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서호는 아침이 되자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정말 우습게도 무당을 찾아갔던 이후로 울음소리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랬다. 중간에 잠에서 깬다는 점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차피 데려갈 거면 빨리 좀 데려가지.’
거의 한 달 동안 잠을 깊이 자지 못하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울음소리는 밤낮없이 서호를 찾아왔다.
서호는 피곤 때문에 침침해진 눈가를 문지르며 몸을 돌려 벽을 바라봤다. 벽에 그려진 눈이 꼭 서호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서호는 손을 뻗어 눈을 매만졌다. 한 달 동안 점점 모양이 변하던 눈은 이제는 완벽한 사람의 눈 형태를 띠고 있었다.
손을 대보면 꼭 만져질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눈.
“역시 눈이 엄청 예쁘지?”
색이 있는 눈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묘처럼 검은색 일색인 눈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잠시 눈을 매만져 보던 서호는 문뜩 손에 무언가가 묻어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손에 물기가 묻어났다. 그러니까 정말 눈물처럼.
“와, 이제는 눈물까지 흘려?”
서호는 이 괴현상이 어디까지 흘러갈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이러다가 아예 벽 속에서 튀어나오려나?”
혼자 키득거리던 서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수건을 들고 와 벽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벽지가 울지도 몰랐다.
서호는 언젠가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그때까지 집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고 싶었다. 벽을 꼼꼼히 닦아내던 서호는 손에 들린 수건을 가만히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오늘은 유리창을 한번 닦아 볼까?”
기왕 수건을 손에 든 김에 대청소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로제타는 신녀 안겔과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 낭비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는?”
식사가 나오기도 전에 본론을 꺼내는 것은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로제타는 그런 걸 신경 쓰는 자가 아니었다. 신녀 안겔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너무 서두르시는 거 아닌가요?”
로제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무심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에게서는 흉흉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기운을 느낀 안겔이 흠칫 몸을 떨었다가 이내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제가 폐하께 그 거울을 드린 이유는 폐하께서 인내심이 부족하시기 때문이에요.”
안겔이 태연한 척 로제타에게 충고했다.
“아버지에게 이름을 받은 폐하께서는 응당 자애로우셔야죠.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가 곤란하시지 않겠어요?”
로제타를 자극하듯 던져진 충고에 건조하던 그의 얼굴에 귀찮다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로제타는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주제넘군.”
“네?”
로제타의 무심한 눈이 안겔의 얼굴을 훑었다.
“주제넘어. 그대는 그저 전서구일 뿐이지 않나.”
신언을 전하는 신녀에게 전서구라니! 안겔이 눈을 부릅뜨며 경고의 의미를 담아 그를 불렀다.
“폐하.”
하지만 로제타에게 안겔의 경고는 통하지 않았다. 로제타는 신이 무섭지 않았고 신을 사랑하는 안겔을 배려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로제타에게 안겔은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멋대로 해석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만큼 거슬리는 것은 없지.”
“…….”
말투는 덤덤했으나 그 뜻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안겔이 입술을 깨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로제타는 안겔이 모멸감에 떠는 것을 그저 지켜봤다.
‘시간 낭비인가?’
안겔은 그녀가 아닌 로제타가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질투했고 그녀가 정한 기준에 맞춰 로제타의 행동을 통제하려고 들었다.
로제타가 정말 신의 사랑을 받아도 되는 인물인지 재단하려 했으며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라는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하길 바랐다.
‘우스운 일이지.’
로제타는 안겔의 인정이 필요치 않았다. 신이 그를 선택했다고 해서 신의 뜻에 따라줄 생각도 없었다.
로제타에게 신과 신이 내려준 이름, 귀찮게 그에게 따라붙는 안겔은 재미는 없었지만 평온하던 삶에 끼어든 불청객에 불과했다. 그는 앞으로도 저들이 그의 삶에 관여하는 걸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 일만 아니었다면.’
로제타는 그의 말에 분노하면서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안겔에게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웃어 보였다.
“물론 이번에 그대가 벌인 일은 꽤 마음에 들어.”
처음 안겔이 그에게 거울을 선물했을 때 로제타는 어떻게 해야 안겔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갈까 고민하느라 잠시 거울을 그의 방에 두었다.
그러나 그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을 눈에 담은 순간 모든 계획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눈물.’
소년과 청년의 사이에 걸쳐 있는 것 같은, 아직은 조금 앳된 얼굴의 사내는 잠을 자면서 울고 있었다.
표정도 일그러트리지 않고 고요히 떨어져 내리는 눈물.
고요했으나 그럼에도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로제타는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흔적을 따라 눈을 돌렸다.
눈물은 쉴 새 없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누군가의 울음이 이렇게 마음에 와닿아 본 적이 있었나?’
로제타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숨소리에 옅은 열기가 맴돌았다. 흘러나온 숨처럼 로제타의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로제타는 거울 속 사내를 보던 시선을 거둬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봤다. 남이 우는 걸 보면서 흥분하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흥분한 적도 처음이었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감각을 느껴 본 일이 없었다.
로제타가 사춘기에 접어들며 몸이 빠르게 성장할 무렵 신시는 로제타에게 성교육을 하며 말했다.
‘평생 여자로 살아야 하고, 홀로 살아야 한다.’
적어도 앞으로 몇 년 이상은 누군가와 성적인 접촉은 전혀 할 수 없을 거라고도 이야기했다. 로제타가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신시의 젖은 얼굴을 닦아준 이유는 그렇게 살아도 별 상관이 없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애정을 느껴 본 일이 없었고 누군가를 보며 몸이 달아오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몸이 반응했다.
사실 몸의 반응보다도 놀라운 건 다른 것이었다. 몸의 반응이야 잠에서 깨어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었으니까.
‘몸이….’
로제타는 손을 들어 열이 오른 볼을 매만졌다. 살짝 올라가 있는 입매와 몽롱하게 풀어져 있을 눈가.
이 모든 것들은 단순한 성적 흥분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거칠게 뛰는 심장과 멍한 머리의 이유는 그간 신시가 로제타에게 누누이 말하던 그것이었다.
‘사랑.’
들어 본 적은 많으나 느껴 본 적은 없는 것. 신시가 항상 그에게 속삭이던 것. 죽기 전까지 그녀가 입에 담았던 사랑.
로제타는 처음 보는 사내에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하물며 스스로에게조차 들키지 않고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내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
눈물의 주인인 사내도 모르는 그 눈물을 자신이 볼 수 있다는 것에 큰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 이후 로제타는 사내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사내가 예전만큼 눈물을 많이 흘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웃는 일이 많아졌으니까.’
잠든 사내의 입가에 잠시 머무른 웃음을 봤을 때 로제타가 얼마나 놀랐던가.
처음에는 사내가 아닌 그의 눈물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내의 웃음은 그 모든 의혹을 불식시켰다.
사내의 웃음에 로제타는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크게 흥분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로제타는 사내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잠결에 살짝 찌푸린 눈가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무어라 웅얼거리는 말랑거릴 것 같은 입술을, 베개에 눌려 엉망이 된 검은 머리카락을.
사내의 모든 순간을 지켜볼 때마다 로제타의 마음은 더 깊어졌다.
‘갖고 싶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사내가 눈물을 흘리면 그를 안아주고 싶었고 그가 작게 웃으면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으며 모든 순간마다 그를 만지고 싶었다.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로제타는 한때 사내가 울던 것보다 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거울 너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이 두 눈으로 사내를 보고 싶었고 그를 두 손으로 직접 느껴 보고 싶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를 봐달라고. 내가 여기서 너를 지켜보고 있다고. 이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고.
‘나를 알아줘.’
로제타는 사내에게 그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그가 사내의 눈물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처럼. 사내가 이 울음을 알고 자신에게 흔들렸으면 했다.
그래서 그 모든 감정을 담아 울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안겔이 그리 말하기도 했지만, 거울 너머로 보이는 그의 방이나 복식, 얼핏 보이는 책의 표지에 적힌 글씨까지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로제타는 모든 마음을 담아 울었다.
나는 너를 볼 수 있지만 너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그러니 나를 보지 못하는 너에게 내 소리를 들어달라고 떼를 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바람이 이루어졌다는 걸 로제타는 눈치챘다. 언제부턴가 사내는 로제타가 울음을 터트리면 금방 잠에서 깨어났다. 거울에 연결이 된 탓인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눈을 깜빡였다.
물론 사내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면 연결이 끊기기 때문에 로제타는 적당한 타이밍에서 눈물을 멈춰야 했다.
‘타이밍을 맞춘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몇 번 감정을 폭발시키듯 토해냈더니 사내를 향한 마음이 자제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