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대한산의 황옥분 할머니
화창한 어느 날.
어쩐 일인지 민하는 한 손에 종이를 들고 싱글벙글 웃으며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엄마! 아빠!”
엄마를 보자 민하는 방방 뛰며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어 보여주었다.
가이아는 잔뜩 흥분해있는 민하가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민하야, 무슨 일이야? 뭔데 그렇게 기분이 좋아?”
“엄마, 엄마! 이번 수행 평가에서 만점 받았어!”
“정말? 우리 민하 대단하네!”
가이아는 민하를 안아 들고 빙빙 돌았다.
민하는 기분이 좋아서 꺄르르 웃음소리를 냈다.
천재적인 힘을 가진 탓에 그 힘을 적당히 조절하지 못해 늘 사고만 치던 민하가 자기 힘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어 뛰어난 성적을 거둔 것이다.
민하에게 있어서는 도무지 해내지 못할 어려운 일을 꾸준한 노력으로 뛰어넘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빠랑 멍구한테도 자랑하고 싶은데 다들 어디 갔어?”
“아빠랑 멍구는 벤티 학원에 가 있단다.”
“응? 아빠랑 멍구가 왜?”
한편 강철남과 멍구는 벤티 학원에서 베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민하가 허셸의 상점에서 주웠던 강한 심력이 깃든 인감도장에 관한 것이었다.
강철남은 그 인감도장의 내력을 분석하여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내고자 했고 그 분석을 벤티 학원에 맡긴 것이다.
“그나저나 철남이. 인감도장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서 뭐하게?”
“그토록 강한 심력을 가진 분이라면 보통 사람은 아닐 거야.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고 배워서 심력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려고 해.”
인간의 특별한 힘 심력.
새로이 발견한 힘인 만큼 추론만 있을 뿐, 아직 체계적으로 정립된 교본이 없다.
강철남은 마력, 도력, 신력 못지않게 심력 역시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하림 선생이 인감도장을 들고 나타났다.
인감도장에 관한 분석이 끝난 모양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소?”
“여러 가지 힘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간의 물건 같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강철남님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나와 비슷한 점? 그게 뭐요?”
“된장, 간장, 고추장 등 인간계의 장 기운이 묻어 있습니다.”
“오호라, 그런 것까지 분석을 할 수 있다니 놀랍군. 그렇다면 그분도 자연인인가?”
“가능성이 없진 않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인간계의 대한산이라는 곳의 지맥의 힘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강철남은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자기와 너무 많은 교집합이 있지 않은가.
“철남이, 이건.”
“그래, 한 번 생각을 해봐야겠어.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
강철남은 머리를 쥐어 짜내어 생각해봤다.
대한산에 다녀갔으면서도 장맛에 조예가 깊은 사람.
“알겠다.”
“누구냐?”
“황옥분 할머니. 내가 자연인으로서 살아가길 결심하고 집을 구하러 다니던 적이 있었지? 그때 대한산에 있는 집을 내어주신 분이야. 끼니는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며 장까지 남겨주신 좋은 분이지.”
“아하, 그 할멈! 이제야 기억이 나는구만.”
강철남과 멍구는 대한산에서의 추억이 떠올라 잠시 감상에 잠겼다.
참 많은 일이 있었고 오늘날까지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겪어왔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대한산의 초가집.
그 집을 버리고 떠난지 오래되었지만 추억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강철남님. 그분을 찾으실 수 있겠습니까?”
“어려울 거요. 행방을 모르오. 게다가 아직 살아계실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이걸 사용해주십시오.”
하림 선생은 나침반처럼 생긴 물건을 건넸다.
“이게 무엇이오?”
“심력 탐지기입니다. 그 안에 인감도장과 같은 심력을 추적하도록 설정해놓았습니다. 아마 인간계에서 그 탐지기를 사용하면 인감도장의 주인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젠장, 하림 선생. 당신은 천재요!”
“하하하. 마황제님에게 인정받다니, 영광입니다.”
강철남은 앞에 놓인 홍차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벌떡 일어났다.
멍구도 잔을 싹싹 핥으며 홍차를 깔끔히 비웠다.
“자, 그럼 출발해볼까?”
그 순간 베거가 막 떠나려는 둘을 막아서는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왜 그러시오?”
“후후. 천리안으로 보아하니 두 분을 당장 만나기 위해 달려오는 누군가가 보이는군요.”
“그게 누구요?”
베거는 말없이 웃기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장실 문을 활짝 열고 민하가 들이닥쳤다.
“아빠, 멍구야! 원장쌤, 하림 쌤! 나 수행 평가 만점 받았어요!”
폭풍처럼 들이닥친 민하가 손에 든 종이를 펄럭이며 방방 뛰었다.
“우리 딸 장하다!”
“축하해, 민하야!:
강철남은 그동안 민하가 힘을 다루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왔는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민하의 기쁨을 충분히 이해하였고 스스로 무언가 해냈다는 기쁨에 들뜬 딸을 보니 아빠로서 가슴이 울컥하는 감정도 올라온 것이다.
강철남은 민하를 번쩍 안아 들고 비행기를 태워주며 딸이 만개한 미소를 띠는 이 순간을 만끽했다.
멍구도 왈왈 짖으며 축하를 전하듯 깡총깡총 뛰었다.
“그런데 아빠 어디가?”
아빠표 항공을 타고 하늘을 누비던 민하가 물었다.
“응, 민하가 찾은 인감도장의 주인분을 만나러 갈 거란다.”
“우와! 정말? 그럼 나도 따라가도 돼?”
“민하는 학원 수업이 있잖니.”
“히잉. 하림 쌤~”
민하가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니 하림 선생이 호호 웃었다.
“때론 이론보다는 현장 학습이 필요한 법이죠.”
민하는 한쪽 눈을 찡긋하는 하림 선생에게 똑같이 찡긋하며 답해주었다.
“하하. 정말이지.”
강철남은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민하의 손을 잡았다.
멍구도 준비 됐다는 듯 옆에 딱 붙었다.
“그럼 다녀오겠소.”
[공간 이동]
펑!
강철남 가족이 인간계로 떠나자 동시에 원장실 문이 열렸다.
“강민하 여기 안 왔어요?”
샤를이 뒤따라 와 민하의 행방을 물었다.
“이런, 방금 아버지랑 같이 인간계로 갔단다.”
“뭐야, 나만 빼놓고.”
“호호호. 샤를은 나와 같이 수업에 들어가도록 해요.”
하림 선생은 날개로 부드럽게 샤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가죠, 샤를. 응? 왜 그러죠?”
그런데 샤를의 상태가 이상했다.
하림 선생의 통통한 다릿살을 보며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어허, 샤를! 선생님을 보면서 군침을 흘리면 안 돼욧!”
한동안 인간계에서 먹은 치킨이 떠올라 절제가 안 되는 샤를이었다.
* * *
대한산.
그곳은 경북에 위치한 자연경관이 멋진 산이다.
강철남과 멍구가 처음 자연인으로 살아가길 선택한 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곳.
“어때, 철남이 반응이 있어?”
“응. 마도구가 이 대한산 위를 가리키고 있어.”
“그럼 그 할머니가 여기 있다는 거야?”
“으음. 불확실성이 너무 많아. 일단 직접 찾아가 보는 수밖에. 가자, 민하야.”
“응!”
강철남은 민하를 목에 태우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멍구는 킁킁대며 오랜만의 대한산 냄새를 맡으며 나아갔다.
“여긴 여전하구나.”
경치에 취해 산을 오르는 강철남 가족.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가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왔다.
“철남 형님, 멍구 형님!”
반갑게 소리를 지르는 녀석은 두루미 신령의 등을 탄 냥고였다.
“오, 냥고 아니냐!”
멍구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냥고를 반겼다.
“냥고, 오랜만이구나. 두루미 신령도 잘 지내셨소?”
“나야 늘 한결같지. 으음.”
두루미 신령은 부리를 꾹 닫고 민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와, 두루미랑 야옹이다! 야옹이가 두루미를 타고 나타났어. 너무 귀여워!”
민하가 뭐가 부러웠던지 냥고를 번쩍 안아 들고 두루미의 등에 올라타 본다.
“어허, 민하야.”
“괜찮다. 이 아이는 네 아이냐.”
“그렇소. 이거 참 미안하오.”
“아닛! 철남이 형님. 아이는 또 언제 낳으셨어요?”
민하에게 이리저리 만져지고 있는 냥고는 깜짝 놀라 민하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봤다.
그러고 보니 강철남의 얼굴과 똑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이것 참 놀랄 일이네요.”
“그나저나, 설악 신령. 대한산에는 왜 찾아온 것이냐.”
“아 그게 이야기가 긴데 말이오. 시간은 괜찮소?”
그러자 두루미 신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리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하더니 주변의 것들을 신선계로 조용히 초대하는 도술을 부렸다.
“차라도 들겠나?”
“좋소. 기꺼이요.”
또 한 번 연기가 그들 사이를 흘러 지나가더니 탁자와 의자가 나타나고 다기가 차려졌다.
“정말이지 놀라운 경지요. 나도 이 정도까지 귀신같은 도술은 못 부릴 텐데.”
“겸손하구나. 마계를 손에 넣은 자가 말이다.”
두루미 신령은 강철남이 마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하하. 알고 계셨군요.
강철남은 마주 앉아 두루미 신령과 냥고에게 마계의 수목화 작업에 관한 일과 그 이후에 일어난 많은 사건에 관해 들려주었다.
마력 도핑 약을 유통한 광마 도사의 이야기와 벤티 학원의 선생들.
그리고 마계와 인간계의 화합 프로젝트에 관해서도.
“그대는 늘 놀라운 일을 벌이는구나. 마계와 인간계가 손을 잡는다라. 하하하. 정말 훌륭해.”
두루미 신령은 보기 드물게 웃는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강철남이 꾀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별나면서도 위대한 일이었다.
“철남이 형님. 그럼 오늘은 그 인감도장의 주인을 찾으러 오신 거예요?”
“응, 맞아.”
“그렇다면 저기 산 중턱에 사는 자연인한테 물어보세요. 예전에 형님들이 사는 집을 떡 하니 차지해서 지내고 있는 인간이 있거든요.”
냥고에 말에 따르면 강철남이 떠나온 초가집을 누군가 차지해 사는 중이랬다.
혹시 그 사람이라면 인감도장의 주인 황옥분 할머니와 무슨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자, 그럼 움직여보자.”
“좋은 결과 있길 바라네.”
“형님들. 마계랑 인간계랑 잘 되면 저도 한자리 주세요!”
“하하하. 알겠다, 이 녀석아.”
두루미 신령과 냥고와 헤어지고 강철남 가족은 산을 올랐다.
으쌰으쌰 산을 오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중턱의 초가집에 다다랐다.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마당에는 불을 피우는 화덕이 있었고 처마에는 곶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누구요?”
강철남이 잠시 옛 모습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 있을 때 부엌에서 중년의 남자가 나왔다.
“안녕하시오. 나는 예전에 여기 살던 사람이오. 말 좀 물으러 왔소이다.”
남자는 너무나도 젊고 잘생긴 강철남을 보며 살짝 경계했다.
겉으로만 봤을 땐 예전에 이런 곳에서 살았다는 게 믿겨 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전에 여기서 살았다고요? 그렇다면 우리 어머니에게서 집을 넘겨받은 사람이오?”
“어머니라. 역시 당신 어머니 존함이 황, 옥자, 분자, 되시오?”
“그렇소. 집을 버려두고 갔으면서 왜 다시 찾아온 것이오?”
남자는 어머니의 유품이라 할 수 있는 집을 버려두고 떠나버린 강철남에게 괜히 미운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사정이 있어서 떠나게 되었소. 지금은 다른 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소.”
“가족이라. 좋겠수. 함께 살 가족이 있어서.”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시오?”
“돌아가셨수다. 몇 해 전에.”
“…편히 가셨습니까?”
“몬스터들한테 안 뜯어 먹히고 조신하게 가셨으니 호상이나 다름없지 뭐.”
왠지 가슴이 놓이는 강철남이었다.
“이 물건이 혹시 어머니의 물건 맞소? 우연히 건너 건너 내 손에 들어온 물건이외다.”
“이건 어머니의 인감도장 아니오? 당신이 어째서 이걸?”
남자는 강철남을 의심하는 눈초리로 흘겨보기 시작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강철남은 꾸밈없이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계의 한 밀수꾼에게서 압수한 물건이오. 그 물건에는 심력이라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었소. 그래서 그 힘에 대해 연구하고자 이 물건의 주인을 찾아뵙고자 온 것이라오.”
남자는 무슨 외계어를 내뱉는 듯한 강철남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당신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오?”
백문이 불여일견.
강철남은 손끝에 강한 마력을 모아 하늘로 피워올렸다.
그러자 엄청난 마력의 오로라가 빛을 휘감으며 오색 찬란한 다채로운 광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산속의 몬스터들은 그 압도적으로 무시무시한 마력에 덜덜 떨며 숨어버렸고 남자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나는 마계를 다스리는 마황제요. 지금부터 내가 어찌하여 황옥분 할머님을 찾는지 말씀드리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