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3화 (13/155)

#13

로제타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뽐내듯 말했다.

“연결이 더 강해졌지?”

“네.”

“이제 목소리도 들리네. 얼마나 남은 것 같나.”

그래, 결국 목적은 이것이었다. 거울 속 사내. 안겔이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흠, 그래?”

“네.”

원하는 답이었던지 안 그래도 밝던 얼굴이 더욱 활짝 피어났다.

“그럼 준비해야겠군.”

그리 말한 로제타가 휙 몸을 돌리자 안겔이 그에게 물었다.

“가십니까?”

“그래. 이번에야말로 그대가 말한 날이 맞았으면 좋겠어.”

안겔의 예상이 틀렸음을 지적하는 말을 끝으로 로제타는 인사도 없이 응접실을 나섰다. 들어온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응접실을 떠난 것이다. 안겔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보자 보자 하니까….”

로제타에 대한 욕을 내뱉으려던 그때, 문이 다시 열리고 시종 푸티가 다른 사용인들을 데리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신녀님.”

푸티만 있다면 성격을 다 드러내겠지만 그의 뒤에는 많은 사용인이 있었다. 안겔은 작게 웃으며 푸티를 바라봤다. 푸티가 안겔이 그렇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 바쁘신 중에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우 바쁘신 것 같던데 밖까지 안내할 사람을 붙여드리겠습니다.”

끝까지 푸티는 안겔을 긁어댔다. 안겔이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됐어요.”

그러자 푸티는 두 번 권하지 않고 물러났다.

“소중한 시간 감사합니다.”

안겔은 그녀가 있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고 사용인들에게 응접실을 정리하라 말하며 간접적으로 축객령을 내리는 푸티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그 잘나신 황제를 믿고 저렇게 버릇없고 무례하게 구는 모양인데, 이제 그것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거울 속 존재가 이곳에 끌려오기까지 길어야 일주일.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내가 이곳에 오고 난 뒤 황제는 큰 절망과 슬픔에 빠질 것이다.

안겔이 비릿하게 웃어 보이며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황제가 그렇게 실의에 빠지게 되면 자연스레 저 버릇없는 시종도 지금처럼 의기양양하지 못할 것이다. 안겔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기쁨을 떠올리며 오늘의 패배를 지워냈다.

***

서호는 나란히 놓인 부모님의 사진 앞에 쭈그려 앉아 케이크와 보온병을 꺼냈다. 몇 번 와 보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음식물을 꺼내도 되는지 알지 못해 케이크는 상자에 곱게 들어가 있었고 보온병의 뚜껑 역시 열어놓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호는 노력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서호는 사이좋게 웃고 있는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생신 축하드려요.”

자신의 생일과 일주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부모님의 생일.

죽고 난 뒤에 생일이 별 의미가 있나 싶었으나 그래도 본인도 생일을 챙겼으니 부모님의 생일도 챙겨드리고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만 오면 그렇게 눈물이 났었다. 주변 사람들이 손수건을 건네줄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 그래서 자주 오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괜찮았다.

여전히 슬프고 가슴이 먹먹했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다. 서호는 두 사람을 보며 그간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서호의 일상은 크게 변함없이 언제나 비슷비슷했기에 자연스럽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벽에 그려진 눈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벽에 이상한 그림이 생겼어.”

점점 생기를 띠는 그 눈이 이제는 그리 무섭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이제 괜찮고.”

서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엄마 아빠가 친구를 보내준 건 아니겠지? 쓸쓸하지 말라고.”

서호는 유리 너머 사진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엄마 아빠는 아닐까 싶었는데 눈이 푸른색이더라.”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의 부모님이 홀로 남은 아들이 걱정돼서 그래서 그를 데리러 와준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눈 색을 보고 확실해졌다. 그 눈의 주인은 부모님이 아니었다.

사실 그 울음소리부터가 부모님의 것이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조금 실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제 와서 그 눈이 다시 무서워졌다거나 꺼려지는 것도 아니었다. 서호가 웃으며 말했다.

“나 외국인 친구가 생겼나 봐.”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현실에서 외국인 친구를 만들어 보기도 전에 죽은 외국인 친구를 먼저 사귄 게 조금 웃기긴 했지만.

“무당이 그러는데, 내가 곧 죽을 거라나 봐. 그런데 별로 안 무서워.”

부모님 앞에서 이 말을 직접 했으면 미쳤냐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서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하지?”

서호는 그 뒤로도 자잘한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열두 시쯤 도착한 것 같은데 벌써 네 시가 넘었다.

서호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올 수 있으면 올게.”

서호는 그가 가져왔던 보온병과 케이크 상자를 챙겼다. 음식을 두고 가도 되는지 모르겠으니 그냥 챙기기로 했다.

그대로 몸을 돌리려던 서호는 문뜩 그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상하게.

갑자기.

서호는 몸을 돌려 부모님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리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드디어 익숙한 번호의 버스에 올라탔다. 여섯 시를 훌쩍 넘어 일곱 시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서호는 때맞춰 난 빈자리에 앉아 창밖을 살폈다. 익숙한 거리를 눈으로 훑고 있는데 문뜩 누군가 서호를 불렀다.

“서호야?”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역시 오유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에서 마주치다니 조금 신기했다.

“유리야.”

오유리도 놀란 건 마찬가지인지, 그녀가 서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어디 다녀와?”

서호는 그녀의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않고 웃으며 답했다.

“응. 자리 비켜줄게.”

“아니야, 짐 있는 것 같은데.”

오유리가 서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가 그의 무릎 위에 놓인 상자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케이크?”

서호가 어색하게 답했다.

“아, 응.”

보온병은 가방에 들어가 있지만, 케이크는 가방에 들어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무릎에 올려놨는데 눈에 띄었던 모양이었다.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오유리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설마, 부모님이 이제야 챙겨주신 거야?”

서호는 대충 얼버무렸다.

“뭐….”

오유리는 혼자 결론을 내린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집에 가?”

“응.”

“나도 이제 시험 다 끝났어. 오늘은 친구들이랑 놀기로 해서,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그래.”

서호와 이야기를 몇 번 더 주고받던 오유리가 하차 벨을 눌렀다. 서호는 아까 납골당에서 느꼈던 느낌을 또 받았다.

다시 오유리를 보지 못할 것 같은 느낌.

서호는 그에게 인사를 하는 오유리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야.”

“응?”

“고마웠어.”

서호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던 오유리가 그의 품에 있던 상자를 바라보더니 웃었다.

“아, 케이크?”

그 외에도 고마운 점이 많았지만, 서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유리가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뭘. 안녕.”

서호는 버스에서 내리는 오유리의 뒷모습에 인사했다.

“안녕.”

기묘한 기분이 드는 날이었다.

***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오늘 종일 자리를 비웠던 사내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로제타는 그가 보지 못하는 집 밖의 생활이 궁금했고 그가 만나고 다니는 사람이 궁금했다.

조그맣고 네모난 물건을 내려다보며 한 번씩 미소 짓게 하는 상대는 누구인지, 무얼 하러 나가는 건지, 어디를 다녀온 것인지.

그의 모든 일상이 궁금했다.

한참 홀린 듯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던 로제타는 문뜩 강한 예감을 받았다.

‘정말 머지않았어.’

그와 강하게 연결된 느낌. 갑작스러운 변화에 로제타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였다.

로제타에게로 사내의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사내는 지금 슬퍼하고 있었다.

슬퍼하면서 뭔가 후련해하는 느낌.

“이게….”

사내가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씻은 뒤, 침대로 돌아왔다. 평소처럼 움직이는 내내 덤덤한 얼굴의 사내에게는 슬픔이 함께했다. 너는 항상 이렇게 슬펐던 걸까?

겉으로 볼 때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눈물을 흘릴 때를 제외하고는 괜찮아 보였는데.

‘이렇게 슬펐어?’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던 웃음 뒤에도 이렇게 슬픈 감정이 숨어 있었을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동시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사내의 감정에 동화된 건지 아니면 그냥 그와 더 강하게 연결됐다는 것에 기쁜 건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왔다. 그의 감정과 로제타의 감정이 섞여 엉망이었다.

로제타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푸티가 화들짝 놀라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으나 그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무시했다. 그에게 해를 입힐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자연스러운 무시였다.

푸티가 소리를 내어 펑펑 울고 있는 로제타를 확인하고는 작게 한숨을 쉰 채 사람들을 더 멀리 물리는 것도 로제타는 알지 못했다.

로제타는 그저 사내만을 바라봤다. 사내는 벽을 바라보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처음 거울이 연결되었던 벽.

‘나를 보고 있어.’

사내가 입을 열어 무슨 이야기를 했다. 술렁이는 그의 속마음과 달리 겉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담담했고 잔잔했다.

단정한 얼굴과 어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말투.

그와 상반되는 술렁거리는 속.

그 간극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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