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이웃집 강철남
어느덧 시간은 5년이 지났다.
마계와 인간계의 활발한 교류는 계속 이어졌고 인간들의 심력으로 마계에서 제조한 특산품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성남 커피 1호점은 번창하여 2호점을 열게 되었고 심력을 깊이 단련한 바리스타에게 분점을 맡겼다.
또한 심력을 담은 수제 맥주도 인기를 끌었다.
흡사 소변 맛이 난다던 마계의 맥주와 비교해 깔끔하고 목 넘김이 훌륭해 불티나게 팔렸다.
마음을 단련한 사람들이 마계에 와서 친절한 서비스로 행복의 기운을 나눠주니 마족들 역시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인간들의 입지는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MMM단의 범죄를 막고 그 잔당을 소탕한 인간 탐정 황기민.
마계 전역에 빠르게 퍼진 소문 덕분에 황기민의 탐정 사무소는 의뢰가 물 밀 듯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사이 많은 조수를 거느릴 만큼 대형 사무소로 성장한 명탐정 황기민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친구가 잘나가면 같이 기뻐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김성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어주며 띠껍게 반응했다.
황기민은 얼음을 와작와작 씹으며 자기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딸랑딸랑―
그때 문이 열리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한지영이 들어섰다.
크레톤의 기초 학교에서 인간학을 가르치는 교직 생활 중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주말을 맞이하여 카르텔로 쇼핑을 온 것이다.
“아주 주렁주렁 쇼핑백에 파묻히겠네.”
“상업의 도시라더니 정말 예쁜 물건들이 많은 거 있죠?”
한지영은 아직도 쇼핑의 여흥이 가시지 않은 듯 한껏 들뜬 표정으로 기뻐했다.
기분 좋은 목소리로 아아를 주문한 한지영은 커피가 나오자 빨대를 쪽쪽 빨았다.
“홍팀장님이랑 진섭씨는 요즘 어떻게 지낸대요?”
“그 양반들은 그게 적성에 맞나봐. 아직 인간계에서 못된 짓 하는 몬스터들을 때려잡는 헌터질을 계속하고 있어.”
인간계와 마계가 호의적으로 교류하고 있는 시대에 아직도 인간들을 못살게 구는 몬스터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자들로 손가락질을 받곤 한다.
홍태진과 백진섭은 서필도가 꾸려나가는 헌터 연합의 오른팔과 왼팔로서 활약 중이며 그런 나쁜 몬스터들을 때려잡으며 지내고 있었다.
“적성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성남 씨는 이대로 계속 바리스타 할 거예요? 철남 씨를 이긴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 목표는 포기하신 거예요?”
한지영이 리필 해달라는 뜻으로 컵을 슬쩍 밀자 김성남이 그럴 줄 알고 미리 타 두었던 아아 한 잔을 내밀었다.
“포기라니. 나는 아직 그 녀석을 놓아주지 않았어.”
“그러면 지금도 매일매일 칼을 갈고 있어요?”
“당연하지.”
김성남은 카운터 아래에 놓인 그의 칼을 꺼내어 보이며 잘 손질해둔 날을 보여주었다.
“반드시 이긴다, 강철남.”
황기민과 한지영은 여전한 그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다행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당분간은 실전 승부는 어렵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그거 못 들었어요? 철남씨네 가족, 인간계로 이사 간다는 거.”
“…응?”
* * *
강철남의 집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인간계로 떠날 채비를 하며 남겨진 자들에게 작별을 고하기도 하면서.
“고작 1년이오. 너무 유난 떨지 마시오.”
“강철남님이 없는 1년은 참으로 허전할 겁니다.”
베거는 중절모를 벗어 가슴에 얹었다.
민하는 하림 선생의 풍성한 가슴살에 파묻혀 인사를 전했다.
“다녀올게요, 하림 선생님.”
“호호호. 많이 배우고 성장하도록 하세요.”
11살이 된 민하.
기초 학교를 졸업하고 중급 학교 1학년에 진학하는 대신에 인간계의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강철남 가족이 마족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비밀리에 진행하는 프로젝트.
실제 인간들 사이에서 마족의 인식이 어떤지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샤를, 중급 학교에 가서 새 친구도 많이 사귀고 있어. 1년 뒤에 따라갈게.”
“강민하.”
샤를은 올라오는 눈물을 감추려고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민하가 살짝 끌어안아 주자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가이아님, 멍구님. 건강히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키켈. 나한테 건강 걱정하는 거야?”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 하니까요.”
멍구는 악수를 청했고 키켈은 영광스럽게 앞발을 잡으며 그들의 프로젝트가 꼭 성공하길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다.
“그럼, 다녀오겠소. 1년 뒤에 봅시다.”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강철남은 가족은 인간계로 공간 이동했다.
* * *
서울 소재의 한 초등학교.
또다시 전학생으로서 새로운 학교에 들어선 민하는 예전 보다는 한층 씩씩한 모습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담임 선생님과 함께 민하가 들어가자 소란스럽던 교실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오늘부터 4학년 1반에서 함께 공부하게 될 강민하 친구예요. 친하게 지내도록 하세요. 민하야, 인사할까?”
“네, 선생님.”
똘똘하게 대답한 민하는 교실의 아이들을 둘러보며 자기 소개를 했다.
“안녕. 나는 강민하야. 시골에 있는 학교에서 지내다 와서 도시 생활은 아직 잘 몰라. 너희가 잘 알려주면 좋겠어. 그럼 친하게 지내자.”
강철남의 둔갑술로 하프엘프의 모습을 감추고 완벽한 인간으로 변신하였지만 본래 그 특유의 예쁜 얼굴은 감춰 지지가 않았다.
반 아이들은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모두 민하의 당찬 모습과 흘러 나오는 아우라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어디서 살다 왔어?”
“집은 어디야?”
“학교 마치고 같이 놀러 갈래?”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민하에게 몰려들었다.
민하는 한 명 한 명에게 또박또박 대답하며 응해주었다.
아이답지 않게 똑 부러지는 모습에 아이들은 또 한 번 민하에게 휘어 잡혀 버렸다.
하지만 반에서 인기를 독차지하는 아이가 있다면 이를 시기하는 아이도 있기 마련.
“야, 강민하.”
한 여자아이가 민하의 이름을 성까지 붙여 부르며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서한율.
민하는 샤를과의 첫 만남이 떠올라 빙그레 웃고 말았다.
“사람이 심각하게 부르는데 너는 웃고 있니?”
“미안, 미안. 무슨 일이야?”
“끄응.”
적개심을 품고 덤벼들었건만 민하가 오히려 다정하게 나오자 당황한 한율.
“체육 시간에 피구로 승부다!”
다짜고짜 계획에도 없던 승부를 걸고 말았다.
“한율아, 오늘 체육 시간은 발야구인데?”
“아, 아무튼 승부야!”
옆에 있던 친구가 지적하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홱 돌아서는 한율이었다.
* * *
체육 교사는 라인을 그려놓고 아이들을 기다렸다.
상대적으로 잘 튀어 오르고 무른 배구공을 가져와 발야구 시합을 준비했다.
체육 시간이 시작되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들뜬 듯 운동장에 모여 재잘댔다.
“자, 집중.”
“집!중!”
아이들은 집중 박수에 맞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경기 규칙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출석번호 홀수 팀과 짝수 팀이 나뉘어서 승부를 펼치게 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같은 팀이냐고, 강민하!”
“그야 둘 다 출석번호가 홀수니까.”
“우쒸! 이렇게 된 이상 누가 더 점수를 많이 내나 승부야!”
“좋아.”
엄마는 항상 실력을 숨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적당히, 안 들킬 정도라면 문제없겠지.
삑―
민하는 발에 힘을 빼고 공을 툭, 찼다.
결과는?
“호, 홈런…….”
“아하하. 생각보다 힘을 더 빼야겠네.”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방방 뛰었다.
민하는 홀수 팀 친구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세레머니를 펼쳤다.
한율은 두고 보자며 승부욕을 활활 불태웠다.
차례가 돌고 돌아 한율의 차례가 왔다.
민하가 홈런을 치는 모습을 본 이상 이쪽도 있는 힘을 다 해 차는 수밖에.
삑―
“우라얍!”
한율은 있는 힘껏 공을 뻥, 찼다.
결과는?
“아웃.”
“안돼!”
민하에게 승부를 걸기에는 실력이 참담한 수준이었다.
그 이후로도 민하가 시원하게 공을 뻥뻥 차서 날리거나 수비를 척척 해 내는 반면, 한율은 굼벵이 기어가는 슛을 날리거나 눈앞의 공도 놓치는 실책 명장면을 뽑아냈다.
“헥. 헥. 좋아, 발야구는 내가 졌어. 인정하지.”
“다른 승부도 준비되어 있니?”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오히려 즐거운 듯 싱긋 웃는 민하.
‘아, 얘는 못 이기겠구나.’
민하의 미소를 보며 한율은 민하와 자기의 그릇이 차원이 다르다는 걸 실감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이런 아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내, 내가 졌으니 벌칙으로 팥빙수 쏠게. 다음 승부가 뭔지는 카페에서 이야기하자…….”
한율은 고개를 돌리고 틱틱대며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민하는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민하에겐 츤데레 타입의 친구들이 잘 붙는 모양이다.
* * *
정체를 숨기고 평범한 인간 전업주부로서 지내야 하는 가이아는 평범하게 장을 보러 나갔다.
정말 평범하게.
언제 어디서든 평범하게 걷고 평범하게 행동하려 애썼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어딜 가든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엘프인 게 탄로 난 건 아닐까?
손거울로 확인해봤지만 뾰족귀도 인간의 둥근 귀로 잘 둔갑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자꾸 쳐다보는 걸까?
“야, 저기 봐. 개쩐다.”
“미친. 여배우인가?”
“가서 번호 따 볼까?”
“아서라. 손가락에 반지 있잖냐. 분명 재벌가와 결혼했을걸.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고. 괜히 마상 입는다.”
어딜 가든 이런 대화가 그녀의 등 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걸 그녀만이 몰랐다.
가이아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이웃들이 바깥에 나와 수다를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머, 새로 이사 온 새댁 아니야?”
새댁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청순한 외모는 새댁이라 불러야 어울릴 법했다.
“어머, 피부가 어쩜 그리 좋아? 화장품 뭐 써요?”
“아, 저. 아무것도 안 써요.”
“뭐? 꼭 이렇게 거짓말하면서 여우짓을 한다니까. 혼자만 좋은 거 쓰지 말고 같이 꿀팁 있으면 나눠요.”
그렇게 어쩌다 보니 부녀회에 녹아들어 잠입에 성공한 가이아였다.
* * *
반면 멍구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움직일 생각 따윈 없었다.
“이 새끼들!”
멍구의 눈앞에는 바닥에 넙죽 엎드린 동네 개들이 열을 맞춰 늘어져 있다.
“거기 너부터 말해봐. 인간들 사이에서 마족의 인식이 어떻지?”
“저는 한낱 비천한 개라서 어려운 건 잘 모르나…….”
“아는 것만 얘기해, 아는 것만.”
“저희 주인 양반들은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아저씨를 심각한 우울증에 빠뜨렸던 탈모를 치료해 주었다고.”
“그렇지? 탈모를 치료해줬으면 목숨을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이 치사한 인간 놈의 새끼들은 탈모 치료법을 개발한 자가 마족이라는 이유로 노벨상도 안 주고. 하여간 꼰머 새끼들, 완전 꽉 막힌 새끼들이야.”
멍구는 씩씩대면서 인간계의 폐단에 분노했다.
“거기 너!”
“네!”
“네가 알기로는 어떠냐?”
“저희 집에는 아이들이 있는데요, 젊은 층은 비교적 마족에 대해 호의적인데 아무래도 나이가 있는 인간들은 당한 게 있어서인지 인식이 개차반입니다.”
“구체적으로 지껄여 봐.”
“커뮤니티에서 맨날 마족 비하 댓글을 남깁니다.”
“뭐? 하여간 존X 찌질한 새끼들. 앞에서 만나면 한마디도 못 할 거면서.”
“앞에서 못 하니까 숨어서 지랄하는 거 아닐까요?”
“어이구, 그래 너 똑똑하다. 꼭 씨X 말대꾸를 꼬박꼬박해요.”
멍구는 건방지게 나대는 삽살개의 볼따구를 앞발로 마구 비벼댔다.
골목대장이 된 멍구는 동네 개들로부터 제법 유용한 정보들을 건질 수 있었다.
그날 밤, 강철남네 집에서는 프로젝트의 성과를 발표하는 첫 회의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