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크레톤 교육 개편 회의
강철남은 남자에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기는 마황제이며 마계와 인간계의 화합을 꾀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일에 있어서 심력이라는 인간의 특별한 힘이 아주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또 그 심력의 근원이 되어준 황옥분 할머니를 찾아 헤매게 된 이야기에까지 이르렀다.
인감도장을 받아들고 강철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는 이 모든 게 동화 속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요지경 세상사, 몬스터가 날뛰고 헌터들이 맞서 싸우는 이 세상에 더 이상 믿지 못할 이야기가 뭐가 더 있으리.
“우리 어머니께서는 일평생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사셨수. 그런 활동만이 당신을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기라도 하듯이 말이오. 생전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사람은 어울려 살아야 하는 법,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소. 어머니 본인이 베푼 작은 친절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친절을 낳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오신 분이라오.”
“그랬군. 그런 분이었기에 그토록 심력이 출중했던 것이었나보오.”
남자로부터 황옥분 할머니의 생애를 전해 들으며 강철남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런데 그 인감도장에는 무슨 사연이 있소? 그토록 진한 심력이 담겨 있는 걸 보아하니 보통 물건은 아닌 듯하오.”
“어느 날 어머니는 산속에 있는 집을 정리하고 내가 있는 집으로 내려오셨소. 집은 어찌하고 몸만 내려왔는지 사연을 물어보니, 웬 금방 죽음의 고비를 지나온 듯 보이는 사내한테 집을 넘기고 오는 길이라고 하더이다. 그때 서류에 찍은 도장이 바로 이 물건이라오. 옛날 분인지라 인감도장을 소중히 여기며 쌈지에 꼭꼭 넣어두고 다니셨소. 아마 그 마음까지 꾹꾹 눌러담아 물건에 어머니의 얼이 담긴 게 아닌가 싶소.”
강철남은 그 죽음의 고비를 지나온 사내가 자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심력이란 혼자서 꽃 피울 수 있는 힘이 아니며, 사람과 사람이 상호작용하여 자라나는 힘이다.
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면서 강해지는 힘, 그것이 바로 심력이다.
강철남이 황옥분 할머니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받았을 때부터 심력은 서로에게 씨앗처럼 심어졌을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것은 내가 자연인이 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었군.”
“기연이란 게 참 신기한 법이야.”
강철남과 멍구는 서로 바라보며 지난날이 떠올라 웃었다.
민하는 어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댁은 어쩌다 여기 들어온 거요?”
강철남은 남자에게 사연을 물었다.
아무 사연 없이 자연인이 되는 사람은 없다는 걸 잘 아니까.
“허허. 그러는 당신은 왜 자연인이 된 거요?”
“흘러가다 그렇게 된 것이오.”
“그리고 또?”
“자연이 좋아서요.”
“나도 그렇소.”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자연인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었으니까.
그렇게 강철남은 남자와 악수를 나누고 뒤로 돌아섰다.
* * *
대한산에서 하산하여 집으로 돌아온 강철남 가족.
“멍구야, 물어와!”
민하는 나무 작대기를 던지며 멍구와 놀고 있었다.
“멍멍!”
멍구는 평범한 개처럼 작대기를 물어다 주며 민하와 놀아주고 있었다.
“자, 이번엔 좀 더 멀리 던진다, 에잇!”
휘익!
힘차게 날아간 작대기는 산맥 꼭대기의 별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멍구야, 물어와!”
“…….”
민하가 지시를 거부하는 멍구를 끌어안고 뒹굴거리는 동안 강철남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철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냐.”
“응. 마계와 인간계의 화합을 위해 이제는 무얼 해야 하나 고민 중이야.”
“마족에겐 인간을 괴롭히지 않을 이유를, 인간에겐 마족에게 지지 않을 힘을 일깨워 주는 것이지?”
“맞아. 마족들에게는 인간계를 침공할 수 없는 윤리적 기준을 세워주고 싶고, 인간들에게는 본인들이 가진 심력이라는 힘을 깨닫게 해주고 싶어.”
“그렇다면 교육 제도를 개편하는 건 어떤가?”
교육이라,
가이아의 조언에 강철남은 긴 터널을 빠져나와 빛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교육 제도를 개편해? 으음. 그렇군. 윤리와 가치관은 어릴 때부터 방향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니까 말이야.”
그래, 교육이다.
기존의 가치관을 바꾸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들은 약하니까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마족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 일.
인간들은 약하니까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비관하는 인간들에게 심력을 가르치는 일.
방향은 정해졌다.
남은 건 함께 할 조력자들을 모으는 일이다.
* * *
“그런고로 혹시 교육계에 종사해보신 분 없소?”
다짜고짜 헌터 연합을 찾아가 이렇게 물어보는 강철남이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뜬금없긴 했지만 김성남이 바리스타 출신이라는 의외의 사실도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는 건 이 중 누군가가 교편을 잡아보았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설마 설마 했던,
“바로 나다!”
황기민일 줄이야.
“이래 봬도 명색이 교대 출신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는 말씀!”
“…확실히 애들이 개기지는 못 했을 것 같군.”
황기민은 나름 유명한 교대 출신의 실력 좋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구멍이 뚫리고 몬스터 시대가 열리자 학교가 폐쇄되고 황기민은 헌터의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하면 되나?”
의욕이 충만한 황기민은 당장이라도 지시가 내려지길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한동안 몬스터 사냥을 하지 못한 것이 몹시 답답했던 모양이다.
“마계에서 인간학 교사를 맡아줘.”
“이봐요 잠깐, 그렇게 중요한 걸 기민씨한테 맡겨도 되는 겁니까?”
어째 불안불안했던지 홍태진이 걱정을 표했다.
말은 돌려서 표현했지만 속뜻은 머리를 써야 하는 일에 황기민을 투입하는 게 적절한 것이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걱정마. 일 못 하면 잘라 버리고 다른 사람 고용할 테니.”
“뭐? 내가 잘린다고? 으하하! 웃기지 마라! 아무도 날 자를 수 없다! 보여주도록 하지. 내가 얼마나 훌륭한 교사인지.”
황기민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반은 걱정, 반은 기대가 되었다.
사실 교사를 섭외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교육계를 설득하는 것.
기초 학교, 중급 학교, 고급 학교, 왕립 학교.
이 네 학교를 통합하여 관리하는 크레톤 교육계의 사령탑, 바로 크레톤 교육청을 설득하여 교과 과정을 재편해야만 했다.
물론 마황제의 권한으로 교육계를 통제하여 휘어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짓은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
교사에게 강압은 먹히지 않는다.
가르치는 자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진심으로 납득 하지 않으면 허울만 번듯하고 속은 썩어있을 뿐이니까.
“자, 난 뭘 하면 되지?”
“아직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소. 지금은 내가 화이팅 해야 하니까 말이오.”
“철남씨, 무슨 일 있습니까?”
백진섭이 뭔가를 눈치챈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결과를 내기도 전에 떠들어 댈 필요는 없다고 느낀 강철남은 침묵했다.
“잠시 크레톤 교육청에 다녀오겠소. 계획이 성공하면 다 말해주리다.”
그렇게 말을 남기고 강철남은 혼자 교육청으로 향했다.
* * *
교육청의 회의실에는 크레톤의 모든 교육 관계자들이 모여 웅성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대화의 화두는 당연히 마황제의 소집과 그 주제.
바로 인간학 수업에 관한 개편이었다.
“아니, 마황제님께서 인간학을 기초 학교에서도 기본 교과목으로 채택하신다던데.”
“정말? 인간학은 인간 존재에 관한 학문이잖아. 그냥 별종들의 독특한 분야일 뿐인데.”
“듣자 하니 이번에 본격적으로 인간계와 화합을 맺으실 목적으로 추진하신대.”
“뭐야. 우리가 왜 열등한 인간들이랑 사이 좋게 어울려야 하는 건데.”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교육 관계자들의 반응은 싸늘하고 냉담하기만 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베거와 하림 선생은 이런 분위기를 예상했던 모양인지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대체로 인간을 마족들의 아래로 보는 시각이 많군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직도 인간계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자들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강철남님에게 힘겨운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소란이 잦아들 기미를 안 보이고 더욱 커져만 가던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교육 관계자들은 즉시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으시오.”
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강철남은 앉으라고 말했다.
자리에 앉는 교육 관계자들을 가만히 둘러보며 강철남은 아는 얼굴들을 찾아 구분했다.
물론 그에게 호의적인 자들도 있었지만 다소 보수적이고 또 여전히 마족이 우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꽉 막힌 자들도 보였다.
하지만 이미 각오는 충분히 했다.
싸워보자.
“오늘 귀한 시간들 내주어서 고맙소. 시간 뺏지 않기 위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나는 인간계와 마계의 화합을 생각하고 있소.”
마황제가 안건을 제시했지만 모두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이 역시 강철남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몇 년 전, 여기있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구멍이 뚫렸었소. 그것은 초대 마황제가 남긴 구멍이었소. 마족들은 그 구멍이 침략을 위한 허락으로 받아들이고 인간계로 넘어가 난동을 부렸었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소? 물론 인간과 마족은 철천지원수가 되었소. 하지만 나는 그런 의문이 들었소. 초대 마황제가 남긴 구멍이 정말로 침략을 하라고 뚫은 것일까? 결론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건 인간들과 소통하라는 교역로였던 것이오.”
그 말에 회의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계와 인간계를 연결하는 구멍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 사례는 이제껏 없었으니까.
“인간에게는 마족이 해내지 못하는 가능성과 힘이 있소. 최근에 발견한 그 힘에 우리는 심력이라는 이름을 붙였소. 그것은 인간들이 단합하고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 때 커지는 힘이라오. 이기주의에 맹목적인 파괴만을 일삼는 마족들은 이해할 수 없는 힘이겠지만 말이오.”
강철남은 마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 보며 연설에 집중했다.
“인간들은 마족들보다 신체적 능력이 약하오. 그러나 힘을 합하여 뭉쳐 이루어낸 마음의 힘으로 마족들과 싸워 다시 마계로 밀어낸 것이라오. 내가 마황제로 등극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족들은 서로 전쟁하고 다투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소. 심지어 전 마왕 크레톤은 마계를 통째로 집어삼킬 대전쟁을 꾀하고 있었지. 그런 식으로 싸우다가 마족들은 머지않아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오. 전투가 정답인 거 같소? 말해 보시오!”
자리에 모인 자들은 모두 교육 예찬론자.
물론 무력 통치에 동의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족이 앞으로 더 살아남고 진화하기 위해서는 그 심력을 배워야 하오. 인간과 교류하고 그들에게 배워야 할 시대가 온 것이라오.”
여기까지 강철남은 마족들이 인간들에게 배워야 할 점에 관하여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인간들에게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말에 일부 마족 교육 관계자들은 은근히 불만 섞인 표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인간학이란 인간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들은 배우자는 취지로 개설한 과목이오. 앞으로 마계와 인간계를 적극적으로 연결하는데 있어 중요한 덕목과 지식이 될 것이오. 고로 마계 전역에 인간학 수업을 필수 교과목으로 채택하고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도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도 적극 개최할 것이오.”
새 교육 정책이 발표되자 수군거림은 웅성거림으로 변했다.
이 혼란 속에서도 강철남은 초연한 태도로 교육 관계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중에 유독 표정이 안 좋은 한 마족을 콕 집어 지목했다.
“거기, 당신. 의견이 많아 보이는데 한번 말해 보시오.”
“아, 네엡! 저, 저는 중급 학교의 교장입니다. 이렇게 마황제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 의견은 아무래도 저희가 인간들과 교류를 함으로서 얻는 이익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작 지목을 받고 발언권을 얻은 중급 학교 교장은 벌벌 떨었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전부 내뱉었다.
“맞는 말이오. 가시적인 수치화로 설명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 하지만 이미 선례가 충분하오. 먼저 마족이 인간계에 봉사활동을 다녀왔다는 신문 기사를 읽어 본 적이 있소?”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직접 그 봉사활동에 참여한 자들의 의견을 구해보도록 하겠소.”
강철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의실 문을 열고 세 마족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