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3화 (3/155)

#3

‘염치없지만 노력해 봐야지.’

서호는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자신이 무당을 싫어했던 것만큼 아마 무당도 자신이 싫었을 것이다.

늦은 밤, 갑자기 찾아와 욕을 하고 문을 발로 차고 소리를 지르던 사람이자 그녀에게 화풀이를 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 사람 말고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서호는 닫힌 문을 두드렸다.

조금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중년의 여인이 나왔다.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첫 번째 방문 때 안내를 해주던 이.

“아, 저기….”

중년의 여인 아무 말 없이 서호를 바라보더니 문을 활짝 열어줬다.

예약이 없으면 들어오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해야 그 무당을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것이 무색했다. 중년의 여인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서호를 집 안으로 들였다.

여자가 따라오라는 듯 못 박힌 것처럼 제자리에 서 있는 서호를 뒤돌아봤다. 서호는 어색한 숨을 내뱉고는 여자를 따라갔다.

‘저 방.’

중년의 여인은 방문을 살짝 열고 자리를 비켜줬다.

서호는 사라진 여인의 뒷모습을 쫓다가 열린 문틈 사이로 들리는 인기척에 걸음을 옮겼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붉게 눈화장을 한 무당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올 줄 알았지.”

서호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올 줄 알았다고요?”

무당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앞자리를 눈짓했다. 서호는 방석에 앉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뭐 때문에 찾아왔는지도 압니까?”

“아니, 말해 봐.”

뭔가 용한 듯 아닌 듯했다. 서호가 무당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재촉하듯 눈을 치켜뜨는 무당에 입을 열었다.

“집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벽에 이상한 그림이 생겼어요.”

무당이 코웃음을 쳤다.

“인내심이 다 닳았나 보군.”

“네?”

무당이 서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너를 데려가려고 하는 거야.”

“데려가려고 한다고요?”

“영악한 놈이야. 네가 자발적으로 따라오기를 원하고 있어.”

서호는 도대체 이 무당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자발적으로라니….”

서호의 말에 무당이 징그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빈정거렸다.

“그러니까 들어달라는 듯 쳐 울지.”

“그,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붉게 화장해 날카롭게 치솟은 형형한 눈이 서호를 노려보듯 바라봤다. 그리고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단언했다.

“네 팔자는 고칠 수 없다고 했어.”

전에는 그 말이 매우 화가 났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던 서호가 물었다.

“그럼 따라가야 합니까?”

“그래, 이곳에서 더 이상 너에게 연결된 연은 없어.”

뭔가 말이 이상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이곳에서라니.”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다.”

서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짐작하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제가 죽는다는 건가요?”

무당이 짧게 답했다.

“여기서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무당이 이상하다는 듯 서호를 쳐다봤다.

“저번과는 달리 침착하구나.”

서호가 작게 웃었다. 사실 본인도 느끼고 있던 부분이었다.

“이젠 딱히 무조건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처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이 여자에게 화가 나서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게 잘 안 됐다.

스스로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서호의 답에 무당이 되물었다.

“그럼 왜 찾아왔는데?”

“그래도 아무런 노력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보는 게 좋잖아요. 부모님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이대로 아무 노력도 없이 그냥 죽으면 분명 부모님에게 한 소리를 들을 것이다.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도 부모한테서 졸업하지 못한 꼬맹이라고.

무당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의 삶이 나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는 못해. 하지만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만날 거야. 붉은 실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네?”

“아니, 끊지 못하게 아주 칭칭 감아놨어. 지독하기도 하지. 아주 욕심이 많은 놈이야.”

무당이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바라보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서호에게 던졌다.

“그래도 한 번쯤 도와줄 수는 있겠지.”

서호는 얼떨결에 받아 든 물건을 확인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무당을 바라보며 물었다.

“…은장도요?”

지금에 와서는 거의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언젠가 필요한 순간이 있을 거야.”

무당이 서호의 손에 들린 은장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선택해.”

서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어떤 식으로든 따라가기 싫으면 사용해.”

서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니까요?”

여자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더 이상 말 못…. 커헉.”

갑자기 무당이 입을 막고 크게 몸을 들썩였다. 서호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무당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서호가 비틀거리는 무당을 붙잡는데 무당이 다시 한번 크게 기침을 했다.

“쿨럭.”

손가락 틈 사이로 붉은 피가 조금 흘렀다. 서호가 열린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 아프신 거면 아까 그분….”

그러자 무당이 서호를 밀어냈다.

“아픈 게 아니야. 너무 많은 걸 말해서 그렇지.”

무당이 말을 이었다.

“잘 맞으면 잘 살 거야.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여. 네 팔자야.”

서호가 저도 모르게 답했다.

“그 팔자라는 말 정말 싫네요.”

무당이 피식 웃었다.

“나도 별로 안 좋아해. 무당질도 내 팔자거든.”

서호는 가만히 무당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을 말은 다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왠지 이제 떠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 보겠습니다. 여기 복채요.”

무당이 거절하지 않고 하얀 봉투를 받아 들었다.

“흥, 들고 오기는 했구나.”

“네. 부족한가요?”

“됐어.”

서호는 무당을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자 집 밖에 서 있던 중년의 여인이 서호를 바라봤다. 서호가 그 중년의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저분께서….”

그때 중년의 여인이 서호의 말을 끊어냈다.

“학생.”

“네?”

중년의 여인이 건조한 눈으로 서호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다시는 오지 마.”

“네?”

“다시는 오지 말라고. 선녀님께 안 좋아.”

중년의 여인은 서호를 옆으로 밀어낸 뒤,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서호는 여인에게 밀려 엉거주춤 물러났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무당집 문이 세게 열리더니 중년의 여인이 집 주변으로 굵은 소금을 뿌리기 시작했다.

서호는 뒤돌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흘렸다. 뭔지 몰라도 자신의 팔자가 참 박복한가 보다 싶었다.

***

대 보레알리스 제국의 황제 로제타 보레알리스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받아 황궁에 몸을 담고 있는 푸티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푸티는 스스로의 위치에 언제나 만족하며 살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평민이 올라갈 수 있는 거의 최고의 위치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암, 그렇고말고.’

백성들과 귀족들에게 칭송받는 위대한 황제를 지척에서 모시는 하나밖에 없는 시종!

물론 처음 그 위치에 서게 된 것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황제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고, 황제보다 나이가 어려 충고를 하려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푸티는 그래도 스스로의 위치에 만족했다.

‘모든 것은 폐하의 덕이야!’

푸티는 이제 고작 스무 살이 됐고 아직도 올라갈 곳이 남아 있는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였으니까.

그렇게 푸티는 직무 만족도가 최상이었고, 본인을 그런 자리까지 올려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넘쳐흘렀다.

그런데 그런 푸티가 요즘 조금 막돼먹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정신이 나가셨다.’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고 평가하기는 조금 힘들었으나, 푸티에게는 그게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푸티가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 로제타의 방으로 들어섰다.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황제의 방은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러니까 다른 사용인들이 들어오고 싶지 않아 하지.’

황제는 푸티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거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티는 속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삼켰다. 한숨은 방 밖에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황제의 앞에서 한숨이라니, 푸티는 해도 될 것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 있는 시종이었다.

푸티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거울에 거의 매달리듯 서 있는 황제의 뒤로 다가갔다. 보이는 모습만 놓고 본다면 황제는 본인의 아름다움에 취해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이들 중에는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 중 대다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 얼굴을 가졌으니.’

제국의 황제 로제타는 여색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황후를 맞이하라는 신하들의 청을 언제나 똑같은 말로 거절했다.

‘나보다 못생긴 것을 옆에 앉힐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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