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9화 (9/155)

#9

정말 신녀를 데려와야 할 것 같은 상황에 푸티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푸티가 서둘러 방금 들은 이야기를 로제타에게 전했다.

“하지만 폐하. 요 근래 사용인들이 감히 신녀와 폐하를 불경스럽게 엮으려고 합니다.”

로제타가 오늘 푸티가 방으로 들어온 뒤, 처음으로 거울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푸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지?”

“폐하와 신녀가 연인 관계가 아니냐고 묻지 않습니까. 제게 물어올 정도면 이미 퍼질 대로 퍼진 헛소문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뭐라고 했지?”

푸티가 당연하다는 듯 외쳤다.

“절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게 다야?”

칭찬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로제타의 반응이 차가웠다. 푸티가 안절부절못하며 되물었다.

“네?”

“내게는 더 아름답고 멋있고, 사랑스러운 데다가 귀엽기까지 한 상대가 있다고 알려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네?”

푸티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로제타가 혀를 찼다.

“정말 쓸모없군. 나가 봐.”

푸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쓸모가 없다니?

“쓸모없어….”

푸티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

안겔은 웃음기가 맴도는 얼굴로 그녀를 맞이하는 로제타에 식당으로 들어오다 자리에 멈춰 섰다. 안겔이 굳어버리자 로제타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러지?”

그 물음에 안겔의 몸에 다시 소름이 돋았다.

분명 저번의 만남은 최악이었다. 그래서 최근 일부러 만남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런데 로제타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로제타가 먼저 안겔을 부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언제나 아쉬운 것 없던 로제타가 안겔을 부를 이유라고 해봐야 거울 속 존재뿐이었으니 당연히 거울과 연관이 있는 일이라는 짐작은 했다.

‘하지만 이런 환한 얼굴일 거라고는….’

안겔을 죽일 듯 노려보며 새벽의 힘을 이용해 그녀를 압박하고, 거울에 대한 정보를 캐물으며 언제 거울 속 사람을 만날 수 있냐며 윽박지를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

안겔은 로제타가 더 안달하기를 원했고 괴로워하기를 원했다. 혼자만의 사랑에 아프고 슬퍼하며 아버지를 향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길 바랐다.

그가 아무리 그녀를 협박하고 새벽의 힘으로 그녀를 괴롭혀도 절대 이 이상 정보를 알려주지 않겠다 다짐을 했건만 지금 로제타의 얼굴은 뭐란 말인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잖아.’

환하게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풍겨오는 분위기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솔솔 부는 봄바람 같았다.

‘뭐지? 미친 건가?’

안겔이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쓰고 있는데 로제타가 다시 한번 안겔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앞에 앉게. 내가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설명해 줘야 하나?”

언제나 안겔을 열받게 하던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에 그제야 안겔은 되레 안도했다. 저따위 기분 나쁜 말투에 안도하는 스스로도 짜증 났지만 그래도 황제가 완전히 미쳐버린 것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안겔이 자리에 앉자 로제타가 곧바로 말을 시작했다.

“내가 너무 갑자기 그대를 불렀나?”

“아닙니다, 폐하.”

예의를 차린 답이었다. 하지만 역시 로제타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 그런데 왜 이렇게 늦었지?”

목소리는 밝았으나 말투는 여전히 기분 나빴다. 안겔은 이쪽도 일정이 있다고 외치려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요즘 내가 기분이 매우 좋네.”

안겔이 다시 고개를 들고 로제타를 바라봤다.

“네?”

비꼬는 건가 싶었는데 정말 로제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안겔이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로제타가 자랑하듯 말했다.

“드디어 그의 모든 일상을 볼 수 있게 됐거든.”

안겔은 정말 놀랐다.

“정말입니까?”

로제타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의 하루를 모두 지켜볼 수 있다니 참 행복하군.”

딱히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던 안겔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러시군요.”

어정쩡한 안겔의 답에도 로제타는 여유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앞으로 얼마나 남은 것 같나?”

답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답이 늦어질수록 잔잔하게 가라앉는 눈빛에 안겔은 날짜를 가늠해 봤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길면 한 달 정도는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아직도 그만큼이나 남은 건가?”

“…네. 그래도 연결이 계속되어 있으니 점점 더 서로를 선명하게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쪽도?”

“네.”

“그렇군.”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던 로제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막 식사가 들어오고 있던 참이었다.

안겔이 어리둥절해 로제타에게 물었다.

“왜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가려고.”

“어디를 가십니까?”

그러자 로제타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를 보러 가야지. 그대는 마저 식사를 들게.”

로제타가 안겔의 답을 듣지도 않고 서둘러 식당을 떠났다. 자리에 음식을 내려놓던 사용인들이 안겔의 눈치를 살폈다.

안겔은 그런 사용인들에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할 기분이 아니었다. 황제의 초대로 기껏 황실까지 찾아왔는데 이 넓은 식당에 홀로 남겨졌다.

‘하.’

황제와의 만남은 대체로 항상 황제가 이렇게 먼저 자리를 뜨면서 끝나곤 했지만, 오늘만큼 기분이 이상했던 적은 없었다.

‘뭐가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거지?’

로제타가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언제나 저렇게 무례한 자였다.

오늘이라고 특별히 더 무례하거나 덜 무례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걸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황실을 떠나기 위해 마차에 올라타려던 안겔이 자리에 멈춰 섰다.

‘아. 그래서….’

황제는 오늘 안겔과의 대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안겔은 오늘 황제가 기분이 좋아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것이다.

본래 로제타와 안겔은 대화를 하고 난 뒤 쌍방 모두가 기분이 나빴다.

서로의 기분을 거지같이 만들어주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말싸움은 안겔이 지곤 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더 기분이 나빠지냐는 정도의 문제이지 두 사람 모두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똑같았다.

그런데 오늘 황제는 대화 내내 행복해했다. 오로지 안겔만 기분이 상한 것이다. 그걸 깨닫자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애초에 안겔은 황제의 못마땅한 성격을 다스리고 아버지의 명성에 폐가 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로제타에게 거울을 줬다.

‘아니, 다 핑계지.’

안겔은 황제가 안달복달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너무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다 못해 행복이 넘쳐흐른다.

‘황제 좋은 일을 해준 것 같은데.’

하지만 안겔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기분이 좋은 것은 잠깐이었다. 과거의 기록을 보지 않았는가.

‘황제에게 말해주지 않은 과거의 기록.’

거울을 통해 이쪽으로 넘어온 이방인들의 결말은 항상 불행했다.

그들은 늘 본래 세상을 그리워했고 그곳에 남겨두고 온 이들을 떠올렸으며 온전히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상대 때문에 언제나 반대쪽은 상처를 받곤 했다. 거울을 통해 상대를 이쪽 세상으로 데려오는 이들은 운명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집착이 강했기에 거울을 이용해 상대를 이곳에 붙잡을 수 있었지만 그렇기에 운명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설령 상대가 이 세상에 잘 적응한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 지금을 즐기게 두자.’

안겔이 원하는 것은 짧은 고통이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질기고 긴 고통이었다.

너무 소중해서 손안에 품고 있어 봐야 고통만 유발하지만 그렇다고 놓아버릴 수도 없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할 고통.

안겔은 그런 미래를 생각하며 만족스레 웃었다.

***

요즘 서호는 오유리와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다시 활기를 찾고 있었다.

‘인간관계라는 게 신기하네.’

예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일에 이렇게까지 사람이 밝아질 수 있는 게 신기했다. 메시지를 주고받던 오유리가 수업이 시작됐다고 알리자 서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봤다. 벽의 눈은 저번에 눈물을 흘린 이후 점점 더 실제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꼭 원망을 담아 서호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나를 왜 원망하지?”

착각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서호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하긴 나를 죽이려고 기다리는 모양인데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게 이상하겠다.”

서호는 조금 더 벽에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너는 누구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여유도 생기는 모양이었다. 서호는 지금 스스로의 모습이 매우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계속 눈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어?”

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오히려 질문은 더 쉽게 나왔다.

“왜 나를 쳐다보고 있어?”

귀신이 현실에 영향을 끼칠 정도면 엄청난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지금 뭘 하는 건데?”

따진다기보다는 그냥 말 그대로 궁금한 것을 묻고 있는 거였다.

“왜 매일 울어? 왜 그렇게 슬퍼해?”

그렇게 쉬지 않고 울 수 있는 게 신기했다. 귀신은 잠도 자지 않는 걸까.

“나를 데리고 가고 나면 이제 슬퍼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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