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4화 (14/155)

#14

결합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사내의 감정이 더 선명히 느껴지고 머릿속에 울려 퍼지던 사내의 목소리도 더 커졌다. 거울 속 사내가 멈칫하며 놀란 눈으로 벽을 매만지는 게 보였다.

사내의 손에 물기가 묻어나고 그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머뭇거리던 손이 벽의 눈물을 닦아 내렸다.

“그대를 만지고 싶어.”

작게 중얼거린 로제타는 더욱 크게 울었다. 멀리서나마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내를 보자 더 크게 울음이 나왔다.

더 나를 신경 써 달라고, 내가 여기 있다고. 빨리 알아보라고.

‘나를 만나러 와 줘.’

평소보다 더 길고 처절한 울음소리였다.

로제타가 울면 울수록 사내의 슬픔은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로제타에 대한 감정이 가득했다.

당황하고 곤혹스러워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사내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아니 더욱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지 않는 기나긴 울음의 시작이었다.

로제타는 그날 밤 내내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

서호는 당황했다. 갑자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뜬금없이. 왠지 모를 먹먹함에 슬퍼하던 것도 잠깐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자는 것도 아닌데 울음소리가 들리는 건 처음인데.”

혹시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 봤으나 아팠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봤지만, 그는 지금 깨어 있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울음소리가 들린다.

서호가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에도 소리는 작아질 생각을 하지 않고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자신에게만 들리는 걸까?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다른 사람들한테도 들리면?”

이웃집에서 찾아오면 어쩐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하지?’

서호는 뭘 해야 하나 불안해하며 다시 벽을 바라봤다. 벽에서 물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벽에 그려진 선명하고 아름다운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그게 또르르 흘러내리더니 이제는 쉬지 않고 흘러넘쳤다.

“어떡하지?”

도대체 뭐가 그렇게 슬픈 걸까? 왜 이렇게 우는 걸까? 무얼 알아달라고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지 궁금했다.

동시에 정말 우습게도 벽 속 존재에 대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그래, 두려움이 아니라 안타까움이 찾아왔다.

‘나도 답이 없지.’

서호가 손을 들어 그 눈물을 닦아줬다. 하지만 아무리 닦아줘도 눈물은 계속 흘러나왔고 서호의 두 손만 흠뻑 젖어 들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서호는 벽에다 대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왜 그래? 응? 왜 울어?”

외국인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정체불명의 존재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울지 마. 응? 목 아프겠다.”

하지만 서호가 달래주면 달래줄수록 울음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그렇다고 그냥 울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울음소리는 그냥 지나치기에는 벅찬 종류의 것이었다.

서호는 계속해서 벽의 눈물을 훔쳐 주었다. 그렇게 기나긴 밤과 새벽이 지나 햇빛이 방에 들어왔으나 여전히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평소보다 훨씬 더 긴 울음에 이제 서호는 다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울어도 되는 건가? 귀신은 탈진하지 않아?”

이렇게 온종일 울면 평범한 인간은 벌써 탈진해 쓰러졌을 것 같았다. 귀신이라 체력이 넘쳐나는 건가? 반나절 정도는 계속 이렇게 소리 내 울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넘기기에는 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목이 쉰 것 같은데.”

맙소사, 귀신이 목이 쉬다니. 하지만 정말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놀라운 발견이었지만 어디에 자랑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목소리가 쉬었으면 귀신도 지치는 게 맞을 텐데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지.”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아주며, 어색하게 벽을 다독거리며 그를 달래던 서호는 안타까운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존재를 이렇게 달래주다니. 참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었다.

***

보레알리스 제국의 황궁.

시녀들 무리가 철저히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황제궁을 힐끗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소문 들었어? 며칠 전에 황제궁에서 울음소리가 반나절 내내 들렸다더라.”

한 시녀의 말을 시작으로 다른 시녀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 나도 들었어!”

“맞아.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하더라?”

“진짜 무서워. 몬스터가 우는 것 같았대.”

“그래. 무서운 소리라고 들었어.”

시녀들이 충분히 호응하자 처음 입을 열었던 시녀가 목소리를 죽이며 속닥였다.

“너희들 그럼 그 이유도 들었어?”

“이유라니?”

시녀가 숨을 한번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폐하께서 머리가….”

그때 무리 중 평소 황제에게 깊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시녀 하나가 큰 소리를 냈다.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해?!”

처음 입을 열었던 시녀가 움찔하며 시녀 무리와 텅 빈 그들의 주변을 둘러보며 답했다.

“우, 우리밖에 없잖아.”

충성스러운 시녀는 평소에도 딱딱한 얼굴이라 쉽게 말을 걸기 힘든 인상이었으나 이렇게 화를 내고 있으니 더 사나워 보였다.

시녀가 경고하듯 처음 입을 열었던 시녀에게 다가가 삿대질을 했다.

“폐하는 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야.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해봐!”

처음 입을 열었던 시녀가 잔뜩 겁을 먹고 입을 꾹 다물자 다른 시녀들이 하나둘 둘의 사이를 중재하기 시작했다.

“그만해.”

“맞아. 너무 심하게 하진 말자. 너도 입조심하고.”

“이렇게 크게 이야기했다가 잘못하면 정말 큰일 난다.”

“그래, 그래.”

주변 시녀들이 두 사람 사이에 파고들자 충성스러운 시녀가 코웃음을 치며 친한 무리와 함께 먼저 걸어 나갔다.

뒤에 남겨진 시녀가 그녀의 옆에 남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시녀들을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다른 소문도 하나 들은 게 있는데.”

그러자 남아 있던 시녀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너는 방금 그렇게 당하고도 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시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황실의 소문에 관심이 많았고, 입이 가벼운 편이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주변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이건 조금 신빙성이 있지.”

“응?”

“이번에 신녀님께서 황궁에 또 불려 오신 것 알지?”

그러자 다른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알지.”

“요즘 계속 신녀님께서 황궁에 자주 오셨잖아.”

확실히 그랬다. 원래도 신녀 안겔은 신의 사랑을 받는 황제 로제타를 찾아 종종 황궁에 들르곤 했지만, 최근에는 그 빈도가 더욱 잦아지고 있었다.

“그랬지.”

“맞아, 요즘 자주 오셨어.”

처음 입을 열었던, 말 많은 시녀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이번에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게, 신녀 안겔님이 돌아가고 나서래.”

그러자 한 시녀가 깜짝 놀라 외쳤다.

“뭐?”

말 많은 시녀가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로 입을 막으며 말했다.

“얼마 전부터 소문이 있었잖아.”

그러자 놀랐던 시녀가 처음 듣는다는 듯 물었다.

“신녀님하고 폐하의?”

“그래.”

“그거 정말일까?”

말 많은 시녀가 황궁을 힐끗거리며 답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저렇게 울음소리가 날 일이 뭐가 있어?”

“아니, 애당초 폐하의 울음소리가 맞긴 해?”

다른 이가 또 물어오자 말 많은 시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하지만 폐하가 아니면 밤새 울음소리가 계속될 리가 있어? 황제궁이잖아.”

그 말은 꽤 신빙성이 있었다. 그 대단한 황제 로제타 보레알리스가 머무르는 궁이었다. 황제가 아닌 다른 이가 감히 궁이 떠나가라 울 수는 없었다. 그러자 한 시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애당초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가 헛소문인 거 아니야?”

말 많은 시녀가 고개를 세게 저으며 답했다.

“아니야, 나랑 같은 방을 쓰는 애가 직접 들었대.”

“정말?”

“응.”

나름 증거까지 들이밀자 시녀들이 흥분해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 우리 폐하께서 신녀에게 차이신 거야?”

“설마.”

“진짜면 어….”

시녀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어째서 황제가 신녀에게 차인 건가 속살거리고 있던 그때 그들의 뒤로 노성이 떨어졌다.

“거기 너희들!”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다시 한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이리로 와!”

시녀 중 하나가 그들을 부른 상대를 확인하고 사색이 됐다.

“…망했다.”

황제의 유일한 직속 시종이자 황제궁의 다음 시종장이 될 거라고 이야기가 도는 푸티였다. 다른 시녀들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푸티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푸티는 평소에는 무해한 얼굴을 하고 모든 일에 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이었고, 시녀들 사이에서도 나름 귀엽고 착한 얼굴로 인기가 많은 이였다.

하지만 그에게 황제에 대한 소문을 퍼트리거나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걸 들키면 불호령이 떨어진다고 했다.

뒤끝도 길어서 한번 책이 잡히면 앞날이 불확실해진다는 소문도 있었다. 시녀들이 잔뜩 겁에 질려 있는데 푸티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이리로 오라니까?!”

시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며 푸티에게 다가갔다. 푸티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각자 소속과 이름을 말해라.”

그 말에 한 시녀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이….”

시녀들이 쉽게 입을 열지 않자 푸티가 더욱 화를 냈다.

“어서!”

“푸, 푸티님.”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시녀들이 잘못을 빌었지만, 푸티는 냉정하게 그들의 말을 잘라내며 물었다.

“소속, 이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