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귀찮게 구는 것을 떨쳐내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지만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는 말이었고 동시에 신하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보다 아름다운 이를 찾으려고 해도 로제타는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로 손꼽혔으며, 그와 필적하는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여겨졌던 것은 그의 어머니였던 신시뿐이었다.
황제의 힘이라도 약하면 강제로나마 결혼을 강행할 텐데 로제타는 몇 세기 만에 등장한 ‘신이 사랑하는 아이’였다.
유례없이 황권은 강했고 백성들은 황제를 존경했다. 황제가 무슨 짓을 하든 귀족들과 평민들은 ‘우리 폐하니까 무슨 뜻이 있으시겠지’라며 칭송했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로제타 보레알리스. 아름답고 강한, 신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의 황제.
더군다나 위대한 황제의 기구하고 특별한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백성들을 더욱 열광하게 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훌륭히 성장한 제국의 주인.’
20여 년 전, 로제타의 어머니 신시는 로제타가 태어나자 덜컥 겁을 먹고 말았다. 황제에게는 이미 성인이 다 되어가는 장성한 후계자들이 넘치는데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후궁 중 가장 비천한 위치에 있는 신시가 낳은 사내아이라니. 아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미모만으로 황제에게 선택받아 보잘것없는 소국의 남작 영애에서 후궁이 된 그녀였다.
안 그래도 제국에서는 신시를 고깝게 보는 시선이 많았는데 사내아이라니. 나약한 그녀의 모국은 그녀와 갓 태어난 아이를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걸 신시는 알았다.
그리하여 신시는 사내아이였던 로제타를 여자아이로 키웠다. 성별을 바꾸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국에는 신시를 고깝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낳던 그녀의 옆에는 사용인들이 없었으며 신시가 직접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하자 그들은 적극적으로 유모를 붙이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로제타는 다른 형제들의 견제를 받지 않고 자라났다. 어미를 닮아 성인이 되면 엄청난 미모를 뽐내게 될 거라는 평가를 받으며 제국 제일미라고 불릴지언정 그 누구도 로제타가 남자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신시는 로제타가 평생 성별을 바꿔서 살아야 하지만, 목숨을 위해서는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평화는 잠시였다. 황제가 그의 후계자를 지목하기 위해 평소보다 성대하게 열었던 건국 무도회.
신전의 높으신 분들과 다른 왕국의 왕족들도 참석한 자리에서 신전의 인사 중 하나인 신의 대리자, 신녀 안겔이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들의 주목을 한눈에 받던 로제타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대륙의 높으신 분들이 모두 모인 그 연회장에서 신의 말씀을 전하며 로제타에게 새로운 이름을 내렸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에게 ‘오로라’의 이름을 내린다.]
신에게 받은 이름이라니!
이미 몇백 년 동안이나 끊겼던 일이었다.
과거,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제국의 황족들은 신에게 이름을 하사받곤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신에게 이름을 받은 황족들은 여러모로 역사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옛말이었다.
언제부턴가 황족들은 신에게 이름을 받지 못했고, 그렇게 몇 세기가 지나면서 그 모든 이야기는 전설로 치부되곤 했다.
그런데 몇백 년 만에 신에게 이름을 받은 자가 나타난 것이다.
신녀의 몸에서 튀어나온 중후하고 낮은 목소리.
저절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자애로운 목소리와 신녀의 몸에서부터 퍼져 나와 연회장을 가득 채우는 엄청난 신성에, 사람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신언이 시작된다는 것을 눈치챘다.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이 문뜩 신의 음성을 떠올리고는 경악했다. 아들이라니?
로제타의 진짜 성별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신에게 새벽을 뜻하는 미들 네임을 받은 로제타는 본인의 성별을 되찾고 황태자가 됐으며 신에게 이름을 받은 순간부터 생긴 강력한 지지 기반과 신력을 토대로 강한 세력을 구축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폐하를 반기진 않았지.’
로제타가 새벽이라는 뜻의 ‘오로라’라는 이름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도대체 그에게 주어진 신의 힘은 무엇일까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로제타에게 반발한 황제의 첫째 아들이자 로제타에게는 첫째 형인 1황자가 순식간에 어둠에 잡아먹히는 것을 그들이 목격한 뒤 풀리게 된다.
로제타에게 주어진 새벽은 어둡고, 칙칙하며, 모든 것을 검게 물들이는 짙은 밤에 가까웠다.
‘그걸 소멸이라고 해야 할까? 파괴라고 해야 할까?’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몰라도, 아무튼 강력한 신의 힘을 얻게 된 로제타는 그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백성에게 사랑받고, 모든 귀족에겐 공포를 준 황제가 로제타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로제타는 지난 몇 달간 그랬던 것처럼 방 안의 모든 커튼을 닫아 햇빛을 차단한 채 미친 사람같이 거울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황제만 볼 수 있는 거울 속 사내를 더 자세히 지켜보기 위해서.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금방 황제의 이상 행동을 알아차렸다. 푸티는 다시 한번 올라오는 한숨을 삼키며 거울을 핥을 듯 바라보고 있는 로제타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도대체 뭐가 보인다는 거야?’
황제가 바라보고 있는 거울은 거울이라는 이름이 아깝게 황제를 비추지도 않았다. 황제가 온종일 눈을 떼지 못하는 저 거울 속에 도대체 누가 있는 걸까.
‘뭐가 보여야 말이지.’
푸티의 눈에 비치는 것은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어느 날 얻게 된 거울과 남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빠져 거울에 집착하는 황제.
흔하디흔한 저주처럼 보였지만 푸티는 저 거울에 저주가 담겼다고 욕을 할 수도 없었다.
‘선물을 준 상대가 평범하지 않으니.’
저 거울로 말할 것 같으면 몇 달 전 신녀 안겔이 로제타에게 선물한 물건으로, 운명의 상대를 비춰준다는 오래된 고대의 유산이었으니까.
그때 거울을 선물로 넘겨주며 신녀 안겔은 말했다.
‘이 세상에는 폐하의 운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이리 흉포한 힘을 가지게 되신 거겠죠. 그 힘과 균형을 맞춰줄 운명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거울이 폐하의 운명을 찾아줄 겁니다.’
푸티는 안겔의 말을 비웃었다. 운명이니, 사랑이니, 우정이니 하는 것은 로제타가 중히 여기던 것이 아니었다.
분명 로제타 역시 처음에는 그러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무것도 비추지 않던 거울에서 잠을 자는 한 사내가 나타났다고 말한 이후 로제타는 저렇게 미친 사람같이 변했다.
물론 이런 모습을 전부 아는 것은 그의 유일한 직속 시종 푸티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저 황제가 그 자신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거울을 자주 본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지.’
자기의 아름다움에 취한 것과 보이지 않는 허구의 존재에게 취한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니까.
그때 로제타가 조금 쉬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제 나를 알아줄까?”
거울을 보며 아련한 얼굴을 하는 황제라니.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는 표정이라지만 평소의 황제를 아는 푸티는 소름이 끼쳤다.
푸티는 참다못해 조심스럽게 로제타를 불렀다.
“…폐하.”
로제타는 가볍게 푸티의 말을 무시했다. 아니, 아예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요즘 낮잠이 많아진 것 같아. 사실 나쁘지는 않아. 잠이 들어야만 볼 수 있다니 참 쓸모없지.”
푸티는 다시 한번 로제타를 불렀다.
“폐하.”
사랑에 빠진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던 로제타가 푸티를 돌아봤다.
“조용히 해.”
한순간에 감정이 씻겨져 나가 건조하다 못해 차가운 얼굴과 목소리였지만 푸티는 이대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 그것이.”
로제타는 서늘하게 날이 선 눈으로 푸티를 쳐다봤다.
“뭐지?”
푸티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신녀가 알현 요청을 해왔습니다!”
일 잘하는 시종 푸티는 신녀라는 이름에 황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았다. 그래서 중한 일이 아니라면 방에 들어와도 말을 걸지 말라는 황제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그에게 직접 말을 건 것이다.
다행히 황제는 푸티의 예상대로 화를 내지 않았다.
“신녀가?”
잠시 고민하던 로제타가 물었다.
“나도 물어볼 게 있었으니…. 언제?”
“오늘 함께 저녁을 들자고 하셨습니다.”
“알겠다고 해.”
푸티가 고개를 숙이는데 로제타가 귀찮다는 듯 덧붙였다.
“그리고 약속 시각 전까지 내가 부르지 않으면 아무도 내 방에 들이지 마.”
“네, 폐하.”
푸티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그의 뒤로 로제타가 거울을 보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쩜 자는 모습도 이리 아름다울까.”
푸티는 다시 한번 한숨을 삼켰다. 너무 한숨을 많이 삼켜 폐가 터질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저렇게 예쁘다고 속삭이는 건 괜찮았다.
“내 운명. 내 연인.”
조금 소름 끼치긴 했지만, 그래도 저게 나았다. 이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보고 싶다고, 만지고 싶다고, 너를 안고 싶다고 눈물을 질질 흘리며 서럽게 울 테니까.
위대한 황제 로제타 오로라 보레알리스가 울다니?!
“빨리 만나고 싶어.”
벌써 로제타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가득했다. 푸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제는 정말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내 앞날은 어떻게 되는 거지?’
푸티는 이 일의 시발점인 안겔이 오늘 황제를 만나 저 말도 안 되는 행동을 멈추게 만들어 줬으면 했다.
지금은 황제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황제에게 관심이 많은 제국의 특성상 이대로 가다가는 금방 안 좋은 소문이 돌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내 직장은?’
단단한 철옹성 같았던 꿈의 직장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