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인간의 마음의 힘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방학의 첫날.
민하는 가방을 챙겼다.
이번 여름방학 동안 민하는 하림 선생과 함께 인간계에 다녀올 것이다.
인간계에서 병든 사람들, 그중에서도 병원에 갈 형편이 못 되는 인간들을 치료해 줄 생각이었다.
“아빠의 부적도 챙겼고 지갑도 챙겼고 피부가 타지 않게 선크림이랑 모자도 잘 챙겼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엄마의 머리카락도 조금…”
가이아는 먼 곳으로 떠나는 딸의 소지품을 챙겨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엄마의 마음으로 모든 것이 다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이 참. 엄마, 너무 걱정 말라니까요.”
“그래, 가이아. 내가 따라가잖아.”
멍구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멍구, 넌 절대로 술 마시지 말거라.”
“걱정하지 마. 지난번에 털이 싹 밀리고 난 뒤로 정신 단단히 차렸으니까.”
멍구의 호언장담에도 가이아는 못 믿겠다는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번에도 민하를 방치해뒀다간 모근을 전부 막아버리겠다.”
“헉! 제발… 잘하겠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눈에 남아있던 장난기가 싹 사라진 멍구였다.
“민하야, 준비는 다 됐니?”
“네! 다 됐어요.”
강철남은 민하의 눈높이에 맞춰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계와 인간계의 화합을 위한 첫 프로젝트.
그 위대한 한 걸음을 위해 민하가 나서는 것이다.
“그럼 갈까?”
“응!”
강철남과 멍구, 그리고 민하는 벤티 학원으로 향했다.
가이아는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그들이 돌아올 집을 말끔히 정리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어머?”
먼저 화단에 물을 주던 가이아.
뭔가를 발견하고 놀랐다.
마력을 담아 심은 씨앗은 마계의 식물이 되어 자랐고 도력을 담아 심은 씨앗은 신선계의 식물이 되어 자랐다.
물론 신력을 담아 심은 씨앗은 천계의 식물이 되어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오로지 아무런 힘도 담지 않고 인간 강철남으로서 심었던 네 번째 씨앗에서도 새싹이 돋아난 것이 아닌가.
“이상하구나. 마력이 짙은 마계에서는 마력을 불어 넣지 않고 인간이 심은 씨앗은 싹이 트지 않을 터인데.”
가이아는 이것이 혹시 인간이 가진 특별한 힘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지혜가 필요했던 가이아는 크레톤의 왕립 학교를 찾아가 왕립 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조사해 보기로 했다.
* * *
똑똑똑―
벌컥―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이 열리자 늘 그렇듯 깔끔하게 정장을 다려 입은 베거가 나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학원 안에는 향긋한 홍차 향이 풍겨 왔다.
“베거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래, 민하야. 오늘 기분은 어떠니?”
“최고예요!”
“그거 다행이구나.”
베거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안으로 모셨다.
원장실로 들어가니 하림 선생이 먼저 앉아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 오셨습니까?”
하림 선생은 날개를 우아하게 접으며 꾸벅 인사했다.
여전히 붉고 멋진 볏이었다.
“민하야, 표정이 좋아 보이는구나.”
“그럼요! 빨리 인간계에 가고 싶어요!”
“호호호. 좋아. 덕분에 선생님도 아주 활기가 생기는구나.”
하림 선생은 이제 슬슬 떠나려는 듯 가방을 챙겨 들었다.
민하도 아빠에게 안겨 뺨에 뽀뽀를 하며 떠날 준비를 마쳤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렴.”
강철남은 멍구에게 눈짓으로 민하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를 남겼다.
멍구는 이번엔 진짜 맡겨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 이동]
펑―!
멍구가 도술을 부려 하림 성생과 민하를 데리고 인간계로 향했다.
“베거 원장.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시간 있소?”
“물론 있지요. 혹시 민하에게 생긴 힘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역시 ‘눈’이 있는 자라 이야기가 빠르군.”
베거는 준비해둔 끓인 물로 홍차를 우렸다.
원장실 안은 홍차 냄새로 그윽했다.
“민하에게 생긴 심력이라는 힘 말이오. 그건 아마 이 물건에서 흡수한 힘 때문인 거 같소.”
강철남은 주머니에서 허셸의 상점에서 챙겨 온 심력이 담긴 인감도장을 꺼냈다.
버게는 그 인감도장을 조심스레 건네받고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건 도장이로군요. 재료는 인간계의 나무고 솜씨는 직접 손으로 깎은 걸로 보아 인간이 만든 것 같습니다.”
“정확한 분석이오. 그건 인간의 물건이 틀림없소.”
“그렇다면 심력이라는 것은 인간 고유의 특별함 힘이겠군요.”
강철남은 심력이 정확히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인간들이 심력을 다룰 줄 안다면 그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황폐해진 인간계를 다시 초목이 무성한 푸른 땅으로 가꿀 수도 있다.
“아무래도 이런 건 오래 살아본 양반들한테 물어봐야겠지.”
“누구를 찾아가실 생각입니까?”
“내가 아는 존재 중 가장 나이 많은 영감”
강철남은 천계로 향했다.
옥황상제를 알현할 생각이었다.
* * *
가이아는 크레톤의 왕립 학교를 찾아갔다.
그곳의 왕립 도서관에서 심력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데스크에 점잖게 앉아 있는 까마귀 사서가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출입에 엄격한 제한이 있는 왕립 도서관은 이 까마귀 사서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까마귀 마저도 가이아를 보더니 서류를 흩날리며 놀라고 말았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고 싶네만.”
“아니! 가이아님이 아니십니까.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소문이라니?”
“마황제님과 함께 크레톤에서 지내신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렇군. 1년 동안이나 잘 숨겨 왔는데 이제 한계인 모양이군.”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 왕립 도서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고맙네.”
가이아는 우아하게 걸으며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조용하던 도서관이 수군수군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도서관을 찾는 이들은 모두 사회와 정치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기에, 마왕 가이아의 얼굴과 그녀의 위대한 업적을 모를 리 없었다.
풍요의 땅을 키워 굶주린 마족들을 먹여주었던 높은 은공.
마황제와 손을 잡고 황폐한 마계에 푸른 산과 숲을 가꾼 위대한 엘프 마왕.
모두가 그런 가이아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세상에, 가이아님이셔.”
“실물로 보니 정말 아름답다.”
“위엄이 굉장해. 보기만 해도 압도당할 것 같아.”
마족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으며 가이아는 사서가 있는 자리로 향했다.
“무, 무슨 일이세요, 가이아님?”
사서인 알파카는 가이아와 눈을 마주치자 그만 얼어버리고 말았다.
“긴장 풀거라.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네! 얼마든지요!”
“그렇다면 인간학에 관련된 책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해다오.”
“네, 알겠습니다.”
마치 사단장 앞에 선 이등병처럼 알파카는 기합이 바짝 들어가 가이아를 안내했다.
둘은 커다란 서재 앞에 섰는데 인간학은 별로 인기가 있는 학문은 아니었는지 책들이 하나같이 뿌옇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어찌하여 인간학에 관한 자료는 이토록 손때가 안 묻은 것이냐?”
“마족들은 인간을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고 연구할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죠. 물론 마황제님께서 인간 태생이시긴 하지만 마황제님은 이례적인 경우라고 생각들 한답니다.”
“인간이 열등한 존재라고? 나는 인정 못 하겠다.”
“사실 저도 그래요. 간간이 인간학에 관한 서적을 읽곤 하는데 생각보다 흥미로운 점이 많은 종족이에요.”
알파카는 가이아의 생각과 통하는 점이 있다는 게 신났는지 어느새 긴장이 풀렸다.
“그나저나 가이아님은 어떤 자료를 찾으시나요?”
“심력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나?”
“심력이요? 마음의 힘이라는 의미인가요? 글쎄요… 아하!”
그때 알파카가 뭔가 떠오른 듯 눈이 커졌다.
“천계인학 서적에서 본 적이 있는 내용이에요.”
“천계인? 인간학이 아니라?”
“네. 맞아요. 그게 분명히… 잠시만요. 그 책을 가져올게요!”
알파카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달려가 후다닥 책을 한 권 가져왔다.
“여기 보시면 천계 환상의 꽃, 연화초 항목을 보시면 심력에 관한 내용이 나와 있어요.”
[연화초는 키우는 이가 진정으로 행복할 때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행복은 심력을 키우고 심력은 연화초를 꽃 피우는데, 심력이란 주로 인간에게 발현되는 힘이므로 천계인이 이 꽃을 피운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적혀 있어요.”
“그렇다면 심력이란 인간의 행복한 마음이 커질 때 성장하는 힘이라고 볼 수 있겠구나. 우리 집의 연화초가 활짝 피었던 건 인간의 피가 흐르는 철남과 민하에게 내재 된 심력 덕분인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니, 무척이나 흥미로운 힘이네요. 가이아님, 부디 저도 자료를 찾는데 돕게 해주세요.”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구나. 그럼 함께 힘내보자.”
“네!”
가이아와 알파카는 인간학의 서적들을 뒤지며 심력에 관한 내용을 찾기 시작했다.
* * *
강철남은 옥황상제를 찾아갔다.
“옥형, 계슈?”
“오, 철남이 왔구나. 무슨 일이냐.”
“어째 찾아올 때마다 한가해 보이오.”
“허허허. 철남이가 온다길래 일을 다 제쳐둔 것이지.”
“그렇게 말하면 미안하잖소. 아무튼 용건만 간단히 묻고 가리다. 혹시 심력이라는 힘에 관해 아시오?”
그러자 옥황상제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드디어 그대가 그 힘에 관해 묻는 날이 왔구나.”
“알긴 아나 보군. 알쏭달쏭하게 애간장 태우지 말고 뭔지 알려주시오.”
“심력이란 인간들 마음에 깃든 힘,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고 위로해주고 공감하고 함께 행복을 느낄 때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과 같은 것이지.”
“상당히 추상적이군. 그 힘은 어떻게 하면 발현할 수 있소?”
“누구나 가능해. 철남이 자네도 그 힘을 발현할 수 있네.”
“내가? 내 상태창에는 심력이 없었는데.”
“심력은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의 인간계 헌터 친구들을 보게. 세상이 무너지자 인간들을 지키려고 일어나 싸우지 않았는가? 그런 마음의 힘이 곧 심력이라네. 또 자네의 가족이 피워 낸 연화초는 어떻고? 그런 사랑이 넘치는 행복 역시 심력의 근간이라네.”
여전히 추상적인 내용이라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강철남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민하는 그 심력이 상태창에 나타났소.”
“그건 민하가 심력의 대행자 자격을 갖춘 것이라 볼 수 있지.”
“심력의 대행자는 또 뭐요?”
“말 그대로 그 심력을 직접 발현할 수 있는 자라는 말이네. 인간이 가진 마음의 힘을 직접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민하의 존재가 완전무결 순수한 존재라는 걸 입증하는 것이지.”
“우리 민하가 좀 대단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대단했단 말인가.”
“허허허. 자식들은 항상 부모의 기대를 뛰어넘는 법이지.”
“많은 걸 배웠소. 고맙소, 옥형.”
“철남이는 지켜보도록 하거라. 자네의 딸이 어떻게 심력을 키워나가는지를.”
강철남은 옥황상제에게 깊이 숙여 인사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가이아도 책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부부는 서로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 묘해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