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폐하?!”
로제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달려오는 로제타에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로제타는 그들을 휙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도 제대로 닫지 않은 로제타는 곧바로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물론 방금 달리기로 박동이 빨라진 것이 아니라 사내를 만날 생각에 설레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놓치지 않았네.’
거울은 로제타만을 비추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가구도, 주변 풍경도 그 어떤 것도 비추지 않고 오로지 로제타만을 비추는 거울.
‘다른 이의 눈에는 나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만.’
이 거울에 보이는 것은 로제타와 사내, 그리고 사내의 집으로 추정되는 장소뿐이었다.
로제타는 사내가 얼른 나타나길 바라며 계속해서 거울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흔히 꿀 같은 금발이라 칭하는 짧은 곱슬머리와 맑고 깨끗한 호수 같다고 칭하는 투명한 푸른 눈을 지닌 남자가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채 기대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얼굴을 좋아해 줄까?’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다른 이들이 늘 칭송하는 얼굴이니 객관적으로도 못난 얼굴은 아닐 것이다.
밖에서 병사들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로제타의 모습을 보며 수군덕거리고 있었지만 그건 로제타가 알 바가 아니었다.
로제타는 그저 일 초라도 빨리 사내가 거울 속에 나타나길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뒤늦게 헥헥거리며 복도에 들어선 푸티가 그런 병사들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넘어질 듯 빠르게 뛰어와 방문을 닫고 외쳤다.
“모두 잘리고 싶으신 겁니까? 감히 폐하의 방 안을 들여다보다니요!”
그러자 병사들이 재빨리 변명을 시작했다.
“그, 그것이…. 폐하께서 빠르게 달려오시기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푸티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에 힘을 줬다.
“무슨 일이 있기는요! 폐하는 평소와 같으십니다!”
푸티가 거센 반응에 병사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방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아름다워!”
푸티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발끝으로 떨어졌다. 푸티가 들었다면 병사들도 들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로제타의 감탄 섞인 목소리에 병사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푸티가 눈을 부라리며 그런 병사들을 밀어냈다.
“폐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얼른 자리로 돌아가세요. 폐하께서는 방에 계실 때 저 외에 다른 이가 방 앞에 있는 걸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방금 폐하께서….”
“정녕 화를 당하셔야만 자리로 가시겠습니까?!”
푸티가 진심으로 화를 내자 병사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방 앞을 떠났다. 물론 떠나는 그들은 자기들끼리 로제타의 나르시시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푸티는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트렸다. 신녀 안겔에게 한 방을 먹인 것은 좋았는데 끝이 별로였다.
‘내 직장…. 내 권력!’
푸티는 불경스럽게도 원망을 담아 로제타의 방문을 노려봤다.
***
또다시 울음소리가 들렸다. 거의 두 달 가까이 계속된 울음소리가 이쯤이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소리에 담긴 감정 때문인지 서호는 그 울음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왜 이렇게 슬프게 울까?’
끔뻑거리며 눈을 뜨자 벽이 보였다. 오늘은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잔 모양이었다.
서호는 잠기운이 가득한 눈으로 벽에 그려진 눈을 바라봤다. 꼭 실제로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았다.
‘움직인 것 같기도 하고.’
평소보다 생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서호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 헛웃음을 흘리며 눈을 끔뻑거렸다. 다행히 오늘은 울음소리가 빨리 멈췄다.
서호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서호는 하품하며 걸음을 옮겼다. 잠이 부족한 걸 낮잠을 통해 어떻게든 채워 보려고 했지만, 쪽잠을 자는 것만으로 피로를 모두 풀 수는 없었다.
‘뻐근해.’
목을 이리저리 돌리던 서호는 제대로 자지 못하고 낮잠이 길어진 탓에 요즘 밖에 나간 적이 없는 것 같아 오랜만에 책 한 권을 들고 집 앞 카페를 찾았다.
차가운 아메리카노와 케이크를 시킨 서호는 카페의 2층 창가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책을 한 장 넘겼다. 유명한 추리 소설을 읽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서호야?”
한참 집중해 책을 보던 서호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파마한 긴 머리가 허리께까지 흘러내린 여자였다.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는 서호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서호 맞구나? 오랜만이야!”
서호는 당황했다. 정말 미안하게도 서호는 이 여자가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데다가 그를 아는 걸 보면 학교 사람은 분명한데 그 이상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서호가 머뭇거리며 인사를 받았다.
“아, 안녕. 그….”
서호가 말끝을 흐리자 여자가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나 기억 못 하는구나?”
“미안.”
“아니야. 많이 바뀌긴 했지. 중간에 전학 가기도 했고. 나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반장 오유리.”
서호는 기억 속 반장을 떠올렸다. 앞머리 없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다니던 조용한 여자애.
서호가 깜짝 놀라 눈앞의 여자를 다시 봤다.
“오유리?”
너무 이미지가 달랐다. 이목구비 자체는 변함이 없는데 머리 스타일이 바뀌어서일까. 그게 아니면 너무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활기참 때문일까.
이름을 들어도 기억 속의 모습과 매칭이 잘 안 됐다. 놀란 서호의 반응에 오유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같이 반장, 부반장이었는데 너무하네.”
“정말 미안.”
“됐어. 많이 변했지? 사실 오랜만에 생각나서 동네에 온 건데 여기도 많이 변했더라.”
오유리가 서호의 건너편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앉아도 돼?”
서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오유리가 자연스레 앞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 전학 가고 나서 네가 반장 일 한다고 바빴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랬다.
부반장도 딱히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니었는데 오유리가 1학기 말 갑작스레 전학 가면서 반장 일을 전부 떠맡게 되어 곤란했던 기억이 있었다.
서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기억이었다.
사실 반장이나 부반장 자리를 귀찮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부모님은 서호가 얼떨결에 반장이 된 걸 매우 기뻐했었다. 그래서 3학년 때도 반장을 한 거였고.
“맞아. 너 갑자기 전학 가서 내가 결국 반장 일 했지.”
오유리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사과했다.
“갑자기 전학이 결정돼서. 미안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다 옛날 일이고.”
“그래서 요즘 뭐 하고 지내? 학교 다니니?”
서호는 적당히 답했다. 서호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그와 친했던 친구만이 알고 있었고 굳이 오유리에게 부모님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휴학했어.”
오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벌써?”
서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쩌다 보니.”
오유리는 놀란 것 같았으나 그래도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본인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그렇구나. 나는 오늘 공강이거든. 고등학교 때는 그렇게 시간이 없었는데 대학생이 되니까 시간이 남아돈다니까? 술 마시는 것도 질려서 고민하다가 결국 여기까지 왔지.”
그러고 보니 오유리의 커다란 가방에는 두꺼운 책이 삐죽 삐져나와 있었다. 서호가 그 책을 힐끗 바라보자 오유리가 전공 책이라고 말을 덧붙였다.
오유리는 자신의 대학 생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다가 다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가득 담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서호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너를 다 만나네. 영광이다?”
“응?”
“우리 반에 너 좋아하는 애들 엄청 많았잖아.”
“어, 그래?”
그건 처음 들어 보는 소리였다. 고백을 받아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많다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금 심심한 서호의 반응에 오유리가 재미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아무튼 너 좋아하는 애들 많아서 나도 엄청 귀찮았어.”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구나.”
“보통 남자애들이랑 다르게 다정하고, 잘생겼잖아?”
서호가 멀뚱히 오유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는 진짜 많이 변했다.”
그러자 오유리가 놀란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아까까지의 과장된 웃음을 지우고는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지. 나답지 않았지?”
“그런 건 모르겠는데. 네가 불편해 보여.”
어쩌면 불쾌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오유리는 오히려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엄청 솔직하다. 너도 좀 변했어. 분위기가 뭐랄까….”
오유리가 말을 고르듯 서호의 얼굴을 살폈다.
“우수가 넘친다고 해야 하나? 어우, 내가 말했는데 소름 돋는다.”
여전히 장난기가 섞여 있긴 했지만 아까처럼 작위적인 느낌은 없었다. 서호가 오유리를 따라 작게 웃었다.
그 뒤 대화는 여전히 친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차분하고 조용해졌다. 오유리가 서호가 알던 18살의 오유리로 돌아가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좋아진 덕이었다.
오유리가 서호가 덮어놓은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뭐야?”
그러고 보니 오유리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예전에 서로가 읽던 책을 추천해주던 것도 기억났다. 서호가 책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추리 소설인데….”
오유리는 서호가 책 제목을 말하기도 전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나도 아는 작가야.”
확 하고 밝아진 오유리가 손을 뻗어 책을 받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