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것도 읽어 봤어?”
서호의 물음에 오유리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하지. 추리 소설 좀 읽는다는 사람은 다 좋아하는 작가잖아.”
한참 책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오유리가 다시 서호에게 책을 넘겨주며 말했다.
“나, 이거 범인 누군지 아는데.”
서호가 조금 단호하게 말했다.
“이야기하지 마.”
서호의 반응에 오유리의 미소가 짙어졌다.
“왜? 말하고 싶은데?”
“안 돼.”
“그게 범인이 누구냐면….”
“야!”
그 뒤로 얼마나 더 대화를 나눴을까. 창밖으로 보이는 햇빛이 붉게 물들었을 때쯤 오유리가 자리를 정리했다.
“오랜만에 재밌었다. 옛날 친구를 만나면 할 말도 많아서 좋아.”
확실히 오유리의 얼굴은 처음보다 좋아 보였다.
“뭐, 너랑 나랑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었지만. 그래도 나쁘지도 않았잖아?”
동의를 구하듯 묻는 그녀에 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서호 역시 오늘의 만남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물건을 살 때 인사를 주고받고 바깥에서 노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떤 건지 까먹고 있었다. 오랜만에 누군가와 웃으며 대화를 나눈 건 서호에게 무언가 다른 활력을 줬다.
오유리가 서호에게 물었다.
“번호 그대로야?”
“응. 그대로야.”
“그럼 종종 이렇게 보자.”
서호는 흔쾌히 답했다.
“그래. 유리야.”
오유리의 얼굴이 더 밝아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유리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변화가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카페를 나온 서호는 멀어지는 유리의 등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다음에 보자.”
유리와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가던 서호가 방향을 바꿨다. 오늘은 바로 집에 가는 대신 다른 곳에 들르고 싶었다.
“영화를 볼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서호는 휴대폰을 꺼내 요즘 상영하고 있는 영화 중 적당한 것이 있는지 찾았다.
***
로제타의 방을 정리하던 푸티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자리에 멈춰 섰다.
‘잘못 들었나?’
푸티가 귀를 의심하는데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푸티.”
착각이 아니었다. 로제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푸티가 재빨리 로제타에게로 다가가 답했다.
“네? 부르셨습니까?”
로제타가 푸티를 쳐다보지도 않고 거울을 응시한 채 애절하게 말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는 거지?”
“거울 속 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푸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오늘도 거울 속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늘은 조금 늦게 주무시는가 봅니다.”
“어째서?”
그렇게 묻는다면 해줄 말이 없었다.
“…글쎄요.”
“너무해.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 사내가 로제타가 이렇게 기다리는 걸 알게 되면 소름 끼쳐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푸티는 애써 그 말을 삼켰다.
한참 사내가 보고 싶다 속삭이던 로제타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명령했다.
“신녀와 약속을 잡아. 벌써 한 달이 더 지났는데 어째서 변한 게 없는지 알아봐야겠어.”
푸티는 안겔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답했다.
“아직 한 달이 남았는데요.”
신녀 안겔은 분명 한 달에서 두 달이라고 했었다. 더군다나 안겔이 찾아오기 전에 로제타가 먼저 약속을 잡다니, 그건 마치 로제타가 안겔에게 지고 들어가는 것 같지 않은가.
로제타의 권력은 곧 푸티의 권력. 푸티는 로제타를 말렸다.
“조금 더 기다리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러자 여태껏 푸티를 쳐다보지도 않던 로제타가 화려하지만 뾰족하게 날이 선 눈으로 그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지금 내게 충고한 건가?”
푸티는 그 눈이 더 냉랭해지기 전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푸티가 방을 나서는데 뒤에서 로제타가 앓는 소리를 냈다.
“보고 싶어…. 흐윽.”
푸티는 진절머리를 내며 로제타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혹여 다른 이들이 로제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꼼꼼히 문을 닫았다.
푸티는 씩씩거리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 짓도 빨리 끝났으면.’
로제타가 그리 외치는 사랑이든, 운명이든 뭐가 돼도 상관없으니 푸티는 이제 그 거울 속 존재가 빨리 로제타의 앞에 나타났으면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로제타의 변화를 더 이상 숨기기 어려워질지도 몰랐다. 안겔에게 편지를 보내러 가는 푸티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
푸티는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전, 로제타의 명령으로 그는 안겔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안겔에게 오늘 찾아오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폐하가 부르시면 즉각 달려와야지. 이틀이나 걸려?’
로제타가 본래의 로제타였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푸티는 분해 죽을 것 같았다.
‘우리 폐하께서 부르셨는데!’
이게 다 그 신녀가 거울을 믿고 기고만장해진 탓이었다. 한참 속으로 안겔에 대한 욕을 내뱉으며 로제타의 방으로 향하던 푸티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저기, 푸티?”
푸티는 재빨리 대화를 차단했다.
“바빠.”
분명 요즘 이상해진 로제타의 행동에 대한 걸 캐내려고 할 게 뻔했다. 하지만 사용인은 그 정도로 물러나지 않았다.
“바쁘긴요, 요즘 폐하는 일도 그리 열심히 하지 않으시고, 알현도 받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물론 요즘 로제타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모든 일을 뒤로 미뤄두고 있긴 했다.
‘그래도 꼭 해야 할 건 하시거든?’
더군다나 로제타에게는 그가 뽑은 충실한 신하들이 넘쳐났다. 푸티가 그렇듯 로제타의 재능 있는 신하들은 황제가 없어도 훌륭히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인재를 뽑으시는 것도 다 폐하의 능력!’
푸티가 무섭게 사용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온 거지? 오늘도 바쁘셔. 신녀가 오기로 했어.”
신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용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푸티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사용인이 의미심장한 눈을 하고 푸티를 바라보며 물었다.
“요즘 신녀를 너무 자주 만나시는 거 아닙니까?”
“뭐?”
푸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이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한 번에 짐작했다. 푸티가 그 입을 다물라는 눈빛을 마구 보내고 있는데 기어이 사용인의 입이 열렸다.
“혹시 폐하와 신녀가….”
푸티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외쳤다.
“아니야!”
좋게 말하면 사람 좋고 귀여운 인상을 줬고, 나쁘게 말하면 축 처진 눈과 허여멀건 피부 때문에 만만해 보이는 푸티가 전에 없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정색을 하자 말을 걸었던 사용인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여, 역시 그렇죠? 그건 좀 오해인 것 같습니다.”
푸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더 듣기 전에 사용인을 쫓아내기로 했다.
“빨리 가서 일이나 해!”
“알았어요, 알았어. 갑니다.”
사용인을 돌려보낸 푸티가 서둘러 로제타의 방으로 향했다. 이러다가는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이 돌 것 같았다.
‘신녀와 폐하라니! 절대 안 될 말이지.’
푸티는 신녀가 싫었다. 왜? 로제타가 신녀를 싫어했으니까!
푸티는 충실하고 신의 있는 시종이었다. 로제타가 신녀를 싫어하니 푸티 역시 신녀가 싫었다. 그러니 신녀는 절대 완벽하고 대단하신 폐하와 엮일 수 없었다.
푸티가 조금 무례하게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거울 앞에 서 있는 로제타에게로 달려가듯 다가갔다.
“폐하!”
“…….”
로제타는 당연하게도 답이 없었다. 푸티가 답답한 마음에 하소연하듯 말했다.
“바깥에서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 돌고 있어요!”
“…보여.”
로제타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푸티는 그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거울 속 사내에 관한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푸티가 말했다.
“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바깥에서 말도 안 되는 소문이…!”
그때 로제타가 여전히 거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만 뻗어 푸티의 손목을 잡아챘다.
“푸티.”
푸티가 화들짝 놀라 답했다.
“네?”
푸티는 로제타가 이끄는 대로 그의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 확실하게 로제타의 얼굴을 눈에 담고 경악했다.
로제타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맙소사. 딱히 보고 싶지 않던 광경이었다.
푸티가 시선을 다급히 바닥으로 고정하며 품속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려는데 로제타가 말했다.
“계속 보여.”
푸티가 손수건을 찾던 행동을 멈추고 로제타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자고 있을 때만이 아니라 이제 모든 일상을 볼 수 있어.”
푸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네? 정말요?”
“그래.”
로제타의 얼굴이 전에 없이 밝았다. 이제 와 보니 로제타가 흘리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푸티는 크게 안도했다. 거울 속 존재와 진전이 생기지 않았는가.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던 스토커에서 일상 전반을 지켜보는 스토커로 변한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로제타가 기뻐한다면 충실한 시종인 푸티 역시 기뻤다.
‘폐하의 행복은 내 행복!’
또 마침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지 않았던가. 거울 속 존재와의 결합이 더 강해졌으니 로제타는 이제 안겔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푸티가 기뻐하며 물었다.
“그럼 신녀를 만나지 않아도 괜찮으신 거죠?”
하지만 푸티의 바람과는 달리 로제타는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 그래도 불러와야지.”
“네?”
푸티가 재빨리 그를 말리려는데 로제타가 물었다.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약속은 잡았나?”
“오늘 오신다고 하셨는데….”
“그래. 그럼 오면 이야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