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로제타는 대충 손짓을 했다. 딱히 도움이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그 뜻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푸티가 마법사를 불렀다.
“마법사님.”
마법사가 빠르게 로제타의 목을 치료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푸티가 그와 함께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안겔님께서 오시면 바로 이곳으로 모셔 올까요?”
“그래.”
푸티와 마법사가 사라지고 다시 둘만 남은 방에서 로제타는 사내의 옆에 앉아 그의 손을 붙잡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
다행히 사내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마법사가 말했듯 겉으로 볼 때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자 불안하던 마음이 차차 안정됐다.
사내의 손은 매우 부드러웠다.
“험한 일을 하며 자라지는 않은 모양이야.”
매일 음식 같지 않은 것들만 먹기에 혹여 많이 가난한 걸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사내의 손은 고생 한번 하지 않은 것처럼 부드러웠다.
오른손 중지에 굳은살이 박여 있는 것을 보니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한 것 같기도 했다.
로제타는 굳은살에 입을 맞추고 사내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사내의 감촉, 향기, 목소리, 생김새,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사내를 온몸으로 느낀 순간 욕심은 크기를 더 부풀리기 시작했다.
***
안겔은 로제타가 그녀를 급하게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황궁으로 향했다.
‘지금 날 부른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지.’
운명의 상대와 관련된 일.
거울 속 상대에게 빠지다 못해 홀린 것 같던 황제가 운명의 상대를 이곳으로 데려오지 못할 리가 없으니 아마 지금쯤 상대는 이곳으로 끌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을 테고.’
갑작스레 끌려온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그도 아니면 황제를 원망했을까?
빠르게 이동하느라 거칠게 흔들리는 마차에서 안겔은 배가 아프도록 웃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은 도와주는 척하는 게 좋겠지.’
그래야 앞으로도 황궁에 불려가서 로제타 보레알리스가 고통받는 걸 직접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의 상대에게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로제타 보레알리스라니. 이보다 더 짜릿할 수는 없었다. 안겔은 처음 그를 찾아갔을 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신의 딸이라고 불리더니, 그냥 전령일 뿐이군?’
여기까지는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말에 안겔은 큰 상처를 받았다.
‘얼토당토않게 조금 엮여 있다고 본인이 진짜 딸이라도 되는 양 구는 건 비참하지 않나?’
그 말이 아예 틀린 말이 아니라 더.
신의 딸이라는 명칭은 인간들이 그녀에게 준 것일 뿐 실제로 신이 그녀를 딸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신의 말을 전한 것도 처음 신녀가 되었을 때와 로제타에게 가운데 이름을 줄 때뿐이었다.
그래서 로제타가 이름을 받았을 때 그를 반갑게 찾아갔는지도 몰랐다. 그녀를 이해해 줄 동반자가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제타는 달콤하게 들리는 이름과는 달리 차갑고 무심했으며 성격이 나빴다.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 그 성질을 들키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지.’
본래도 황녀로 지낼 때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다는 핑계를 댔었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외모에 홀려 자연스레 황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힘을 받은 이후로는 본모습을 드러냈고.’
로제타는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신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자, 제국이 사랑하는 황제로.
그 행보에 안겔은 속이 뒤틀렸다. 그가 사랑받는 것이, 그는 그 사랑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거울에 대해 알게 됐을 때 제국이 사랑하는 황제의 짝을 찾아준다는 핑계를 대며 신전의 사람들을 설득했다. 실제로도 황제는 이 세계에 붉은 실이 연결된 사람이 없었다.
‘쓸모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안겔은 손을 들어 눈가를 더듬었다.
운명의 상대.
태어날 때부터 발목에 연결된 붉은 실.
서로에게 연결된 붉은 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운명이라고 두 사람이 늘 행복한 것은 아니었고 늘 연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연결됐다고 끝이 아니니까.’
연결된 실은 각자의 행동에 따라 낡아 없어지기도 했고, 더 단단해지고 견고해지기도 했다. 운명은 처음 신이 점지해 주지만 그걸 발전시키고 키워나가는 것은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간 거울을 통해 운명의 상대에게 끌려온 이들은 모두 불행해졌다. 끝에 가서는 그 운명의 실이 닳는 것을 넘어 끊어진 경우까지 있었으니까.
‘오랜 시간 거울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지.’
안겔은 거울과 함께 찾은 책 두 권 중 비참하던 결말이 담긴 두 번째 책을 태워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거울의 사용법이 적혀 있는 첫 번째 책만을 가지고 신전의 사람들을 설득했다. 로제타 보레알리스가 운명의 상대에게 버림받고 고통받는다니?
“내게 한 말을 똑같이 돌려줘야지.”
그날의 무심하던 눈빛과 그 속에 담겨 있던 자신을 향한 한심함.
‘얼토당토않게 조금 엮여 있다고 본인이 진짜 딸이라도 되는 양 구는 건 비참하지 않나?’
얼토당토않게 운명이라고 엮여 있다는 사실에 매달려 운명의 마음을 얻으려고 날뛰는 것은 매우 비참할 것이다.
신전의 사람들은 완벽한 황제가 더 완벽해질 수 있으리라는 것에 크게 감명받고 이 일을 처음 제안한 안겔에게 모든 일을 위임했다. 그리고 운명의 상대가 끌려왔으니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래,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안겔은 그 결과가 최악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질투와 악의가 가득한 속마음이었다.
안겔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내리누르며 온화하고 친절한 신녀의 얼굴을 뒤집어썼다.
***
푸티는 초조하게 황제궁 앞에서 안겔을 기다렸다. 로제타가 매우 예민한 상태이니 최대한 빨리 안겔을 데리고 돌아가야 했다.
‘혹시 이번에도 일정이 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늦는 것은 아니겠지?’
만약 보낸 전령을 그런 식으로 돌려보낸다면 이번에는 직접 찾아가 강제로라도 끌고 올 생각이었다.
푸티가 불안하게 황제궁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의 옆을 지키던 마법사 아리스가 물었다.
“왜 그렇게 불안해해?”
푸티는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돌아가라는 말을 듣지 않고 언젠가부터 반말을 쓰는 아리스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모르셔도 돼요. 그런데 왜 계속 제 옆에 계세요?”
물론 그가 옆에 붙어 있으니 여러모로 편한 부분도 있긴 했다. 특히 오늘같이 로제타가 마법사를 찾았을 때는 더더욱. 하지만 그래도 거슬리는 건 거슬리는 거였다. 푸티의 물음에 아리스가 씩 웃으며 답했다.
“너 재밌으니까.”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푸티가 이상하다는 듯 아리스를 바라보다가 그에게 관심을 껐다.
지금은 저 사내에게 관심을 줄 때가 아니라 로제타와 그 운명의 상대,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안겔에 집중할 때였다. 푸티가 조금은 날카롭게 말했다.
“황궁 소속이시니까 황궁에 있는 것 자체는 말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제 주변에는 있지 마세요.”
“왜?”
“제 옆에 있으면 폐하의 비밀을 많이 알게 되잖아요. 안 돼요.”
아리스가 신기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푸티를 응시했다.
“정말 폐하를 좋아하는구나?”
푸티는 아리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당연하죠. 좋은 직장을 주신 분이고, 적당히 비위를 잘 맞춰드리면 보상도 후한 분이세요.”
그리고 로제타의 권력은 곧 푸티의 권력.
푸티는 권력도 사랑했고 완벽에 가까운 편인 로제타도 싫어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답에 만족하고 있는데 아리스가 되물었다.
“그게 다야?”
푸티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실은 그가 권력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푸티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대놓고 권력을 좇는 것을 티 내선 안 되는 법이었다.
푸티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또 뭐가 있어야 해요?”
“글쎄.”
“흥.”
푸티가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으려 고개를 휙 돌리는데 아리스가 계속 질문을 던져왔다.
“그런데 운명의 상대가 남자네?”
“네, 그렇죠.”
이미 로제타에게서 계속 그라는 말과 사내라는 말을 들어왔으니 운명의 상대가 남자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애당초 제국은 남자든 여자든 누구를 만나든 크게 신경을 쓰는 풍토가 아니었다. 물론 폐하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건 좀 안타까웠지만.
“폐하께서는 남녀가 상관없으신가?”
아리스의 물음에 푸티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몰라요. 그간 성애적으로 다가가신 관계가 없으세요.”
“어?”
처음 듣는다는 듯 반응하는 아리스에 이번에는 푸티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유명하지 않나요? 폐하께서 그런 쪽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거.”
푸티가 황제의 직속 시종이 되기 전부터 돌던 소문이며 황궁과 귀족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유명한 이야기.
실제로 푸티는 로제타의 직속 시종으로서 몇 년간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했지만 단 한 번도 로제타가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성 기능에 문제가 있으신가 했었지만….’
아침에 종종 굳센 흔적을 발견했기에 그 걱정은 금방 사라졌다. 푸티의 생각이 다른 곳으로 새고 있는데 아리스가 다시 물어왔다.
“그거 진짜야?”
푸티가 잡생각을 날려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저렇게 절절하셔?”
푸티도 많이 놀랐었다. 하지만 지난 몇 달간 늘 봐왔던 모습이라 이제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