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2화 (12/155)

#12

로제타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렸고 손끝이 저릿했다.

뜨거워지는 귀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가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내의 목소리.

부드럽고 낮은 그의 얼굴과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또다시 사내가 무어라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혼잣말이 많은 편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아니면 노래를 부르는 취미가 있다거나.

사내의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로제타는 거울에 바짝 붙었다. 귀가 아닌 머리를 통해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이었다.

로제타가 거울에 딱 달라붙어 사내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경악한 푸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로제타는 눈을 찌푸렸다. 사내가 언제 말을 꺼낼지 모르는데 푸티의 큰 목소리에 사내의 달콤한 목소리가 묻힐까 걱정이 됐다.

로제타는 평소처럼 푸티를 무시하는 대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말하지 마.”

조금 날카롭게 돌아온 로제타의 명령에 푸티가 멈칫하며 되물었다.

“네?”

“입을 다물고 할 말이 있으면 글로 적어.”

“그게 무슨….”

“시끄러워.”

이쯤 하면 겁이 많은 푸티는 뒤로 물러나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푸티가 끈질겼다. 푸티가 로제타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니, 폐하. 방금 제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로제타의 손이 꿈틀거렸다. 푸티는 그의 입을 막아버리려는 로제타의 움직임을 기민하게 눈치채고는 작게 속삭였다.

“자, 작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눈치 없는 자가 아닌데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한동안 입을 열 수 없게 만들어 주겠다 다짐한 로제타가 푸티에게 물었다.

“뭐지?”

로제타의 허락이 떨어지자 푸티가 재빨리 본론을 꺼냈다.

“어째서 안겔을 방으로 부르신 겁니까?”

무슨 소리냐는 듯 푸티를 바라봤던 로제타는 그제야 오늘 안겔과 약속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안겔이 말한 한 달이 지났다.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게 된 건 반길 일이었지만 아직도 사내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았고 로제타는 다시 한번 안겔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예정된 시간이 지났고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건지 궁금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로제타는 안달이 났다. 로제타가 다시 거울 속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그야 방을 떠날 순 없으니.”

사내의 목소리가 언제 들릴지 모르는데, 방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점점 더 연결이 강해지고 있으니 계속 거울 앞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안겔이 찾아오면 그의 방으로 들여보내라 일렀다. 그런데 지금 푸티가 그걸 걸고넘어지는 것이다.

로제타의 답에 푸티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제 말을 잊으셨습니까?! 소문이 돈다니까요? 폐하와 안겔이 엮여서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게 되면 어찌합니까?”

잔뜩 흥분해 다시 목소리를 높이던 푸티는 로제타의 눈치를 살피며 끝에 가서는 다시 소리를 낮췄다.

못마땅하게 눈썹을 치켜세우고 있던 로제타는 푸티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에게 물었다.

“처리하지 않은 건가?”

또 쓸모없다는 눈빛을 받고 싶지 않았던 푸티가 재빨리 답했다.

“물론 소문을 단속하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폐하도 협조를 해주셔야죠!”

또다시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내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지금은 조용했기에 다행이었으나 정말 이러다가는 푸티 때문에 그의 목소리를 놓칠 것 같았다. 로제타가 손을 뻗어 푸티의 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소리.”

푸티가 몸을 흠칫 떨며 답했다.

“…네.”

푸티는 덜덜 떨면서 로제타의 눈치를 살폈다. 손에 힘이 들어간 게 아니었음에도 순간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이쯤에서 물러나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푸티는 로제타의 눈빛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쓸모없다는 그 눈빛.

푸티는 떨리는 몸에 힘을 주며 간신히 용기를 끌어모아 말했다.

“폐, 폐하. 그분이 이곳에 오셨을 때 폐하가 다른 이와 사귄다거나 연인이라는 소문을 들으시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시겠습니까.”

푸티의 말에 로제타의 손이 천천히 푸티의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

푸티는 또 목이 붙잡힐세라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말이 없는 로제타에게 다시 한번 권유했다.

“잠시 응접실로 나가셔서 빠르게 대화를 하고 돌아오세요.”

로제타가 푸티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짜증 나는군.”

푸티가 빠르게 뒤로 물러나면서도 작은 목소리로 확답을 요구했다.

“폐하? 그럼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알았다.”

푸티가 깊게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푸티는 원하는 것을 쟁취해내고 재빨리 로제타의 방을 벗어났다. 아직도 그에게 붙잡혔던 목이 서늘했다.

***

안겔은 그의 앞에 서 있는 푸티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약속 시각이 지난 상태였다. 분명 그녀를 부른 것은 로제타였는데 약속 시각을 지키지 않는다니.

“곧 오실 겁니다.”

안겔은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서 있는 푸티가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보잘것없는 시종은 늘 그랬다.

황제를 제외하고 모든 이들에게 칭송받는 신녀 안겔에게 주제도 모르고 버릇없게 구는 황제의 시종.

여태껏 안겔이 푸티의 그런 오만방자함을 받아준 것은 푸티가 버릇없이 굴 때 늘 로제타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로제타가 없었다. 그러니 안겔은 참을 필요가 없었고.

안겔이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손님을 불러놓고 먼저 나와 있지 않다니, 폐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않고 뭘 하는 거지? 일을 제대로 하는 건가?”

그러자 푸티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신녀님께서 예상보다 늦게 답을 주시어 폐하의 일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습니다.”

안겔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지금 푸티는 로제타가 늦는 것이 안겔의 탓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 탓이다?”

안겔이 날카롭게 답하자 푸티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안 그래도 처진 눈꼬리를 밑으로 내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다만, 신녀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일정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조정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국이라는 큰 나라를 이끌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까.”

사과하는 푸티의 표정만 놓고 본다면 안겔이 일방적으로 그를 핍박한다고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는 달리 그가 한 말속에는 칼이 있었다.

‘너도 폐하가 불렀는데 일정이 있다고 늦게 오지 않았나. 그러니 로제타에게 뭐라고 하지 마라.’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짜증이 났는데 푸티가 말을 더했다.

“하찮은 시종인 저도 할 일이 그리 많을진대 폐하께서는 오죽하시겠습니까?”

안겔이 서늘한 눈으로 푸티를 노려봤다.

푸티는 시종인 그의 위치를 이용했지만 결국 저 말은 다시 한번 안겔을 공격하는 말이었다.

‘제국의 황제인 로제타는 너보다 훨씬 대단해서 일정이 더 많으니까 참아라.’

동시에 처음 안겔이 쏘아붙인 네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거냐는 말을 반박한 거였다. 안겔이 삐뚜름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참 주인을 닮았군요.”

그러자 푸티가 기쁘다는 듯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아랫것은 무릇 주인을 섬기고 존경하고 그분의 모든 것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안겔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지금 내가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녀가 미처 분노를 다 토해내기도 전에 로제타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로제타는 예의상으로라도 늦어서 미안하다는 입에 발린 말은 꺼내지도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왔나.”

그사이 푸티는 눈치 빠르게 뒤로 물러나 응접실을 떠난 상태였다. 안겔이 입술을 짓씹으며 사라진 푸티가 있던 자리를 노려보다가 로제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은 앞에 있는 로제타에게 집중해야 했다.

“폐하.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는….”

로제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안겔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생각에 잠긴 듯 심각한 얼굴로 밑을 내려다보는 로제타의 모습에 안겔이 비죽 솟아오르는 입가를 다잡으며 말했다.

“너무 조급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말했던 기한에서 조금 지나긴 했지만…, 곧 그분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그를 다독이는 것이 아니라 우스운 그의 모습을 비웃는 거였다.

“본래 마음이 급하면 급할수록, 더 실수가 잦아지고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한참 그에게 말을 줄줄 쏟고 있는데 로제타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발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봐라.”

안겔이 멍하니 그 발목을 바라봤다. 우스꽝스럽게 발 한쪽을 들이밀고 있는 로제타는 그럼에도 우아해 보여 어이가 없었다.

안겔이 황당함을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네?”

로제타가 뿌듯한 얼굴로 물었다.

“어떠한가?”

그제야 안겔은 로제타가 기분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그녀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안겔의 속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의 발목에 연결된 붉은 실이 더 단단해지고 두꺼워진 것을 보니 더 화가 났다. 안겔이 최대한 감정을 짓누르며 답했다.

“…대단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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