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서호는 지난 불면의 시간, 그를 잠 못 들게 했던 울음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놀랍게도 서럽다 못해 음침하게 들리던 그 울음소리와 달리 사내의 외양은 굉장히 밝은 느낌이었다.
황금을 녹여 만든 듯 찬란하게 빛나며 곱슬거리는 금발과 그 사이로 보이는 새파란 푸른 눈.
그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넘쳐흘러 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 울어 붉어진 눈가와 열이 올랐는지 달아오른 볼에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사내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음에도 고집스럽게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집착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서호가 그다지 불쾌함을 느끼지 못했던 건 사내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이전의 울음과 달리 기쁨을 가득 담고 있는 눈물 때문일까?
그때 기나긴 침묵을 깨고 사내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목을 긁는 것처럼 간신히 새어 나오는 매우 작은 소리. 사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서호는 주춤거리며 앞으로 한 발 걸어 나갔다.
사내는 목이 아픈 듯 목을 붙잡고 눈을 찌푸렸으나 여전히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얼핏 비친 고통에 서호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그러자 사내가 눈썹을 아래로 내려트리고 잔뜩 서러운 낯을 하는 것이다. 그가 서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도 예쁘다고 생각했던 손이었다. 커다랗고 조금은 거칠어 보이는 손.
그 손을 타고 올라가면 탄탄해 보이는 팔뚝과 떡 벌어진 어깨가 있었다. 사내가 입은 얇고 하얀 천은 주인의 몸을 완벽히 가려주지 못했다.
천 너머로도 느껴지는 단단한 체구와 아름다운 얼굴.
벽을 통해 봤을 때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앞에서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이 사람은 참 현실성이 없게 생겼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겼지?’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든 저 사내의 얼굴을 본다면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저 외모에 홀려, 정체 모를 이에게 이끌려 이곳으로 온 것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는 소리였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사람이라면 무릇 아름다운 것에 호감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서호가 천천히 그의 손을 붙잡자 처연한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눈웃음을 치며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
멍하니 그 외모를 감상하는데 사내가 서호를 잡아당기며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이었다. 머리를 어지럽게 하던 얼굴이 사라지고 뜨거우면서도 커다란 품에 안기자 정신이 들었다.
‘지금 얼굴에 감탄할 때가….’
서호가 멈칫거리며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사내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서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잡았다.”
아름답던 얼굴에서 연상되는 달콤한 목소리가 아닌, 허기가 가득 담겨 있는 거친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이 바짝 얼은 서호는 그렇게 한참을 사내의 품에 안겨 있었다.
1장. 눈
처음의 시작은 기괴한 울음소리였다.
문뜩 잠에서 깬 밤, 귓가를 맴도는 그 소름 끼치는 소리에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서러움을 토해내는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야기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화를 내고 있는가.
서호는 몸을 돌려 그 울음의 주인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의 귓가에 울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눈을 굴려 울음소리가 나는 방향을 곁눈질했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뭐지?’
분명 소리는 매우 가까운 곳에서 들리고 있는데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는 계속됐다. 하지만 소리의 실체가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렇게 정체불명의 울음소리는 한참을 서호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 울음소리가 언제까지 계속됐는지는 서호도 알지 못했다. 두려움에 사라졌던 수마는 두려움을 잊는 순간 빠르게 그를 덮쳤다.
다음 날, 머리 위 창에서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뜬 서호는 아무렇지 않게 상체를 일으켰다.
‘어젯밤에 분명 무슨 일이 있었지 않나?’
잠이 덜 깬 얼굴로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며 햇볕에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매만지던 서호는 이상하게 따가운 볼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세게 비볐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서호는 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며 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뭐야?”
시선이 느껴지던 곳에는 벽이 있었다. 침대가 붙어 있는 벽.
그리고 그 벽에는 분명 전날 잠이 들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눈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선 두 개와 그 사이에 그려진 구 하나.
어린아이가 삐뚤빼뚤 그려놓은 듯 형편없는 그림이었다. 문제는 서호의 집에는 이런 그림을 그릴 어린아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
서호는 눈을 부릅떴다.
또였다. 또 새벽 내내 울음소리가 들렸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소리를 듣다가 피곤함에 지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돌아오고 서호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똑같은 일이 반복됐을 때, 그리고 그게 세 번이 되고 네 번이 된 오늘.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에 잠식된 몸이 이성을 갉아 먹었다.
서호는 신경질적으로 벽에 그려진 눈에 발길질했다.
“아.”
커다란 소리가 들리자 속이 시원해지는 동시에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소리가 너무 컸던 탓이다.
서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그가 발로 찬 벽을 매만졌다. 혹여 금이 가지 않았나 꼼꼼히 벽을 살피던 서호는 순간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그림이….”
어린아이가 서툴게 그려놓은 것 같던, 크레파스로 선을 그어놓은 것같이 우둘투둘하고 삐뚤던 선이 깔끔해졌다.
한번 자각하고 나니 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떨어져 있던 두 직선이 연결되어 눈 앞머리가 생겼다.
그 사실을 눈치챈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 이게 뭐야?”
퉁.
심장이 크게 소리를 냈다. 비로소 서호는 그에게 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됐다.
하룻밤 사이에 벽에 그림이 생겼어도, 며칠째 정체를 알 수 없는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도 고집스럽게 별일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이쯤 되니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정말 그에게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서호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현관과 화장실,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가면 부엌과 안방, 서호가 쓰던 공부방이 나왔다.
익숙한 공간을 눈으로 살피니 빠르게 뛰던 심장이 안정을 되찾았다.
‘여긴 내 집이야.’
태어나서 스무 살이 된 지금까지 부모님과 그가 살던 집. 아무리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도 그가 필사적으로 외면한 이유.
이 집은 부모님이 남겨준 유일한 곳이었다.
서호가 스무 살이 된 새해 첫날 아들이 다 컸으니 이제 자유라고, 너는 친구들이랑 새해를 보내라며 일출을 보러 갔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겨준 집이자 부모님과의 추억이 가득한 곳.
아직 혼자 산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아 부모님이 없다는 게 그렇게 실감이 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눈물만 나지는 않아 안도하던 차였다.
1년 정도는 휴학하겠다고 다짐했다가 이 정도면 다음 학기부터 학교에 다녀도 되지 않을까 희망찬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 돌연 벌어진 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정말 귀신인 건가?’
어쩌면 몸이 좋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몽유병이 생겼나?’
별생각이 다 들었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던 서호는 이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시리얼을 꺼내 볼에 담고 우유를 가득 부어 전투적으로 입안에 시리얼을 쑤셔 넣었다. 지금 그에게 벌어지는 일이 무엇이건 간에 그는 이 일을 잘 이겨낼 것이다.
‘그래, 할 수 있어.’
집에 귀신이 들린 거라면 무당이라도 부르면 됐고, 그에게 문제가 생긴 거라면 병원에 다니면 됐다. 뭐가 됐든 서호는 절대 이 집을 떠날 생각이 없었고 떠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우선은 힘을 비축해야 했다. 서호는 텅 빈 그릇을 싱크대에 담가놓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에 귀신이면….”
귀신이면 그 귀신의 정체가 뭘지 궁금했다.
“부모님?”
갑작스러운 죽음에 부모님도 한이 쌓인 걸까? 아니면 갓 성인이 된 아들을 홀로 남겨둔 것이 마음에 걸리셨나? 그것도 아니면 이제 자유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돌아가셔서 억울하신 걸지도.
하지만 울음소리는 두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것이었다.
“우리 아빠가 그렇게 울었나?”
모든 것을 토해내듯, 서럽다고, 나 좀 알아달라고, 내가 지금 울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은 서글픈 울음소리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아버지의 울음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서호는 아버지가 우는 기억을 떠올려 봤다.
“아빠가 우는 걸 본 적이…, 없네.”
허탈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아버지나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우리 엄마 울음소리일 수도 있겠다. 우리 엄마가 울 때는 목소리가 굵어질 수도 있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현실도피를 하던 서호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병원을 가야 할까? 아니면 무당?”
병원보다는 무당을 찾아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스스로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집이 귀신에 들렸다고 생각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사실 지금 서호의 상황에서 미친 거나 귀신이 들린 것 모두 남들에게는 더럽게 운이 없어 보일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