

로제타의 답에 서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용한 무당이구나.”

매우 작은 소리였지만 로제타의 청력은 일반인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좋았기에 서호의 말을 알아들었다.

‘무당?’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한 로제타는 조금 초조해졌다. 생각보다 반응이 유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얼핏 보인 어두운 기색에 불안해졌다.

로제타는 서호를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고 그를 불렀다.

“서호.”

“네?”

로제타는 서호가 묻기 전에 먼저 그가 할 것 같은 말을 입에 담았다.

“혹시 그대, 돌아가고 싶은 건가?”

서호가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갈 수 없다고 했잖아요.”

물론 그랬다. 로제타는 거울을 통해 이곳으로 온 상대가 다시 그들의 세계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안겔은 거울이 매우 오래된 물건이기 때문에 알려진 바가 적다고 했다. 그러니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로제타가 서호의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대가 돌아가고 싶어 한다면….”

로제타에게 손이 붙들린 서호가 로제타를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물었다.

“왜, 왜 울어요?”

로제타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직 울지 않았다.”

실제로 로제타는 아직 울지 않았다. 그냥 눈에 눈물이 조금 고였을 뿐이었다. 서호가 황당하다는 듯 엷게 웃으며 로제타의 눈을 가리켰다.

“곧 울 거잖아요.”

로제타가 눈에 힘을 줬다.

“울지 않겠어.”

서호가 웃음을 흘리며 로제타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왜 그래요?”

로제타는 그의 눈가를 닦아주는 서호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만약 돌아갈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대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면 나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도 좋고.”

서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제타를 바라봤다.

“네?”

로제타가 다시 한번 말했다.

“나는 그대가 나와 함께 있으면 좋겠다.”

서호가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로제타가 그쪽으로 가면 되는 일이었다. 로제타는 이 황홀한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았다.

“만약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면 내가 그대와 함께 가고 싶어.”

만난 지 고작 몇 시간도 되지 않은 이가 그와 함께하고 싶다고 매달리는 게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로제타는 서호의 착한 성격과 자신의 겉모습을 이용하기로 했다.

로제타는 스스로의 얼굴에 별생각이 없었지만, 주변에서 하도 난리를 친 덕에 자신의 얼굴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매우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제타는 그가 어머니 신시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지었던 표정을 지으며 서호에게 물었다.

“그래도 되나?”

서호가 볼을 붉게 물들이며 당황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답했다.

“어…, 그러니까 로제타도 이곳에 가족이 있고 집이 있고 그렇잖아요?”

로제타가 답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와는 친밀한 사이가 아니며 형제들과도 데면데면하지.”

로제타의 답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서호가 머뭇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래도 다른 인연도 있고….”

로제타는 서호가 그를 두고 가겠다고 할까 봐 빠르게 답했다.

“나는 친구가 있었던 적이 없고 연인이 있었던 적도 없어.”

로제타는 서호에게 조르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 그대를 따라가고 싶어.”

혹여 그가 자신을 데려갈 생각이 없다고 할까 봐 애가 닳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차오르던 눈물이 기어이 눈가에 넘쳐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자 멍하니 로제타의 이야기를 듣던 서호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결국 우네요.”

로제타가 작게 헐떡이며 답했다.

“미안하다.”

“미안할 것까지는 없고요. 뭐, 나랑 비슷한 점도 있긴 하네요.”

“비슷한 점?”

로제타는 흘러가듯 나온 서호의 이야기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자 서호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친구는 좀 있었는데 요즘에는 많이 소원했거든요. 연인도 있었던 적이 없고요.”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줄줄 흘러나오던 눈물이 뚝 멈췄다.

로제타는 입꼬리를 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부모님이 없고 친구도 별로 없다. 연인도 없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계가 서호에게는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 말은 곧 서호에게는 무조건 저쪽 세계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소리였고.

더군다나….

‘연인이 없어.’

서호는 로제타가 그랬던 것처럼 연인이 없었다.

그 누구도 서호를 가진 적이 없었고, 서호의 마음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몸이 달아올랐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크게 몰아쉬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눈물을 닦아주던 서호가 다정하게 로제타를 다독이며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생겼는데 왜 연인이 없었어요?”

로제타는 탐욕스레 고개를 드는 욕심을 숨기며 순한 척 답했다.

“관심이 없었어.”

그 뒤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으나 로제타는 모든 걸 나중으로 미뤘다. 이 커다란 감정을 지금 내보이면 서호는 부담스러워 도망갈지도 몰랐다. 담백한 답에 서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로제타는 다시 생각에 잠기려고 하는 서호에게 되물었다.

“서호는?”

한번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더 커졌다.

“왜 연인이 없었지?”

“딱히 연애하고 싶지도 않았고, 공부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해서요.”

서호의 답에 로제타가 빙그레 웃으며 그가 붙잡고 있던 서호의 손을 내려다봤다. 중지에 잡힌 굳은살.

역시 짐작했던 대로 공부를 하던 사람이었다. 로제타가 예쁜 손에 조그맣게 튀어나온 굳은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 그대의 손을 보고 느꼈다. 그대의 손은 공부를 많이 한 손이지.”

“열심히 하긴 했었죠.”

서호는 손을 조금 움찔거리기는 했으나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로제타는 서호가 별 반응이 없자 조금 더 욕심을 내 계속해서 서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대에 대해 알고 싶다. 그리고 그대와 친밀해지고 싶어. 그대가 나와 함께했으면 좋겠어.”

로제타는 서호를 쳐다보지 못하고 그의 손만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서호와 눈이 마주치면 그가 로제타의 마음을 전부 알아차리고 겁을 먹을까 걱정됐다.

“아직 매우 당황스럽고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도 안다. 서두르지 않겠다.”

“네.”

“그러니까 만약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나도 데리고 가라.”

쏙 들어갔던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이번에는 일부러 흘리는 눈물이었다. 로제타는 서호와의 길지 않은 대화로 그가 눈물에 약하다는 걸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로제타가 애처롭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호에게 부탁했다.

“나는 그대와 함께 있고 싶어.”

***

사내가 또다시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름다운 얼굴에 퍼지는 눈물은 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음이 아릴 정도로 처연해 보였다. 서호가 안절부절못하며 로제타의 눈물을 닦아줬다.

“울지 말라니까…, 그래요. 알았어요. 하지만 나랑 같이 가게 되면 이렇게 좋은 곳에서는 못살아요.”

서호는 지금 그가 있는 방을 둘러봤다. 사실 방금까지 들은 이야기 중 무엇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운명이라니.’

운명이라는 칭하는 것에는 여러 상황과 관계가 있겠지만 그 추상적인 개념을 직접적으로 이어주는 붉은 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이가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다. 그리고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올 때 사용했다는 거울이 사람을 전혀 비추지 않는 것도.

하지만 그 두 가지보다 더 놀라운 것이 바로 이 방이었다.

‘앞의 두 가지는 뭐랄까, 현실감이 없지만….’

하지만 이 방은 달랐다. 자신의 집보다도 훨씬 큰 방. 몸에 부드럽게 감기는 이불과 푹신한 침대, 방을 채우는 가구들은 딱 봐도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러니까 자신의 운명이라고 주장하는 로제타는 엄청난 부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서호는 엄청난 부자인 로제타가 자신의 세계로 따라온다면 지금 그가 누리는 이런 부를 유지해 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서호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무리 운명의 상대라지만 급격히 빈곤해지는 건 싫지 않을까?’

서호의 말에 로제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답했다.

“그대가 어디에 사는지는 나도 알아. 그대만 있으면 된다.”

서호는 로제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아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맞다.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죠?”

“그래.”

그러니까 로제타는 반년 동안 거울을 통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서호는 다시 한번 거울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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