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8화 (18/155)

#18

2장. 새벽

서호는 지난 불면의 시간, 그를 잠 못 들게 했던 울음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어떻게 벽을 지나쳤는지 모르겠지만 주변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조금 좁지만 밝은 벽지와 방 안을 비추는 햇빛 덕에 밝았던 그의 방이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됐다.

주변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천장이 높고 넓었으며 한눈에 봐도 고풍스럽고 화려한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아니 이건 변한 게 아니라….’

서호가 있는 공간이 바뀐 것이다.

조금 두려웠지만 동시에 신기했다. 그저 손을 뻗기만 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주변이 달라지다니.

방 안은 어두웠으나 동시에 은은하게 들어온 붉은 빛들로 그리 음침해 보이지는 않았다. 서호는 머뭇거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그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떠올렸다.

그는 아까부터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벽 너머가 아니라 멀지 않은 곳, 같은 공간에 아까 그 사내가 있었다.

놀랍게도 서럽다 못해 음침하게 들리던 그 울음소리와 달리, 그리고 이 어두운 공간과 대비될 만큼 사내의 외양은 굉장히 밝은 느낌이었다.

정말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할 사내였다.

황금을 녹여 만든 듯 찬란하게 빛나며 곱슬거리는 금발과 그 사이로 보이는 새파란 푸른 눈.

그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넘쳐흘러 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 울어 붉어진 눈가와 열이 올랐는지 달아오른 볼에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사내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음에도 고집스럽게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집착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서호가 그다지 불쾌함을 느끼지 못했던 건 사내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이전의 울음과 달리 기쁨을 가득 담고 있는 눈물 때문일까?

‘내가 이리로 와서 기뻐하고 있어.’

서호의 등장에 사내는 슬픔을 완전히 벗어내고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때 기나긴 침묵을 깨고 사내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목을 긁는 것처럼 간신히 새어 나오는 매우 작은 소리. 사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서호는 주춤거리며 앞으로 한발 걸어 나갔다.

사내는 목이 아픈 듯 목을 붙잡고 눈을 찌푸렸으나 여전히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얼핏 비친 고통에 서호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그러자 사내가 눈썹을 아래로 내려트리고 잔뜩 서러운 낯을 하는 것이다. 그가 서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도 예쁘다고 생각했던 손이었다. 커다랗고 조금은 거칠어 보이는 손.

그 손을 타고 올라가면 탄탄해 보이는 팔뚝과 떡 벌어진 어깨가 있었다. 사내가 입은 얇고 하얀 천은 주인의 몸을 완벽히 가려주지 못했다.

천 너머로도 느껴지는 단단한 체구와 아름다운 얼굴.

벽을 통해 봤을 때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앞에서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이 사람은 참 현실성이 없게 생겼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겼지?’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든 저 사내의 얼굴을 본다면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저 외모에 홀려, 정체 모를 이에게 이끌려 이곳으로 온 것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는 소리였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사람이라면 무릇 아름다운 것에 호감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서호가 천천히 그의 손을 붙잡자 처연한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눈웃음을 치며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

멍하니 그 외모를 감상하는데 사내가 서호를 잡아당기며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이었다. 머리를 어지럽게 하던 얼굴이 사라지고 뜨거우면서도 커다란 품에 안기자 정신이 들었다.

‘지금 얼굴에 감탄할 때가….’

서호가 멈칫거리며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사내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서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잡았다.”

아름답던 얼굴에서 연상되는 달콤한 목소리가 아닌, 허기가 가득 담겨 있는 거친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이 바짝 얼은 서호는 그렇게 한참을 사내의 품에 안겨 있었다.

***

로제타는 그의 품 안에서 잠이 든 사내를 내려다봤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던 사내는 시간이 지나자 금방 경계를 풀더니 깊은 잠에 빠졌다.

‘따뜻해.’

로제타도 사내가 요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사내가 그랬듯 로제타 역시 잠을 자지 못했으니까.

다만 로제타는 신의 힘을 받으면서 신체가 말도 안 되게 강해진 사람이었고 사내는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이 달랐다.

“아니,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지.”

절대 평범한 사내는 아니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우니까.

로제타는 그의 품 안에서 잠이 든 사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손끝이 얼굴에 닿자 사내의 눈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잠시 멈칫했던 로제타는 사내의 얼굴이 다시 평온해지자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끈하고 부드러워.’

로제타는 사내의 광대, 코끝, 눈가, 입술, 턱, 목선을 차례차례 매만졌다. 손에 착착 감기는 촉감에 몸에 열이 오르고 입안이 바짝 말랐다.

로제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내는 순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조금 위기감이 떨어지나?”

아무리 요즘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해도 이건 좀 심했다.

어쩌면 로제타가 사내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것처럼 사내 역시 로제타를 보자마자 로제타가 그의 운명의 상대였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긴장을 푼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절로 미소가 흘렀다.

“으음.”

그때 사내가 작게 신음을 내며 로제타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추운 듯 몸을 살짝 움츠리는 사내를 안아 들고 로제타는 그의 침대로 다가갔다.

로제타와 비교하면 연약하기 그지없는 사내였으니 한동안은 자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배려해야 했는데 지난 며칠간 스스로의 감정에만 충실했던 나머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지.’

어떻게든 사내를 빨리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사내는 자신의 옆에 있으니 조금쯤 여유를 가져도 괜찮을 것이다.

만족스레 웃은 로제타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자신의 냄새가 가득 묻은 이불을 덮고 편안하게 잠이 든 사내의 옆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이름이 뭘까?”

이름을 알고 싶었다.

다행히 거울 너머에서와 달리 첫 만남에서 로제타는 사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내 역시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러니 나중에 사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그의 이름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차원을 넘어오며 무슨 작용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안겔을 불러 물어봐야겠군.’

말이 통하는 것은 마음에 들었지만, 혹여 사내의 몸에 무리가 될까 걱정이 됐다.

“무리?”

로제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지금 사내는 잠이 든 것이 아니라 기절한 건가?

차원을 넘어오며 몸에 무리가 갔을 수도 있었다. 로제타는 재빨리 종을 울렸다.

‘멍청하긴!’

사내를 직접 보고 목소리를 듣고 손으로 만진 것에 흥분해 너무나도 간단한 예측을 전혀 하지 못했다.

로제타가 입안의 살을 짓씹으며 사내의 안색을 살피는데 조용히 문이 열리고 푸티가 나타났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이리로 와! 아까 그 마법사는?”

다급한 로제타의 말투에 푸티가 화들짝 놀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푸티의 뒤로 요즘 푸티와 함께 다니던 마법사가 주춤거리며 따라 들어왔다.

점점 더 침대에 가까워지는 둘이 매우 거슬렸으나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사내의 상태를 확인해 봐야 할 때였다.

“폐하,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로제타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푸티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사내를 살폈다.

“이분께서….”

로제타는 푸티의 말을 끊어내고 물었다.

“아픈 것 같나?”

“네?”

“갑자기 잠들듯 쓰러졌어. 기절한 건지 잠이 든 건지 모르겠다.”

그제야 로제타의 말을 알아들은 푸티가 그의 뒤에 서 있던 마법사를 불렀다.

“마법사님?”

마법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저는 의사가 아니….”

로제타의 시선을 정면에서 받은 마법사가 몸을 굳히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제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법사는 사내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 보며 몸을 살폈다. 로제타는 사내를 만지작거리는 마법사의 손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아무리 상태 확인을 위해서라지만 손이 가벼웠다.

‘손이 없어도 마법은 사용할 수 있을 텐데.’

마법사나 푸티가 들었으면 기겁할 생각을 하던 로제타는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사내의 건강이라는 걸 몇 번이나 되뇌며 충동을 억눌렀다.

잠시 뒤, 마법사가 몸을 뒤로 물리자 로제타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지?”

“겉으로 볼 때는 괜찮아 보이십니다. 몸에 큰 이상은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니 치유마법을 사용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로제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세상에서 온 자였다. 괜히 무언가를 했다가 큰일이 날까 걱정이 됐다. 역시 모든 것은 신녀와 만나고 난 뒤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니 일단 보류해.”

그때 눈치 좋게 푸티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겔님에게 즉시 편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오라고 해.”

푸티가 빠릿빠릿하게 답했다.

“네, 긴급한 일이라 알리겠습니다.”

로제타가 몸을 돌려 사내의 상태를 살피려 하는데 푸티가 바로 방을 나서지 않고 그를 불렀다.

“그리고 폐하.”

로제타가 힘을 이용해 푸티를 밖으로 날려 보내려는데 푸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목소리를 치료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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