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1화 (11/155)

#11

푸티는 설렁설렁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로제타를 뿌듯하게 바라봤다. 예전에는 이리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정말 놀랍게도 요즘 로제타는 푸티의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따라주었다.

‘기분이 좋긴 하신가 봐.’

로제타는 가진 무력도 대단했지만, 머리도 좋았다.

따라서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서류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푸티는 지극정성으로 로제타의 시중을 들며 그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노력했다.

언제 다시 사내가 나타날지 몰랐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당장 급하게 마무리 지어야 하는 서류의 마지막에 로제타가 서명을 끝마쳤을 때, 그가 번쩍 고개를 들고 거울을 바라봤다.

‘왔네.’

푸티는 눈치껏 마지막 서류를 챙겨 들고 자리를 비웠다. 다행히 오늘 당장 처리해야 하는 서류는 끝이 났으니 로제타가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저 꼴을 보고 있으면 내 머리만 아프지.’

푸티는 곧장 로제타의 집무실로 향했다. 퇴근하지 못하고 푸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가 집무실로 들어서는 걸 발견하고 거멓게 죽은 얼굴로 물었다.

“얼마나?”

푸티가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 당장 해야 하는 것은 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로제타의 보좌관들이 손뼉을 치며 푸티를 칭찬했다.

“잘했어요! 푸티!”

푸티가 겸손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제 일인걸요.”

보좌관 중 하나가 푸티의 손을 붙잡았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푸티는 바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집무실을 나섰다. 뒤에서 로제타가 재가한 서류를 확인하던 보좌관들이 감탄사를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여기에 이런 문제점이!”

“역시 우리 폐하는 대단하십니다.”

푸티의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푸티가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로제타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이상해지긴 했지만, 로제타는 그래도 여전히 최고였다.

***

귀찮게 굴던 푸티가 사라진 뒤, 로제타는 홀로 남아 다시 거울 속 사내에게 빠져들었다.

“아.”

집에 돌아온 사내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손에 든 상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붉어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먼젓번 귀엽게 침대 위를 굴러다니는 것을 봤을 때가 떠올랐다.

무어라 말을 한 뒤, 갑자기 옷 밖으로 드러나는 모든 부위를 붉게 물들이고 침대를 이리저리 굴러다녔었다.

“귀여웠지.”

귀엽다 못해 로제타의 몸 역시 붉게 달아올랐었다. 설렘과 흥분으로.

로제타는 기대했다.

“오늘도 뭔가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걸까?”

한참을 손에 든 상자를 바라보던 사내는 상자를 들고 그가 항상 음식을 먹던 곳으로 향했다.

무언가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늘 걱정이 되었는데 저 이상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건 음식인 모양이었다.

“오늘은 제대로 된 걸 먹는 건가?”

일단 상자 꼴만 놓고 보자면 보잘것없는 것일 가능성이 컸다.

“혹, 무언가를 사 먹을 돈이 없는 건가.”

안타까움이 차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사내를 더욱 빨리 만나고 싶었다.

‘만나기만 한다면 제국을 넘어 대륙의 온갖 산해진미를 그대에게 바칠 텐데.’

산해진미가 무엇인가. 그냥 로제타의 모든 것을 줄 수 있었다.

안타까움에 시야가 흐려졌다. 로제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내를 바라봤다.

그리고 로제타의 눈물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쯤, 갑자기 거울 속 사내가 울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눈물을 흘리는 사내에 로제타는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누가 너를 울렸어?’

매일 밤 너를 울게 하는 그것이?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너를 울린 건가?

사내가 우는 건 언제나 자고 있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깨어 있을 때 흐르는 눈물이라니?

새벽의 힘이 부글거리며 로제타 주변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집어삼키고 부식시키기 시작했지만, 로제타는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분노도 잠시, 사내가 너무 서럽게 울어 로제타는 이내 다시 슬퍼지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네가 울지 않게 할 수 있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로제타가 패닉에 빠져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사내는 금방 눈물을 멈추고 세수를 한 뒤, 다시 상자 앞으로 돌아왔다. 로제타는 도대체 저 상자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사내가 저렇게 망설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뒤, 상자가 열리고 상자 안에서 케이크 하나가 나왔다.

“케이크?”

사내가 먹는 음식 중 로제타가 모르는 음식이 종종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로제타도 아는 것이었다.

“왜 저걸 보고 울었지?”

로제타가 고민하는 사이 사내가 케이크에 무언가를 꽂았다.

“저건 또 뭐야?”

불을 붙인 것이 초라는 걸 알겠다. 그럼 그 옆에 있는 커다란 저것은?

“글자인가?”

로제타가 모르는 저쪽 세상의 글자인 것 같았다. 로제타는 그 글자를 잘 기억해 두었다.

사내와 직접 만나게 됐을 때 그에게 왜 오늘 이리 서럽게 울었는지, 이 글자가 무엇인지 물어볼 셈이었다.

만약 그걸 물었을 때 또 운다면, 그때는 로제타가 그를 달래주면 되는 것이다.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핥아주고 온 얼굴에 키스를 해줘야지.’

그럼 또 그렇게 예쁘게 붉어진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봐 줄지도 몰랐다. 아니면 환하게 웃어줄지도 몰랐고.

로제타는 그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들을 무시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사이 사내의 손에 이상한 게 들렸다. 로제타는 다른 생각을 지우고 다시 사내에게 집중했다. 사내는 손에 들린 물건을 그의 머리에 올렸다.

“모자? 귀엽긴 한데 저런 걸 쓰는 건가?”

화려한 무늬의 종이로 된 것 같은 모자의 끝에는 동그랗게 생긴 반짝이는 무언가가 달려있었다.

사내는 무엇을 해도 예뻤으니 그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썼어도 여전히 예뻤다. 사실 붉어질 대로 붉어진 그 볼에 더 시선이 간 것 같기도 했지만 아무튼 매우 예뻤다.

로제타가 사내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는데, 사내가 짙은 한숨을 내뱉더니 늘 들고 다니는 조그만 물건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뭐지?’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조그만 물건에 대고 포즈를 취했다.

조금 수치스러워하는 것처럼 몇 번이나 꼼지락거리던 사내가 이내 다시 모자를 벗었다.

조그만 물체 안에 사내의 모습이 생겼다.

“그림?”

참 신기한 기계였다. 사내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조금 전 사내의 모습이 조그만 물건에 담겼다. 그림이 저렇게 많이 담기다니!

탐욕 섞인 시선으로 그 기계를 바라보던 로제타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보이는 사내를 바라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잠시 뒤, 다시 방으로 돌아온 푸티가 깜짝 놀라 엉망이 된 그의 주변을 가리키며 무어라 잔소리하며 귀찮게 굴었으나 로제타는 그런 푸티를 가볍게 무시했다.

***

서호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천장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봤다. 눈은 점점 더 생기를 더해가더니, 푸른색이 더 선명해졌다.

투명하고 청량해 보이는 눈이라니. 저번에도 느꼈지만 이 외국 귀신은 눈이 매우 예뻤던 모양이다.

서호가 작게 웃으며 눈에게 인사했다.

“안녕.”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적당히 아침을 먹고 밖에 나갈 참이었다. 먹을 게 뭐가 있나 고민하며 냉장고를 여니 커다란 케이크 상자가 보였다. 서호는 곤란한 얼굴로 상자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한 조각이 남은 케이크.

아침부터 케이크라니. 조금 그런가 싶었지만 딱히 당기는 게 없었다.

서호는 냉장고에서 꺼낸 흰 우유와 함께 남은 케이크를 깔끔히 처리했다. 마지막 한입을 먹고 있자니 오유리에게 보낸 사진이 떠올랐다.

‘부끄러워.’

일주일 전, 조금 울었다가 눈가의 붉은 기를 없애려고 부산을 떨었다. 그리고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인 뒤, 망설이다 고깔모자를 썼다.

어떻게 찍어야 괜찮은 사진이 찍힐까 고민하다 어색하게 찍힌 사진 몇 장. 그중 가장 무난한 것을 골라 오유리에게 사진을 보내고 나니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민폐지.’

사진을 받고 난 뒤, 오유리가 호들갑을 떨며 그를 놀리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험 기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딱히 놀릴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랬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덕분에 부끄러움은 많이 가셨다.

‘그래도 다시는 쓸 일이 없을 거야.’

식탁 위 한쪽에 자리한 고깔모자를 노려보듯 바라보던 서호는 시간을 확인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은 부모님의 납골당에 다녀올 참이었다.

부모님 두 분은 신기하게도 생일이 같았다. 생일이 같은 걸 알게 되어 서로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사귀고 있더라고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도 사이가 좋던 부모님은 죽는 것도 함께였다. 서호는 조금 힘들었으나 부모님에게는 나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덜 무서웠겠지.’

서호는 어깨를 으쓱인 뒤 적당히 단정한 복장의 옷을 입고 미리 만들어뒀던 미역국을 데웠다.

전날, 인터넷을 뒤져가며 어떻게든 만든 미역국은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서호는 미역국을 보온병에 담고 지갑을 챙겨 집을 나섰다. 케이크를 사고 버스 시간을 맞추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납골당은 집에서 조금 거리가 있었기에 서호는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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