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심력, 그리고 의문의 인감도장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민하와 샤를.
“푸하하!!”
강철남은 털이 모조리 벗겨진 멍구를 보고 빵 터지고 말았다.
“철남… 너무… 그렇게… 웃으면… 멍구가… 불쌍하지 않는가…….”
그러는 가이아도 말을 더듬으며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흐즈 믈르그 흤드(하지 말라고 했다).”
멍구는 부들부들 대며 이를 악물고 분노를 표했다.
“예끼! 아이들을 잘 돌보라는 임무 하나 제대로 안 한 녀석이 무슨 변명거리가 있어? 애들이 사라지는 동안 술이나 퍼마시고 있었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지.”
강철남의 매서운 뼈 때리는 말에 멍구는 차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샤를. 미안하구나. 우리 멍구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서.”
“아니에요. 민하가 같이 있어 줬는걸요. 그럼 저도 이만 돌아가 볼게요.”
샤를은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 밖에서 기다리는 알베르토의 마차에 올랐다.
민하는 샤를을 배웅해주었고 강철남 가족은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아빠.”
“왜 민하야?”
“나 그 허셸 아저씨네 상점에서 이상한 걸 흡수한 거 같아?”
“어떤 건데?”
“뭔가 가지고 있던 힘과는 다른 힘이 느껴져.”
“상점에서 뭘 흡수했니?”
“마력이 깃들어 있는 물건들에 담긴 힘들을 흡수했어.”
강철남은 생각에 잠겼다.
아마 그 물건들 가운데 의도치 않게 흡수한 힘이 있을지도 몰랐다.
“멍구야, 민하의 상태창을 한번 확인해볼래?”
“뭐? 상태창? 글쎄. 너무 추워서 눈앞이 캄캄한데.”
“아오, 저 깍쟁이가.”
[회복]
강철남은 멍구의 모근에 회복의 촉진을 걸어 털을 다시 자라게 해주었다.
고개를 돌리고 새침데기 표정을 짓던 멍구는 씰룩씰룩 입꼬리가 올라갔다.
“또 좋다고 실실 쪼개는 거 봐.”
“아니거든!”
“됐고, 민하 상태창이나 좀 봐줘.”
멍구는 무슨 변화가 있겠나 싶어 ‘눈’을 떠 민하의 상태창을 보았다.
그런데,
“어라? 무슨 새로운 항목이 있는데?”
“그게 뭔데?”
“심력.”
“심력? 마음의 힘이라는 건가? 대체 그건 뭐지?”
“마황제인 네가 모르면 어떻게 해?”
“가이아, 혹시 알고 있는 거 있어?”
“나도 처음 들어보는구나.”
“이건 어쩌면… 인간의 힘인 걸까?”
강철남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건 어쩌면 강철남이 찾아 헤매던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잠깐 다녀오겠소.”
“철남, 밥은 먹고 가야지.”
가이아의 만류를 뒤로한 채 강철남은 공간 이동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가이아, 바가지 좀 긁어 줘야겠는데?”
“목적이 생기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은 변함이 없구나.”
“엄마, 배고파.”
“그래. 우리는 밥 먹자꾸나.”
* * *
강철남이 곧장 달려간 곳은 몬스터 시장.
허셸의 상점을 찾아 현장의 마도구들을 둘러보기 위해 왔다.
하지만 7년 전에 비해 무척이나 넓어진 곳인데다 북적이는 마족들 사이에 끼어서 제대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봐. 오늘 상점 하나가 무너졌다던 곳이 어디있는지 알고 있나?”
“뭐야, 넌? 누군데 다짜고짜 말을…….”
험상궂게 생긴 오우거는 짜증을 내면서 강철남을 돌아보는데 그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마, 마, 마, 마황…….”
“에효, 됐다. 가만히 있어.”
말을 더듬는 걸 보아하니 제대로 된 대화가 안 될 것 같았다.
[빙의]
오우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 강철남은 그의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무너진 상점가의 위치를 찾아내었다.
“오케이, 찾았다. 땡큐. 즐거운 쇼핑 되거라.”
강철남이 떠난 뒤에도 오우거는 혼자 마, 마, 마황… 이라고 멍청히 중얼거릴 뿐이었다.
허셸의 상점이 있던 자리는 완전히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건물의 잔해는 안에서 밖으로 폭발한 게 아니라 바깥에서 안으로 좁혀 들어오듯 터져버린 것 같았다.
“민하의 흡성 대법으로 건물에 걸려 있던 마력이 무너진 것이로군. 그럼 마도구를 찾아볼까.”
강철남이 현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 순간,
“멈춰라!”
누군가 나타나 강철남의 뒷목에 칼을 겨누었다.
“솜씨가 많이 좋아졌군.”
“그러는 철남씨는 육아만 하더니 너무 무뎌진 거 아니에요?”
한지영은 웃으며 칼을 거두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민하 괴롭힌 녀석들 혼내주기라도 하게요?”
“녀석들은 충분한 대가를 치렀고 또 법의 치르겠지. 내가 여기 찾아온 건 저 안에 있는 마도구에 관심이 있어서요.”
“마도구요?”
마족들과 인간이 힘을 합하여 수습 중인 현장을 들여다보며 한지영은 생각에 잠겼다.
“안에 있는 마도구들은 전부 이번 사건의 증거물에다 밀반입된 물건들이라 제가 함부로 빼돌릴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에요.”
“그렇겠지.”
“하지만 위대하신 마황제님이 시찰하러 오신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그렇게 말한 한지영은 앙큼하게 웃었다.
그 말의 뜻을 눈치챈 강철남은 무너진 상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저씨, 여기 멋대로 들어오면 안 돼요.”
현장의 증거품들을 막 수거하려던 스켈레톤이 강철남을 막아섰다.
해골이라 표정은 없지만 나름 엄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깐 안에 좀 보겠네. 찾는 물건이 있어서.”
“거참. 여긴 지금 사건 현장이라고.”
“자네. 뼈다귀가 된 지 얼마나 되었나?”
“뭐? X바. 인간 주제에 스켈레톤의 연식을 묻고 있어? 지금 살가죽 있다고 뺀질거리기라도 하는 거야, 뭐야? 인간에다 얼굴 좀 잘 생겼고 또 큰 키에 몬스터 시장에 들어와 있는…….”
여기까지 말이 미치자 스켈레톤은 직감했다.
이 자는 어쩌면 진짜 마황제가 아닐까 하고.
“딱― 딱― 딱― 딱― 딱― 딱― 딱―”
스켈레톤이 덜덜 떠는 바람에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관절 마디마디가 또각또각 맞닿는 소리가 애잔하게 울려 퍼졌다.
“좀 봐도 되겠나?”
“무, 물론이죠!!”
칼 같은 차렷 자세로 대답한 스켈레톤은 얼른 길을 옆으로 비켜섰다.
강철남은 상점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 둘러보았다.
마력이 깃든 목걸이에 어느 신력의 도력이 깃든 반지도 있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머리핀을 잡아보니 거기에서는 신력이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천계인의 신력이 담겨 있는 물건이 있다는 건 의심스러웠다.
천계인들은 함부로 물건에 신력을 담아서 누군가에게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철남씨, 찾으려는 건 찾았어요?”
“아직이오. 지영씨, 여기 있는 물건들은 전부 어디로 가는 거요?”
“밀수품들은 카르텔에서 관리하고 있어서 그쪽으로 갈 거예요.”
“역시 카르텔.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군.”
강철남은 신력이 담긴 머리핀을 챙겼다.
그리고 민하가 흡수한 심력이 담긴 물건도 찾기로 했다.
“음… 대체 어디 있을까.”
그때,
“어머. 이거 진짜 골동품이네.”
한지영이 뭔가 관심이 가는 물건을 주웠는지 눈길을 멈춰 세웠다.
강철남은 그녀가 들고 있는 물건에서 독특하고 강한 힘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인간인 한지영이 그 물건에 끌렸다는 것이 강철남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 물건에 심력이 담겨 있을 거라고.
“지영씨, 그거 나 줄래요?”
“네? 이런 걸요? 대체 왜요?”
“조사할 게 좀 있소.”
“네, 여기요.”
한지영으로부터 건네받은 물건은 나무로 깎아 만든 작은 인감도장.
대체 이 물건에 무슨 사연과 힘이 깃들어 있는지 강철남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차차 풀어나가야 할 과제로 여겼다.
“철남씨, 찾으려던 물건이 그거였어요?”
“그런 것 같소.”
“그럼 밥 먹으러 가요. 식사 안 하셨죠?”
강철남은 한지영의 막무가내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몬스터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오랜만에 찾은 살쾡이 식당.
여전히 손님들로 붐비고 대기도 많았다.
하지만 다른 곳을 찾기에도 저녁 시간이라 비어 있는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우으. 하필 오늘 같은 날.”
오랜만에 강철남과 밥 한 끼 하려던 한지영은 속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강철남이 정체를 숨기고 얌전히 있으니 다른 몬스터들도 눈치채지 못하고 새치기를 하는 웬 고릴라 녀석도 있었다.
“이봐, 거기. 새치기하지 마!”
“뭐야, 넌? 시장 관리소의 인간 계집이잖아? 시끄러! 너는 가서 일이나 해!”
“일을 하더라도 밥은 먹으면서 해야 할 거 아니야! 사람 바쁜 거 알면 제대로 줄 서!”
한지영이 새치기를 한 고릴라 녀석을 향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옳은 소리를 퍼붓자 고릴라가 자존심이 몹시 상한 모양이었다.
“듣자 듣자 하니까 감히 인간 주제에 기어올라?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줘?”
우람한 근육을 씰룩거리며 고릴라는 팔로 걸어왔다.
움씰거리는 승모근이 위협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한지영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할 테면 해 봐.”
두 개의 단도 손잡이를 잡은 한지영과 가드를 올리는 고릴라 사이에 맹렬한 기 싸움이 일어났다.
“하아. 보고 있자니 슬슬 열 받는군. 새치기는 용납 못 한다. 뒤지기 싫으면 맨 뒤로 가라.”
참다 못한 강철남이 한 마디 내뱉었다.
그때까지도 고릴라는 강철남의 존재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까불지 마라, 애송이. 너 따위는 한 방에…….”
순간 턱관절이 얼어붙은 고릴라였다.
이래저래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자 신물이 난 강철남은 드디어 인내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마계의 마황제 강철남이다!! 배고프니까 당장 자리 세팅하고 메뉴 풀코스로 가져와!!”
X됨을 직감한 고릴라는 일부러 눈을 뒤집으며 그 자리에 드러누워 실신한 연기를 했다.
나머지 몬스터들도 입을 막고 허둥지둥 대며 길을 터주었고 바로 강철남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밥을 먹던 몬스터들은 자리에서 당장 일어나 계산을 마치고 후다닥 자리를 비웠고 살쾡이는 당장 주방으로 뛰어 들어가 모든 메뉴를 만들기 시작했다.
“후아. 이제야 밥 좀 먹겠네. 좀 양아치 같긴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아무도 지영씨를 함부로 못 대할 거요.”
“고마워요. 멋있었어요.”
한지영은 이 상황이 너무 즐거운 듯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거기 너 고릴라! 안 자는 거 아니까 빨리 일어나.”
“네, 네엡!!!”
강철남의 말 한 마디에 드러누워 있던 고릴라가 벌떡 일어났다.
“네가 그렇게 힘이 세면 오늘 폭발이 일어난 현장에 가서 정리 작업이나 도와, 새꺄.”
“옙!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고릴라는 100m를 7초로 달릴 스피드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마황제님. 여기 있어.”
살쾡이가 음식들을 대접했다.
“넌 존댓말을 하려면 존대를 하고 반말을 하려면 반말을 해. 왜 어정쩡하게 섞는 건데?”
“명색이 마황제이신데 반말은 좀 그렇고 단골인데 존댓말은 서먹서먹하잖아.”
“저건 언제까지 세워둘거야?”
강철남은 마황제가 다녀간 곳이라는 입간판을 가리켰다.
“내가 뒤질 때까지요.”
“그날이 오늘이 되어 볼래?”
“서비스 팍팍 드릴게.”
“…한 달 뒤에 치워라.”
테이블에 차려진 풍성한 요리를 보자 두 사람은 침이 고였다.
“먹읍시다.”
“잘 먹겠습니다!”
한지영은 강철남 덕분에 평소에는 먹어볼 수도 없었던 살쾡이 식당의 고급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맛있는 음식이 그리도 좋소?”
“그것도 좋지만 철남씨랑 이렇게 단둘이 밥 먹는 거 처음이잖아요!”
“어허, 가이아가 들을까 무섭소.”
“히히히. 가이아 언니한테는 비밀이에요.”
한지영이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음식을 입에 집어 넣었다.
그때 강철남의 주머니에 있던 인감도장에서 묘한 힘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