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7화 (17/155)

#17

열심히 로제타를 돌봤는데 한마디 치하도 없이 갑작스레 방에서 쫓겨난 것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 뻔했다. 솔직히 아리스는 지난 며칠 굉장히 놀란 상태였다.

‘굉장히 지극정성이었지.’

푸티는 황궁에서 꽤 유명한 자였다. 별 볼 일 없는 능력과 빠른 눈치 덕에 황제의 직속 시종이 된 운 좋은 사내.

그 자리에 맞지 않게 순한 인상의 소유자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그렇게 만만한 자가 아니라는 이야기 역시 듣긴 했다.

그리고 실제로 본 푸티는 확실히 순하게 생겼지만, 마냥 맹탕은 아니었다.

‘능력 없는 사내도 아니고.’

적어도 시종으로서의 능력만큼은 오히려 꽤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푸티는 오로지 로제타를 위해서만 움직였으니까.

그러니까 로제타에게 이득이 되게 움직였다는 소리다. 로제타가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로제타의 평판을 유지하려 애썼고 그러면서도 적당한 선을 지켰다.

로제타가 참을 수 있고 다른 사용인들과 마법사, 기사들이 참을 수 있는 선을 눈치 좋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푸티를 보면 투덜거리기는 해도 그에게 욕을 하지는 않았다.

‘균형을 맞추는 건 어렵지.’

아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푸티를 보면 언제나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의 노력은 인정하는 편이었다.

‘정말 차고 넘치게 노력 중인데.’

아리스가 마법사들만큼이나 피곤에 찌들어 시커멓게 내려앉은 푸티의 눈가를 흘끗 쳐다봤다.

황제가 그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고 완전히 무시하는데 그래도 푸티는 언제나 로제타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로제타가 이해할 만한 이유를 가져다 대면서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시켰다.

‘조금 전 손톱까지 정리하고.’

그런데 그렇게 손톱 정리가 끝나자마자 쫓겨난 것이다.

아리스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푸티를 바라봤다. 푸티가 로제타에게 가지고 있는 그 엄청난 충성심과 애정과는 달리 로제타는 그렇게까지 푸티를 아끼지 않는 것 같았다.

본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나 그래도 이렇게까지 헌신적인 시종은 별로 본 적이 없어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어떻게 달래야 하나.’

아리스가 고개를 푹 숙인 푸티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저, 푸티?”

그때 푸티가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제대로 말을 듣지 못한 아리스가 그를 붙잡았다. 그때 푸티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끝났어요!”

“응?”

푸티가 벌떡 고개를 들더니 아리스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로제타의 방을 지키고 있던 모든 이들을 향해 말했다.

“자, 이제 끝났어요. 다들 방에서 멀리 멀어지세요!”

“네?”

“울음소리가 멈췄잖아요?”

그제야 아리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로제타의 울음이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놀라 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푸티가 사람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빨리 방에서 멀어지세요!”

아리스가 되물었다.

“어…, 왜?”

“폐하께서 원래대로 돌아오셨으니 예전으로 돌아가야죠. 폐하는 방 앞에 누가 서 있는 걸 싫어하세요.”

“아.”

“자, 얼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요. 그리고 떠나기 전에 각자 이름을 알려주고 가세요. 폐하께 따로 말씀드려 수당을 챙겨드리겠어요.”

푸티의 말에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푸티를 따라 방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리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푸티를 따라 이동했다.

아리스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두는 푸티에게 물었다.

“정말 챙겨주려고?”

“그럼요. 해드릴 수 있으면 다 해드려야죠. 폐하께서 안 하셔도 보좌관들에게 이야기하면 다 해주실 거예요. 다들 여러분이 고생한 걸 아시니까요.”

아리스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푸티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해도 돼?”

“돼요. 폐하께서는 이 정도로 뭐라고 하지 않으세요.”

“월권이잖아?”

푸티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폐하께 폐가 되지 않는 수준이면 신경 쓰지 않으세요.”

충성스러운데 또 능동적이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아리스가 이제 보이지 않는 복도 너머 로제타의 방을 눈짓하며 물었다.

“그런데 이제 정말 끝난 건가?”

그러자 푸티가 생긋 웃었다.

“네, 아까 얼핏 봤는데 엄청나게 좋아하고 계셨어요. 그분께서 오신 거예요.”

그분, 푸티가 말했던 운명의 상대라는 이였다.

솔직히 조금 믿기 힘든 이야기이기는 했으나 신녀 안겔이 이 일에 엮여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신녀 안겔이 신이 사랑하는 인간에게 선물한 거울과 그 거울을 통해 보이는 운명의 상대라니.

‘신이 개입된 일이겠지?’

아무리 비현실적인 일이라도 신이 이 일에 엮여 있다면 그건 곧 현실이 될 가능성이 컸다.

‘신녀 안겔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조금 냉소적인 생각을 하는데 푸티가 꿈을 꾸듯 반짝거리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폐하께서도 원래대로 돌아가실 거예요.”

“…뭐, 그랬으면 좋겠네.”

“마법사님도 수고하셨어요.”

푸티의 말에 아리스가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수고했어. 훌륭한 시종이네.”

푸티가 매우 기뻐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뭐, 능력 있는 것과는 별개로 조금 눈치가 없는 것도 같았다.

‘나도 모르게 반말을 썼는데 눈치 못 챈 것 같네.’

아니, 그간의 모습을 보면 눈치가 없다기보다는 지금 일에 너무 기뻐하느라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는 듯했다. 뿌듯함이 가득한 얼굴을 마주한 아리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서호는 피곤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건조하다 못해 뻑뻑한 눈가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처음 이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린 뒤부터 제대로 잠을 잔 적이 거의 없긴 했지만, 요즘처럼 자지 못한 적은 처음이었다.

“내내 우니까 잘 수가 있나.”

서호는 남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속 편하게 잠이 들 정도로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울음이 멈추지 않은 지 일주일째, 서호는 피곤함에 절어 있었다.

“아, 자고 싶다.”

정말 조용한 곳,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푹신한 침대에 누워 부드러운 이불을 덮고 푹 자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시간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순간 엄청난 환희가 서호를 덮쳤다.

‘뭐지?’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에 당황할 새도 없었다. 서호는 쿵쿵 뛰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눈앞이 멍해지고 귀가 먹먹했다.

예상치 못한 감정의 변화에 몸이 놀랐는지 콱 메어오는 목을 부여잡고 서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눈가에 열이 차오르고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서호는 이를 악물었다.

분명 직접 느끼고 있는 감정이지만 그의 것은 아닌 것 같은 이상한 느낌.

‘그럼 누구의 감정이지?’

왜 이 감정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전조도 없는 감정 변화가 평범한 것이 아님을 서호는 알았다.

‘미치고 있는 건가.’

서호가 잘게 떨리는 몸을 무시하고 간신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에 비치는 존재를 인지하고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으아? 응?”

눈이 그려 있던 벽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지난 며칠 서호를 걱정하게 했던 그 눈이 있던 자리에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사람이 맞나?’

서호와 같은 사람이라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존재였다.

어두워 보이는 주변에도 불구하고 빛이 나는 사내. 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한 사람. 멍하니 사내를 쳐다보는데 서로의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선명한 푸른 눈.’

익숙한 눈이었다. 벽에 그려진 눈과 똑같은 그 눈. 그리고 그 눈에서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너구나.’

서호는 저 사람이 그간 자신을 괴롭혔던, 그리고 자신이 안타까워했던 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음과 동시에 서호는 지난 며칠 내내 그를 자극하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는 것도 눈치챘다. 서호가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눈앞의 사내가 서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도 예쁘네.’

그 사람이 내민 손은 얼굴과 다르지 않게 예쁜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모난 데 없이 곧게 뻗어 있는 길쭉한 손가락, 예쁘게 정리된 손톱, 천천히 뻗어지던 손이 이내 간절함을 가득 담고 조금 더 앞으로 내밀어졌다.

서호는 그 손을 타고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저 슬퍼하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까 그건 저 남자의 감정이야.’

사내는 서호와의 만남을 그렇게나 반긴 것이다.

서호는 난생처음 접해 본, 너무 강렬해 폭력처럼 느껴지던 그런 감정을 저 사내는 실제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손을 잡아달라고 간절하게 빌고 있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으나 서호는 사내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저 손을 잡으면 어떤 의미로든 이 생활이 끝이 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저 사내가 느끼는 아프도록 강렬한 감정 때문일까.

‘아마 둘 다겠지.’

저렇게 아름다운 사내가, 항상 슬퍼하고 있던 사내가 그저 자신과 마주한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있었다.

정말 우습게도 사내가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자신이 이곳을 떠날 이유는 충분한 것 같았다.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서호는 그냥 몸이 가는 대로 행동했다.

움찔거리던 손끝을 시작으로 서서히 앞으로 뻗어지던 서호의 손이 곧 벽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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