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말도 안 되는 감정인데 이쯤 되니 맨날 울기만 하는 귀신이 조금 불쌍하기까지 했다. 서호가 이 세상을 떠나는 걸로 더 이상 그렇게 울지 않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을 정도였다.
물론 서호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서호는 쓰게 웃었다.
“왜 계속 그렇게 우는지 모르겠어.”
이 정도 울었으면 원한이든 슬픔이든 가실 때가 되지 않았을까? 서호는 매일 밤 그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가 사라지는 걸 상상해 봤다.
내일부터 갑자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어떨까?
서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제 네가 익숙해져서 사라지면 조금 서운할 것 같기도 해.”
처음에는 겁이 났다. 그다음에는 넌덜머리가 났고 조금 익숙해지자 적당히 무시했다.
그런데 그 울음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자 이제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았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가 봐.’
친구도 뭣도 없이 그냥 집만을 지키며 홀로 가라앉다가 갑자기 오유리라는 대화할 만한 상대가 생겨서일까.
‘외로워.’
어설프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생기니까 오히려 사람이 더 그리워진 것도 같았다.
혼자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벽에 그려진 눈에게 말을 걸다니.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호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네가 사라지면 또다시 이 집에는 나 혼자잖아?”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의 정신머리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린 서호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신일지도 모르는 너한테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미쳤나 봐.”
서호가 작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그림을 쳐다보던 서호의 몸이 굳었다.
그림이…. 변했다.
서호가 다시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며 그림에 손을 뻗었다.
“푸른색….”
눈동자에 색이 생겼다. 아주 조금이지만 푸른빛이 도는 것이다.
“왜 갑자기 색이 변했지?”
손으로 벽을 매만져 봤지만, 손에 묻어나는 것은 없었다. 푸른빛을 눈에 담던 서호가 멍청하게 물었다.
“정말 눈이 파란색이야?”
푸른 눈이라니, 그렇다면 이 귀신은 한국인이 아니었단 말인가? 엄청난 깨달음에 서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외국인이었어?”
서호는 고민에 빠졌다. 귀신이 외국 사람이라니 곤란했다. 서호가 눈을 향해 물었다.
“그럼 내 말 못 알아들었어?”
물론 눈에서 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영어로 해야 하나? 아, 나 영어 잘 못하는데.”
한참을 머뭇거리며 벽의 눈을 바라보던 서호가 아무도 없는 방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헬로?”
답 없는 벽과 사람 없는 방에 낮게 울려 퍼진 목소리에 서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서호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를 굴렀다.
한참을 침대 위를 굴러다니던 서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으니 잠시 나가서 바람을 쐬어야 할 것 같았다. 서호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
부끄럽게 침대를 구른 날로부터 보름이 흐른, 해 지는 오후.
“서호야!”
서호는 그를 부르는 오유리의 목소리에 그녀에게로 다가가며 물었다.
“시험 기간이라고 안 했어?”
분명 오유리는 이번 주 내내 시험 기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금 전 평소 자주 보던 카페 앞으로 나와 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급하게 나왔는데 오유리의 얼굴은 매우 밝았다.
서호의 물음에 오유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내일도 시험 있어.”
1학기를 마무리하는 시험에 오유리가 꽤 압박감을 느낀다는 걸 서호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어째서 그를 찾아온 걸까.
“왜 여길 왔어? 너희 집 여기서 멀잖아.”
그러자 오유리가 몸을 돌려 그녀의 몸에 가려 있던 상자를 서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거 주려고.”
종종 본적이 있던 상자였다. 그러니까 케이크 상자.
“케이크?”
오유리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네 생일이더라?”
“오늘이?”
서호는 휴대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정말 오늘은 서호의 생일이었다.
“아. 그렇네?”
조금 맹한 서호의 반응에 오유리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뭐야. 본인 생일도 모르고. 오늘 미역국 안 먹었어?”
서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응.”
생일을 그다지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다. 집에서도 생일이라고 특별히 뭘 하는 편도 아니었고.
그래도 생일날 아침에는 늘 미역국을 먹었다.
미역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는 그래도 서호와 아버지의 생일만 되면 미역국을 끓이곤 했다. 그래서 서호는 생일이라는 걸 잊어버려도 아침 식사 때 상에 미역국이 오르면 오늘이 그의 생일이었다는 걸 깨닫곤 했다.
서호가 케이크 상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오유리가 말했다.
“에이, 너희 집도 생일 안 챙기는구나? 우리 집도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생일 선물로 케이크 사주는 게 좋더라.”
오유리가 상자를 서호에게 조금 더 들이밀며 말했다.
“빨리 받아.”
서호는 머뭇거리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고마워.”
오유리가 서호가 들고 있는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니까 너 초코케이크 좋아하는 것 같아서 샀는데, 괜찮아?”
“응?”
서호가 놀라자 오유리가 당황하며 물었다.
“카페 갈 때마다 케이크 시키면 항상 그런 거잖아?”
서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서호는 오유리가 무슨 종류의 케이크를 시키는지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잘 먹을게.”
오유리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더니 케이크와 같은 브랜드 로고가 그려진 작은 쇼핑백을 하나 건네줬다.
“그리고 이거.”
무심결에 쇼핑백의 안을 살펴본 서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웬 고깔모자?”
고깔모자라니. 이 나이를 먹고 고깔모자를 선물로 받을 줄 몰랐다. 오유리가 단호한 눈으로 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우면 그거 머리에 쓰고 케이크 불 켠 다음에 사진 찍어서 보내주는 거다?”
“응?”
서호가 당황하는데 오유리가 손을 흔들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해줘야 해? 나 이제 간다.”
선물을 건네주자마자 돌아가려는 오유리에 놀란 서호가 물었다.
“갈 거야?”
“내일 시험 있다니까? 갈게.”
서호는 멀어지는 오유리의 뒷모습에 인사했다.
“…잘 가, 유리야.”
딱히 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는데 오유리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답했다.
“그래. 시험 끝나고 보자.”
“응.”
오유리가 멀어지고 홀로 남은 서호는 그의 품에 있는 케이크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거,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건데.”
미역국을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였기에 서호와 아버지는 늘 어머니의 생일이 되면 케이크를 사 오곤 했다.
어떤 날은 서호가, 또 어떤 날은 아버지가 케이크를 사 왔지만 두 사람이 사 오는 케이크는 항상 초콜릿이 들어 있는 케이크였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케이크였으니까. 사실 서호는 초콜릿 케이크를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의식하지도 못하고 계속 사 먹었나 보다.’
서호는 쓰게 웃으며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늦은 밤, 오유리는 케이크에 불을 켜고 머리에 고깔모자를 쓴 채 어색하게 웃고 있는 서호의 사진을 받았다.
사진 속 서호의 눈가가 살짝 붉은 것도 같았다.
***
로제타는 온종일 사내를 관찰했다. 사내의 일상을 전부 보여주는 거울 덕에 이제 로제타는 언제나 그를 볼 수 있게 됐다.
사내는 잠을 자는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깨어 있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안타까운 점은 사내가 밖으로 나가면 그를 지켜볼 수 없다는 부분이었다. 아직 로제타에게 허락된 공간은 저 조그만 집뿐이었다.
로제타는 사내가 또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안타깝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그때 옆에서 로제타를 관찰하고 있던 푸티가 눈치 좋게 로제타에게 서류를 들이밀었다.
“이제 그분께서 보이지 않으시죠?”
로제타는 가라앉은 얼굴로 푸티를 바라봤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번에 쓸모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능력 있는 시종이 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우선 로제타와 관련된 헛소문을 없애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트린 주범들을 찾고 있었으며, 또 다른 헛소문이 생기지 않도록 로제타가 본인의 일에 충실할 수 있게 노력했다.
물론 로제타는 하루 대부분을 거울 속 사내를 보는 데 사용했지만 그래도 종종 이렇게 사내가 외출을 할 때는 아쉽다는 듯 아련하게 거울을 바라보곤 했다.
푸티는 그 틈을 노렸다. 푸티가 다시 한번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급한 일은 빨리 처리하셔야 훗날 그분께서 이곳에 오셨을 때 함께하실 시간이 많으실 겁니다.”
푸티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자기 일에 충실한 사내야말로 멋있는 사내의 표본이죠.”
로제타가 코웃음을 쳤다.
“유치한 소리군.”
푸티가 조심스럽게 로제타를 책상 앞으로 밀면서 말했다.
“물론 폐하께서는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지만, 업무까지 탁월하게 해내신다면 그분은 분명 더 폐하께 빠져드실 겁니다.”
로제타가 푸티가 꺼내주는 의자에 앉으며 답했다.
“내가 그런 말에 넘어갈 것 같나?”
잘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