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눈을 뜨자 가물가물한 시야에 몇 명의 사람들이 잡혔다. 서호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여자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사내 둘. 그리고 흐린 시야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금발의 아름다운 사내.
그제야 서호는 대충이나마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꿈이 아니었어.’
서호는 기이했던 벽면의 눈과 울음소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내민 손을 잡고 이상한 곳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잠이 들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이상한 일의 연속, 그리고 그 이상한 일을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버린 자신.
도대체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들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서호가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하는 사이 어느새 금발의 사내만을 남겨두고 모든 이들이 자리를 비웠다.
금발의 사내가 조심스럽게 서호를 불렀다.
“그대.”
서호는 점점 선명해지는 시야로 사내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우선 그의 짐작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당신이 매일 울던 그 사람인가요?”
놀란 듯 살짝 커진 눈으로 서호를 바라보던 사내가 이내 머뭇거리며 답했다.
“…맞다.”
서호는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그의 얼굴에선 이제 울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그 점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왜 운 건지 물어도 되나요?”
어째서 그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그렇게 울었을까. 항상 궁금하던 것이었다.
서호의 물음에 사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서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보고 싶어서, 그대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서, 마주 보고 싶어서, 목소리를 들어 보고 싶어서, 그대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어서…. 모든 것이 그저 내 욕심 때문이다.”
한참 말을 고르는 것처럼 천천히 이야기하던 사내는 말을 끝낸 뒤, 서호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답답함이 밀려온 서호가 손을 뻗어 사내의 팔목을 움켜쥐어 그와 눈을 맞춘 뒤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원하는 대로 됐나요?”
호수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이 서호를 멍하니 바라보다 곱게 휘었다. 사내가 볼을 붉게 물들였다.
“…아직 남은 것이 몇 가지 있네.”
그 붉어진 볼을 홀린 듯 바라보던 서호가 사내에게 제일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래요. 하지만 이제 울지 않을 거죠?”
사내가 한참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장담할 수 없어.”
너무나 솔직한 답에 웃음이 나왔다.
“생긴 것과 다르게 울보네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서호를 따라 엷게 웃던 사내가 물었다.
“그대는 궁금한 것이 없나?”
물론 서호도 궁금한 것이 있긴 했다. 아주 많이.
하지만 그보다 우선 고쳐야 할 부분이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줄곧 서호를 소름 끼치게 하던 호칭.
서호가 스스로를 소개했다.
“서호예요.”
“뭐?”
“이서호. 당신 이름은요?”
사내가 다시 한번 입을 꾹 다물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사내에 서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왜요? 매일 당신 우는 소리를 들어줬는데 이름은 알려줄 생각이 없어요?”
사내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서호의 손을 붙잡아왔다. 그가 덜덜 떨리는 입술처럼 잔뜩 흔들리는 목소리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나는, 로제타 오로라 보레알리스.”
이름이 굉장히 길었다. 아까 그 은발의 여자를 보고 느낀 거지만 역시 이곳은 서호의 세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그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이 한국어가 아니라는 건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서호가 사내의 이름을 몇 번 중얼거리다 물었다.
“엄청나게 이름이 기네요. 사람은 맞죠? 내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로제타, 아니면 오로라. 그리고 인간이 맞다.”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라서 혹시나 던진 질문에 다행히 인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로제타라고 부를게요. 서호라고 불러요.”
“그래, 서호.”
사내가 꽃이 피어나듯 아름답게 웃어 보였다. 정말 행복하다는 듯 양 볼을 붉게 물들이고 눈을 접어 웃어 보이는 사내에 또다시 정신이 멍해질 뻔했지만 서호는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붙들었다.
아직 물어봐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럼 이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내게 이야기해 줄래요?”
이제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었다.
***
로제타는 눈앞에 있는 이의 모든 것을 눈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서호….’
서호가 자신이 해준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로제타는 입안에서 작게 그의 이름을 굴려 보았다.
혀에 감기는 이름이 너무 달았다.
‘이서호.’
어떻게 서호는 이름마저 이리도 아름다운 걸까?
하긴 그는 목소리도 아름다운 이였다. 로제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서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로제타.’
어머니 외에는 부르는 이가 없었던 이름이었기 때문일까? 조금 어색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그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자신이라는 존재가 명확해지는 묘한 감각.
‘그리고 서호가 가지는 존재감도….’
직접 그를 품에 안았음에도 이상하게 허상의 존재인 것 같았다. 닿아 있음에도 닿아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서 그것만으로 만족했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모든 것이 변했다.
‘진짜 내 곁에 있어. 같은 공간에.’
잔잔한 울림이 귓가에 닿자 거울을 통해 그를 지켜보고 그를 직접 품에 안았을 때 느꼈던 것보다 큰 어떤 것이 로제타를 감쌌다. 정확히 이 감정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상황이 그를 들뜨게 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간질거리는 이건….’
그래, 그때의 그 느낌이었다. 서호의 눈물이 아닌 웃음을 봤을 때 느꼈던 그것. 몸에서 시끄러운 박동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로제타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순간 또다시 사랑을 느낀 것이다.
안 그래도 여태껏 느껴 본 적 없던 감정을 느끼게 해주던 이였는데 고작 한 번의 대화로 그 전보다 더 특별해지다니, 이런 것이 가능한 걸까?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이라면 앞으로 얼마나 더 그를 향한 감정이 커질까?
‘탐이 나.’
지금 느끼는 감정보다 더 커다란 행복을, 설렘을 느낄 수 있다면 어떨까? 고작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불러준 정도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졌는데 만약 서호가 같은 감정을 돌려주면?
입안에 침이 고였다. 단순히 옆에 두는 것만으로, 서호를 이곳에 데려오는 것에 만족했던 것이 우스웠다. 더, 더… 이것보다 더 큰 것이 가지고 싶었다.
서호를 이 손안에 가득 채우고 싶었다. 로제타는 홀린 듯 서호를 바라보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저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진 눈가에 손을 댔다.
주름을 손으로 매만지는데 서호가 살짝 놀라 자신을 바라보더니 미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앞에 두고 너무 말이 없었죠? 그런데 내가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거든요. 혹 너무 바쁘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서호는 로제타의 편의를 봐주려고 하고 있었다. 너무 착한 것 같아 걱정이 됐다.
로제타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갑작스러운 상황이니 생각이 많을 테지. 기다릴 테니 마저 생각해.”
“음, 바쁘지 않아요?”
자신을 기다리는 보좌관들과 수많은 문서를 떠올리지도 않은 로제타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서호가 힐끗 로제타를 살피다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저렇게 아름답고 절로 눈이 가는데, 성격까지 좋다니. 위험하군.’
사람들이 보는 족족 서호에게 빠져버릴지도 몰랐다.
로제타는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피부를 슬쩍 훔쳐봤다. 짙은 색의 머리카락은 이곳에서도 종종 보이는 것이었으나 이런 색의 피부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눈이 갔다.
‘물론 서호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예쁘지만.’
서호를 살피던 로제타가 자연스레 그의 볼로 손을 가져갔다. 흘끗 그를 돌아보긴 했으나 서호는 딱히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던 조심스러운 손길은 점점 더 과감해졌다. 서호가 잠이 들었을 때 계속 만졌던 탓인지 절로 손이 갔다. 손끝, 손가락 마디마디, 그리고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서호의 얼굴을 감싼 로제타는 아쉬움을 느꼈다.
‘얼굴이 너무 작아.’
서호의 얼굴은 너무 작아 로제타의 한 손이 그의 얼굴 반쪽을 덮고도 남았다. 얼굴이 저기 있는 베개만큼 커다랬다면 이 부드러운 피부에 푹 파묻혀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손에 착착 감기는 부드러운 밀빛 피부를 느끼던 로제타는 손끝으로 그의 턱선을 매만졌다. 조금 더 욕심을 내 손을 움직여 부드러운 턱선을 따라 말랑거리는 귓불에 손끝이 닿았을 때쯤, 서호가 불쑥 그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로제타는 아쉬워하지 않고 서호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로제타가 서호와 눈을 맞추자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손이 심심해요?”
“…조금.”
로제타가 서호의 부드러운 손을 만지작거리며 답하자 서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나랑 당신이 붉은 실로 연결된 운명의 상대라는 소리죠?”
로제타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붉은 실이라는 건 나도 들어 본 적이 있긴 해요. 사실 얼마 전에도 얼핏 들었던 것 같고….”
그건 좀 놀라운 일이었다. 세계가 다른데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