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운명의 상대라고 하시잖아요.”
“운명의 상대면 다 저렇게 되는 걸까?”
“저야 모르죠. 그래도 폐하께서 행복해하시니 됐어요.”
정확히는 이제 미친 사람처럼 굴지 않으실 테니 그걸로 만족했다.
실체가 없던 존재에 집착하는 건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실체가 있는 존재에게 집착하는 것은 사랑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제 안겔과의 헛소문도 종식되겠지!’
여러모로 푸티는 크게 안도한 상태였다. 그런 푸티의 얼굴을 보며 아리스가 감탄했다.
“역시 정말 폐하를 좋아하는구나.”
푸티가 아리스를 힐끗 쳐다봤다가 대충 답했다.
“뭐, 그렇다고 치죠.”
그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드디어 마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리스가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왔네.”
푸티가 바짝 긴장했던 몸에 힘을 풀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빨리 왔네요.”
나름대로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리스가 곧장 물어왔다.
“신녀님이랑 사이가 안 좋아?”
푸티가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며 별것 아닌 것처럼 답했다.
“제 옆에 있으면 폐하의 비밀을 많이 알게 되니까 옆에 계시지 말라니까요?”
그러자 아리스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신녀님을 싫어하는구나?”
푸티는 눈에 힘을 주고 아리스를 노려봤다. 알아차릴 눈치는 있어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눈치는 없는 모양이었다.
푸티의 반응에 아리스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알았어. 입 다물게.”
그사이 마차가 황제궁 바로 앞에 멈춰 섰다. 푸티는 아리스를 노려보던 시선을 돌리며 마차에서 내리는 안겔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겔님.”
“푸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푸티의 인사에 안겔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부르시는데 당연히 일정을 조절해야죠.”
저번의 말싸움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참 좀생이가 따로 없었다. 푸티가 속으로 혀를 차며 여전히 예의 바른 가죽을 뒤집어쓰고 길을 안내했다.
“이리로 와주세요.”
안겔이 푸티와 아리스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가 물었다.
“…응접실로 가지 않는 건가요?”
“네, 폐하의 개인 침실로 갑니다.”
“개인 침실요?”
안겔의 놀란 얼굴에 푸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와 그분께서 안에 계시고 저와 마법사 아리스님도 함께 있을 테니까요.”
푸티는 일부러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사용인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적당히 소리를 높여 답했다.
‘어서 소문을 퍼트려.’
푸티가 빠르게 멀어지는 사용인들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낸 뒤 안겔을 돌아보며 느려터진 그녀를 재촉했다.
“그럼, 죄송하지만 조금 서두르겠습니다. 폐하께서 그분을 너무 아끼셔서요.”
사용인들이 충분히 이 대화를 들었을 테니 이제 이렇게 천천히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동시에 푸티는 한 번 더 로제타에게 안겔이 아닌 다른 상대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안겔은 평소보다 얌전한 푸티를 따라 황제의 개인 침실로 향했다. 다급해 보이는 그 모습에 콱 막혔던 속이 날아갈 것 같은 개운함을 느껴졌다.
푸티가 저렇게 얌전한 이유가,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내게 얻어내야 할 것이 있다는 거지.’
속이 훤히 보이는 푸티의 행동 덕에 콧노래가 나올 것 같았다. 물론 옆에 있는 마법사 때문에 그 기쁨을 티 낼 수는 없었지만.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푸티는 안겔의 도착을 알리지도 않고 그녀를 데리고 로제타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안겔은 기꺼운 마음으로 푸티를 따라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황제의 침실을 대충 훑어보던 안겔은 방 한쪽 구석에 자리한 커다란 거울을 쳐다봤다가 로제타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침대에 가까워질수록 황제에게 가려져 있던 상대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밀빛 피부에 단정하게 잘린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준수하게 생긴 얼굴. 안겔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사내의 모습을 살피려는데 로제타가 사내를 가리듯 자리에서 일어나 안겔을 바라봤다.
“왔나. 신녀.”
안겔은 괜히 사내를 더 보려고 애쓰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폐하.”
로제타는 긴말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대를 부른 것은 그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네.”
아래로 숙여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안겔의 입가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안겔이 표정을 정리한 뒤, 고개를 들고 로제타에게 되물었다.
“도움이요?”
로제타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이 일에 관해서는 가장 지식이 많을 테니 그대를 불렀네. 이자에게 이곳의 힘을 사용해도 괜찮은 건가?”
안겔은 잠들어 있는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니까 지금 로제타는 사내가 다칠까 봐, 혹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였다.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군.’
로제타가 이렇게 사내를 아끼다니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운명을 아끼고 좋아하면 할수록 상처는 더 크게 돌아올 테니까.
“지금 몸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로제타의 말에 안겔은 그녀의 기억에만 남아 있는 두 번째 책을 떠올리며 답했다.
“제가 미처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이 거울은 신의 선물이지 않습니까? 몸에 무리가 아예 가지 않는다고는 하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을 거예요. 심하면 몸살이 나는 정도에서 끝나겠죠.”
딱딱하게 굳어 있던 로제타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말이 통하던데.”
그것 역시 적혀 있던 부분이었다.
“네, 거울을 통해 넘어왔고 폐하와 연결되어 있으니 이제 말이 통할 겁니다. 다만 여태까지 처럼 감정이 공유되지는 않을 겁니다.”
“또?”
안겔은 황제가 지금 당장 궁금해할 것들을 줄줄 이야기해 나갔다.
“이쪽의 힘을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이분께서 깨어나신 다음에는요. 지금 이렇게 주무시는 것도 이쪽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이군.”
안겔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내를 내려다보는 로제타에게 물었다.
“그래서 제대로 대화는 해보셨나요?”
“금방 잠이 들었다.”
“이름은 들으셨고요?”
“아니.”
첫 만남이 그리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저 사내는 갑작스럽게 이쪽으로 끌려온 것일 테니.
안겔은 덤덤한 척 답했다.
“그렇군요.”
“얼마나 잠들어 있지?”
“글쎄요. 적응이 끝날 때까지는 잠들어 있을 겁니다. 그리 길지 않을 거예요. 잠드신 지 얼마나 되셨죠?”
그러자 얌전히 뒤로 물러나 있던 푸티가 대신 답했다.
“아직 반나절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안겔이 고개를 끄덕이며 로제타에게 말했다.
“정확히 언제 깨어나시는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깊게 주무시지는 않을 거예요.”
사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매만지던 로제타가 날카롭게 물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아직 그런 선례는 없습니다.”
“선례가 없는 일도 생기지 않나?”
평소라면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거는 그에게 화가 났겠지만, 이번만큼은 기꺼웠다. 안겔은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폐하. 그렇다면 시간이 적당히 지난 뒤 치료하시면….”
“몸이 적응을 다 끝내지 못한 거면?”
안겔이 입을 다물자 로제타가 다시 물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지 확신도 할 수 없는 상황이면서 저이를 데려와도 된다고 한 건가?”
그 속에 숨겨진 걱정과 불안함을 읽은 안겔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어느 경우든 변수는 늘 있는 법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건 훗날 사내의 마음을 얻지 못할 로제타의 분노를 피하고자 하는 말이었다. 안겔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저 자신이 변수가 아니길 바랄 뿐이죠.”
당연히 로제타는 그 변수가 아니어야 했다. 안겔은 여태까지 거울의 사용자들이 그랬듯 그가 고통스러웠으면 했다.
안겔이 차갑다 못해 얼어버릴 것 같은 로제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내고 있는데 침대 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사내에게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안겔은 파르르 떨리는 사내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그녀의 시선을 막아서는 로제타의 행동에 조금 얄밉게 웃었다.
“그리고 다행히 이분께서는 변수가 아니시네요.”
안겔이 사내를 가리키며 물었다.
“살펴볼까요?”
로제타가 휙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일단 나가.”
안겔은 로제타의 등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럼 잠시 물러가 있겠습니다. 설명이 끝나시거든 다시 불러주세요.”
방을 나온 안겔은 푸티의 안내에 따라 곧장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방 앞에서 저들의 대화를 듣고 싶었지만, 푸티가 감히 신녀인 안겔을 복도에 세워둘 수 없다며 단호하게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조금 아쉽긴 했으나 안겔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차를 마시며 로제타의 부름을 기다렸다.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으나 그리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했기에 나오는 여유였다.
그때 웬일로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푸티가 말을 걸어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안겔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폐하께서 사랑하는 존재를 찾으셨으니 백성 된 사람으로서 당연히 기뻐해야 함이 맞지요.”
로제타는 운명으로 인해 곧 절망에 빠져들 테니 안겔이 기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안겔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푸티에게 태연히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