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저력과 반격
인간계에서는 산 자들의 반격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날뛰니 기분이 좋구만!”
김성남은 심력을 담은 검으로 죽은 자들을 무자비하게 토벌했다.
강철남을 쓰러뜨리겠다는 일념으로 매일매일 단련한 검법은 혼자서 천 명을 상대할 정도로 강했다.
죽은 자의 군대에서 거대한 골렘이 나타났지만 마치 무 자르듯 녀석들 두 동강 내버리기까지 했다.
최강의 헌터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실력이었다.
동시에 한지영 역시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광속]
써걱―
잠시 칼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칼을 멀리했던 한지영이었지만, 전장에서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예전의 속도가 다시 나오고 있었다.
빛줄기가 번쩍하더니 죽은 자들은 한지영의 모습을 눈에 담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 버렸다.
압도적인 실력차이였다.
“흥. 저승에서는 훈련도 안 하고 맨날 놀았나봐.”
한지영은 습관적으로 피를 털어내려 칼을 허공에 휘둘렀다.
하지만 칼에 묻어 나오는 피는 한 방울도 없었다.
“귀신들을 상대하는 기분이란 영 찝찝하네.”
죽은 자를 베었을 때 드는 묘한 느낌은 쉽사리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손에 느껴지는 감각에 적응할 새도 없이 싸우고 또 싸워야 했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적이 있는 한 계속해서 칼을 휘둘러야 했다.
“흐음. 적이 좀 많네.”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한지영은 전투의 양상이 변화하는 느낌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분명히 전세는 달라지고 있다.
죽은 자들이 양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 수는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군대 안에는 마족들도 섞여 있어 마냥 쉬운 전투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한계 돌파]
한지영은 각성하여 골목길로 파고들어 적의 머리를 베었다.
빠르게 빈틈을 공략하여 빠져나갈 작전이었다.
아무리 죽은 자들이라도 이곳의 지리는 한지영 자기가 더 잘 알거라 자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앙―!
마치 예상했다는 듯 죽은 자들은 골목길 위에서 뛰어내려 한지영을 덮쳤다.
반사적으로 모든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이대로는 고립될지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누군가 있구나, 이 대군을 조종하는 녀석이.”
한지영이 건물 위로 올라가려 하자 옥상에서 화살을 퍼붓는 죽은 자들 때문에 사면초가였다.
이대로는 힘든 싸움이 될 것 같았다.
그때,
[가시넝쿨]
건물 사이사이에서 가시넝쿨이 돋아나면서 한지영을 에워싼 죽은 자들을 휘감기 시작했다.
가시넝쿨에 사로잡힌 죽은 자들은 그대로 졸려 소멸하고 말았다.
“이 넝쿨은?”
“지영씨. 괜찮아요?”
“가이아 언니!”
한지영은 달려가 가이아를 와락 안았다.
그 와중에도 가이아는 마력에 도력을 담아 남아 있는 죽은 자들을 휩쓸고 있었다.
“혼자서 고생 많았어요.”
“대체 이 녀석들은 뭐죠?”
“아직 아는 바가 없어요. 철남이 녀석들의 정체에 관해 알아보러 다니고 있어요.”
“마치 세상에 종말이 찾아온 것만 같아요.”
죽은 자들이 가시넝쿨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기괴한 모습을 보며 한지영이 조금 불안한 눈빛을 지었다.
“안심해요. 우리 모두가 힘을 합치면 이겨내지 못 할 일은 없어요.”
가이아는 불안에 잠긴 한지영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지금 필요한 건 희망과 용기다.
* * *
헌터 협회는 신속히 모든 헌터들에게 강철남의 특제 환약을 전달했다.
얼마간 도력을 다룰 수 있게 된 헌터들은 도력을 활용해 죽은 자들과 맞서 싸웠다.
죽은 자들 가운데에는 인간들도 있어 귀신과 싸우는 기분이 들었다.
“씨X.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살다 살다 귀신이랑 싸우게 될 줄이야.”
창으로 죽은 자의 목을 찌르며 한 헌터가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 이것들은 몬스터보다 더 한 새끼들이야.”
동료 헌터는 활을 쏘며 죽은 자들의 진군을 저지했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에 밀리자 점차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늘에서 번쩍하는 낙뢰와 함께 헌터 한 명이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벼락]
콰쾅―!
거대한 벼락으로 일순간에 백 명의 죽은 자를 날려버린 자는 바로 최만근.
실로 그의 재능은 놀라웠다.
도력을 깨우치자 곧바로 벼락을 익힌 것이다.
“선배님들, 엄호해주십시오!”
최만근이 근접전에서 죽은 자들을 베고 찌르자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던 헌터들이 정신을 차리고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산 자들의 반격이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헌터들이 활약하고 있었지만 세밀한 곳까지 지켜낼 수는 없었다.
“엄마…….”
집안까지 들이닥친 난폭한 죽은 자들은 거실을 제집처럼 헤집으며 해코지할 대상을 찾고 있었다.
한율은 옷장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다.
자기를 숨겨둔 엄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와장창―
“꺄앗!”
“엄마!”
엄마의 비명이 들리자 한율은 옷장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한율아, 오면 안 돼!”
엄마는 박살 나기 일보 직전인 방문을 온몸을 바쳐 막아내고 있었다.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었던 한율은 달려가 엄마와 함께 몸을 기대어 문을 막았다.
그러나 여성 둘이 막기에는 죽은 자의 힘은 너무 막강했다.
이내 문이 부서지고 죽은 자의 칼날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안 돼!”
엄마가 한율을 끌어안고 비명을 질렀다.
[신의 화살]
그 순간 창문을 꿰뚫고 화살 하나가 날아와 죽은 자의 미간을 정확히 관통했다.
죽은 자는 소멸하고 한율과 엄마는 이 기적 같은 일에 아직 얼떨떨해 있었다.
“한율아!”
“민하!”
창문 바깥에는 민하가 있었다.
한율은 창문을 열고 민하를 향해 뛰어들며 와락 안겼다.
“죽는 줄 알았어, 엉엉.”
“이제 괜찮아.”
“민하,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니?”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 어디서 왜 나타난 녀석들인지 전혀.”
“그렇구나. 넌 괜찮아?”
“난 걱정마셔!”
민하는 방긋 웃어 보였다.
한율은 코를 훌쩍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안심일 거야.”
“이게 뭐야?”
“우리 아빠로부터 받은 부적.”
민하가 내민 것은 강철남의 강철 숟가락이었다.
“뭐? 이렇게 소중한 걸 나한테 줘도 돼?”
“나한테는 한율이도 소중하니까. 잘 맡아줘.”
또 한 번 눈물을 글썽이며 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흔들어 보인 민하는 하늘을 달려 사라졌다.
“한율아, 방금 그 친구는 누구고 그 숟가락은 뭐니?”
“응. 내 제일 친한 친구 민하! 마황제의 딸이고, 이 숟가락은 마황제가 준 부적!”
“…우리 딸, 학교에서 무얼 하길래…….”
한율은 강철 숟가락을 꽉 쥐면서 말했다.
“헤헤. 스파이!”
* * *
서울과 달리 지방은 인력난이 심했다.
죽은 자들은 사방에서 몰려오는데 그들을 감당할 헌터들이 부족했다.
급한 대로 은퇴하였던 예비역 헌터들을 비상소집 했으나,
“선배님들. 지금은 국가 초비상상태입니다! 협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에이씨, 일하다 말고 이게 무슨 개지랄이야.”
“아, 오늘 하루 빠지면 일당이 얼마나 손해인 줄 알아? 그건 국가에서 보상해 줄 거야?”
“왜 헌터복만 입으면 몸이 천근만근 무겁냐.”
“헌터복이 맞으세요? 저는 단추가 안 잠겨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이미 일상에 찌들어 버린 예비역 헌터들에게 예전과 같은 기민함이나 예리함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배 나온 아재 직장인들만 모여 있을 뿐이었다.
“선배님들 지금 국민들과 가족들이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상사태에 헌터의 자긍심을 가지고…….”
“야!”
일장 연설하는 헌터 조교의 말을 누군가 싹둑 잘라버렸다.
“우리가 지금도 헌터인 줄 알아? 은퇴한 지 몇 년이나 지났어. 지금 고블린 한 마리 잡기는커녕 도망갈 체력도 없는 저질 체력들이라고. 그런 우리가 무슨 전력이 된다고 데려온 건데?”
“한 번 헌터는 영원한 헌터입니다.”
“쳇, 개소리.”
조교의 말에 다들 코웃음을 치며 침을 찍 뱉는다.
“이건 구닥다리 정신론이 아닙니다. 지금 선배님들은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헌터의 피는 지금 숨어있을 뿐, 결코 사라진 게 아닙니다.”
“아니, 그래서. 싸우다 뒤지면 책임질 거냐고. 우리 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야.”
“그건 됐고. 오늘 일당 얼마 주는 거야? 생명 수당 챙겨 주는 거지?”
한 명이 말하면 또 다른 한 명이 끼어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말은 산에 산을 이루었다.
성난 예비역 헌터 여럿이서 떠들어대는 말들은 도저히 정리가 안 되었다.
통제가 불가능한 그들과 대치하며 조교는 골치가 아팠다.
“여러분.”
그때, 예비역 헌터들의 앞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났다.
“어? 뭐야.”
“세상에!”
“형이 왜 여기서 나와?”
그들은 깜짝 놀랐으며 다른 곳을 보거나 휴대폰을 만지던 사람들도 곧 단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홍태진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아직도 헌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헌터를 은퇴하셨죠.”
홍태진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은 이미 목숨을 걸고 싸워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지키기 위해 그 고결한 목숨을 걸고 싸워주셨습니다. 그 용기에 대해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또 동료 헌터로서 정말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홍태진은 머리를 숙였다.
예비역 헌터들은 머쓱한 듯 고개를 돌렸다.
“지금 세계는 변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마계와 손을 잡고 마족들을 교화하여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화합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인간만의 특별한 힘을 깨우치고 깨달음의 경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나아가고 희망은 점점 더 부풀어갑니다. 아이들은 전쟁과 공포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노인들은 더 이상 생명을 위협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몬스터 시대에 함께 싸워준 헌터 여러분 덕분입니다.”
주변은 조용하고 바람마저 고요했다.
공기마저 홍태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하나 지금 다시 그 평화와 희망의 시대에 금이 가고 있습니다. 그건 인간 때문도 아닌 마족 때문도 아닙니다. 바로 죽은 자들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이 산 자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인 건 마족들과 인간이 손을 잡고 이 위기를 함께 해쳐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적이었던 마족들이 우리 인간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저는 이 동맹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인류는 아직 끝날 때가 아니라는 희망을요. 인간계의 꽃과 인간의 아이들이 내일을 볼 수 있는 희망 말입니다.”
홍태진은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다.
“부디 그 희망에 여러분의 힘을 한 번 더 빌려주십시오. 살아 있는 자들의 저력을 보여주고 죽은 자들에게 죽음을 거부하노라, 함께 산 자들의 의지를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우리 인간의 내일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여러분의 두 손에 달려있습니다.”
예비역 헌터들은 홍태진의 연설을 들으며 가슴속에 남아있던 작은 불씨가 일렁이는 걸 느꼈다.
그건 흔해 빠진 영웅 심리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저력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산 자들의 삶을 짓밟는 저 건방진 죽은 자들에게 참교육을 시켜주어야겠다는 그런 의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여러분. 준비가 되었다면 저와 함께 갑시다.”
홍태진은 창을 들고 앞장섰다.
그 뒤에는 배가 나왔지만 예전처럼 [신속]으로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헌터들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