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북한산? 북한, 산?
샬롯은 멍하니 가이아와 강철남을 바라보았다.
순간 방금까지 평범하게 수다를 떨던 강철남과 가이아가 아득히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런 샬롯의 마음을 눈치챘던 걸까, 가이아가 침묵을 깼다.
“너무 어려워 마세요. 저희는 그저 민하의 어머니, 아버지로 방문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소. 부디 어려워 마시고 학부형끼리의 만찬으로 즐기는 게 어떻겠소?”
강철남 부부는 상냥하게 긴장을 풀라 말했지만 어디 그게 쉽게 되겠나.
“어머, 어떻게 그래요? 무려 마황제님과 마왕님과 같이 식사를 하는데요.”
샬롯은 눈을 땡그랗게 뜨면서 놀란 듯 표정을 지었지만 그 특유의 능청스러움에 긴장은 이미 사그라든 것처럼 보였다.
“네? 마황제님…? 마왕님…?”
그 이야기를 듣던 샤를의 눈에서 초점이 없어졌다.
지금 이 이야기가 무슨 의미일까.
혼자서 생각을 정리해보려다 오히려 머리에 과부하가 걸릴 것 같다.
“저기, 샤를.”
민하가 다가와 샤를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언젠가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그만. 속일 생각은 없었어.”
“강민하. 그럼 너희 부모님이 마황제님이랑 마왕님이시니?”
“응, 맞아.”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이제야 그 터무니없는 마력 재능이 이해가 갔다.
그건 그렇고 샤를은 민하에게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왜 나한테까지 비밀로 했어?”
“처음에는 누구에게도 비밀로 하려고 했어. 하지만 샤를은 내 가장 친한 친구니까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혹시나 나를 보는 샤를의 시선이 달라질까 봐 겁이 나기도 했어.”
민하는 살짝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야, 강민하. 네 눈에는 내가 고작 그런 친구로 보였니?”
“…아니야. 미안해.”
“하아, 됐어. 네가 하나하나 깊이 생각하고 의미 부여하는 타입은 아니란 건 아니까.”
“샤를…….”
샤를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고는,
“아무튼 내가 처음이지?”
“응?”
“너희 부모님이 마황제 부부라는 사실을 아는 친구는 나밖에 없는 거지?”
“응! 물론이지!”
“그럼 됐어!”
“샤를!”
민하는 샤를을 껴안고 뺨을 부비부비했다.
늘 그렇듯 귀찮다며 밀어내는 샤를이었지만 번져오는 미소를 감출 순 없었다.
샬롯과 샤를은 이 상황을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문제는 실론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긴장이 올라오는 듯 땀샘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방문한 게 실례가 된 모양이에요.”
가이아가 땀을 줄줄 흘리는 실론을 보고 그만 돌아가야 하나 싶었다.
그 반응에 실론은 더 당황하고 말았다.
“아닙니다! 부디 착석해주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하하하.”
“이 새끼, 비정상적으로 당황하는데?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거 아니야? 탈세라든가 밀수라든가.”
멍구가 허둥대는 실론을 트집 잡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정직하게 사업하는 사람이라고요.”
“그럼 왜 그렇게 땀을 흘려? 언제 한번 사무실 들입다 조질 필요가 있겠어.”
“스읍. 멍구야.”
1절 2절까지 하는 멍구가 3절까지 나가려 하자 강철남이 제지했다.
“짜식. 긴장 풀어. 우리가 잡아먹냐?”
“용서하십시오. 제가 저보다 높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다 보니.”
손수건을 세 개째 꺼내어 쓰며 흥건한 땀을 닦아내던 실론이 멍구의 장난에 조금 긴장이 풀린 듯 한층 편안하게 숨을 쉬었다.
“휴, 이제 좀 나아졌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마황제님과 마왕님이신 줄도 모르고 무례하게 갑작스러운 초대를 보내서 말입니다.”
“그래, 그건 좀 나빴어. 철남이가 성질이 조금만 더 더러웠더라면 아마 네 사업체는 하루아침에 다 무너지고 너는 길바닥에 나 앉았을걸?”
멍구의 팩트 폭력에 실론은 할 말이 없어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하하하. 이제 서로 쌓인 거 없기입니다. 자, 고개 들고 식사나 계속하지요.”
“좋아요. 이런 숨 막히는 분위기는 저도 싫어요. 그럼 재밌는 얘기 할까요? 마황제님과 마왕님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천진난만한 샬롯이 분위기를 확 바꿀 수 있는 대화 주제를 꺼냈다.
가이아는 얼굴이 살짝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강철남도 쑥스러운 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
둘이 처음 만난 때라면 크레톤의 사천왕과 싸우던 가이아를 강철남이 구해줬을 때였다.
그때 날려버린 마왕성을 재건하는 동안 둘 사이에 호감이 싹 텄고 서로의 사정으로 잠시 헤어졌으나 결국 거부할 수 없는 인연에 천년해로를 약속한 것이다.
“정말 낭만적이에요! 이건 책으로 만들어 출간해도 대박이겠어요!”
“책을 좋아하시나 봐요.”
“그럼요! 저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답니다. 남편과 달리 돈을 많이 벌거나 이것저것 손대는 건 적성에 안 맞아서 좋아하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나만 하고 있어요!”
“우리 민하도 헤라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언젠가 책을 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기도 했지요.”
가이아는 민하를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민하는 엄마가 자기 꿈을 기억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민하야, 책을 내고 싶다면 언제든 말만 하렴. 책을 내는 방법에 관해 알려줄게. 혹시 아니? 마계 최연소 작가님이 될지.”
“작가…….”
그 두 글자의 단어에 감명을 깊게 받은 듯 민하는 혼자 중얼거리며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꿈 많은 딸을 보며 강철남과 가이아는 가슴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으흠.”
그때 갑자기 실론이 헛기침을 했다.
무르익은 분위기를 깨는 건 좀 실례였지만 본격적인 화제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오늘 모인 건 다름 아닌 아이들의 현장 체험 학습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마황제님. 이번에 샤를이 민하와 인간계에 가고 싶다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소. 이번 나들이는 두 분의 의견이 가장 중요할 것 같소. 우리야 민하라면 안심이고 멍구를 호위로 붙이니 더 걱정할 게 없을 것이오. 저희는 샤를의 안위를 걱정하는 두 분의 결정에 따를 뿐이오.”
실론은 이때만큼은 강철남 부부의 지위를 잠시 잊고 샤를의 아버지로서 생각했다.
사실 처음엔 샤를이 인간계에 다녀오고 싶다는 무모한 부탁을 했을 땐 단칼에 거절했었다.
하지만 샤를의 설득을 듣고 열린 생각으로 고민해보니 딸의 장래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일임이 분명했다.
문제는 안전이었다.
아무리 믿음직한 호위가 붙어도 걱정되는 건 아비로서 당연한 마음.
“마황제님. 단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샤를에게 아무런 해도 없을 거라고 장담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까까지 땀을 쏟아내며 당황하던 실론의 모습은 없고 진중한 각오를 다진 딸바보 아빠만이 있었다.
강철남은 딸을 아끼는 실론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적을 하나 꺼내어 드는데,
[위기 탈출]
“장담하오.”
부적이 팔랑팔랑 날아가 샤를의 몸에 붙더니 신비한 빛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이건 뭔가요?”
“내가 도술을 걸었단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위기 탈출!’이라고 외치거라. 그럼 어떤 상황이 와도 안전할 거란다.”
“감사합니다!”
자기 몸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황제의 말만 들어도 든든한 기분이 든 샤를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저도 감사드립니다.”
실론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디저트를 먹으며 인간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철남이 풀어주는 이야기보따리에 샤를은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다.
마계에서만 살아온 아이에게 인간계는 환상의 나라 같은 곳이었다.
언어로만 떠나는 여행이 이토록 신나는데 직접 가보면 얼마나 대단할까.
“기대된다, 그치, 샤를?”
“응. 얼른 주말이 왔으면 좋겠어.”
모험을 기대하는 두 소녀의 눈에는 먼 길을 내다보는 별빛이 반짝였다.
* * *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말이 찾아왔다.
“다녀오겠습니다!”
“재밌게 놀다와, 우리 딸.”
“멍구도 민하를 잘 지켜주거라.”
“걱정 마셔.”
엄마 아빠에게 인사를 올리고 민하와 멍구는 집을 나섰다.
집 근처에 알베르토가 마차를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민하 아가씨.”
“안녕하세요. 알베르토!”
들뜬 민하를 보자 알베르토도 그 기운을 전해 받은 듯 미소가 지어졌다.
마차를 타고 샤를의 집으로 향하는 민하.
멍구를 꽉 끌어안으며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켁! 민하야, 숨 막혀.”
“히히. 좋아서 그래.”
힘차게 구르던 마차는 금방 샤를네 집으로 도착했고, 내색은 하지 않지만 들뜬 게 분명해 보이는 샤를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샤를!”
“오늘 확실히 놀 준비는 됐지?”
“응! 물론이지!”
“그럼 가자.”
샤를은 민하와 멍구를 데리고 어느 방으로 향했다.
그곳은 실론이 입수한 마도구가 있는 방이었다.
“우와, 신기하게 생겼다.”
작은 신전처럼 네 개의 기둥과 그 한 가운데에 마법진이 그려진 발판이 있는 마도구.
그것은 공간 전이를 하는 마도구였다.
공간 전이 마도구는 매우 진귀한 아이템으로서 현재까지 소유자로 알려진 바로는 카르텔과 실론, 이 두 마족밖에 없었다.
“이것만 다루면 어디로든 갈 수 있어.”
“그냥 내 공간 이동 도술로 가면 금방일 텐데.”
“하나부터 열까지 민하네한테 맡기면 자존심 상한다구. 이쪽도 대단한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
샤를은 마도구 기둥에 마력으로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전이 장소는… 인간계… 북한… 산…….”
마력을 다 새긴 샤를은 폴짝 뛰어 민하와 멍구가 기다리고 있는 마법진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괜찮은 거 맞지? 막 과거로 돌아가고 그러는 거 아니야?”
“시간 이동까지 하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혁신이지. 엄청난 거액에 팔릴 거야.”
“발상 보소. 누가 사업가의 딸 아니랄까 봐.”
“그럼 출발한다.”
샤를과 멍구가 말을 멈추고 침을 꼴딱 삼켰다.
민하도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출발”
샤를이 바닥을 향해 마력을 내던지자 강렬한 빛이 셋의 몸을 휘감으며 그들의 몸을 어디론가 날려 보냈다.
* * *
살짝 눈을 떠본 민하는 어느새 풀숲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성공한 것 같아!”
“으으… 머리야. 민하야 넌 괜찮니?”
샤를이 살짝 머리가 지끈 거리는지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난 괜찮아. 샤를, 많이 아파?”
“멀미가 났을 뿐이야.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야.”
“응, 많이 힘들면 말해. 치료해 줄게.”
민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멍구를 찾았다.
다행히 멍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산 아래 경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멍구야, 오랜만에 북한산에 와서 추억 돋니?”
“…아니야.”
“응?”
“여긴 북한산이 아니야.”
“뭐라구? 그럼 여긴 어딘데?”
그때였다.
웬 군복을 입은 군인이 총을 겨누며 나타났다.
“꼼짝 말라우!”
“뭐여.”
“손 들으라우. 간나 새끼들. 니들 뭐하는 아새끼들이래?”
“…….”
“…….”
민하와 멍구는 말문이 막혔다.
“멍구야, 저 아저씨 말투가 왜 저래?”
“민하야. 아무래도 잘못 온 거 같아.”
“정말 여기가 북한산이 아니야?”
“북한산은 북한산인데…….”
둘이서 속닥대는 꼴을 못 본 군인이 노리쇠를 후퇴 장전하며 윽박질렀다.
“손 들라는 소리 못 들었니? 이 반동분자 새끼들.”
멍구는 확신한 듯 한숨을 쉬었다.
“북한, 산이야. 북한에 있는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