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민하의 밥상머리 참교육
“아마 있을 겁니다.”
베거는 확신은 못 하지만 희망의 여지를 남기듯 말했다.
“근거가 있소?”
궁금한 듯 묻는 강철남의 말에 베거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근거는 없지만, 심증은 있습니다. 인간들에겐 마족과 신령, 천계인들조차 가지지 못한 힘이 있다고 막연히 느낄 뿐입니다. 그건 마족인 저로서는 깊이 이해할 순 없지만요.”
“흠, 그런가.”
“하지만 인간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 이것을 증명하는 가장 훌륭한 표본이 있지 않습니까?”
“응? 그런 게 있나?”
“바로 마황제님이십니다. 인간으로서 마계의 최고 권위자가 되셨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랬다.
강철남은 자기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라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단순히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란 건 알 것 같았다.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구만.”
“저도 최선을 다해 연구해보겠습니다.”
“고맙군. 그리고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네만.”
“뭐든 물어보십시오.”
“혹시 실력 좋은 의사를 알고 있나?”
베거는 뜬금없는 질문에 살짝 알쏭달쏭했지만 마침 자기가 아는 한 최고의 의사가 이곳, 벤티 학원에 있었다.
“저희 하림 선생님께서는 전직 의사셨습니다. 아주 실력이 훌륭하셨죠.”
“오호, 그 양반이.”
“그런데 어쩐 일로 의사를 찾으십니까?”
강철남은 빙그레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인간계와 마계의 화합 계획을.
그 첫 번째 방법으로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의학적 한계를 극복해줄 생각이었다.
“과연! 인간계로 넘어가 불치의 병을 치료하고 그들의 고민을 해결해준다면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겠군요.”
“가장 중요한 건 하림 선생의 생각일 테니 직접 물어보고 싶소.”
“곧 불러오지요.”
베거는 푸른 새를 소환하여 문밖으로 날렸다.
그 소환 마법이 전해지자 하림 선생이 곧 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하림 선생은 예를 갖추며 다시 허리를 숙였다.
강철남은 하림 선생에게도 마계와 인간계의 화합 계획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던 하림 선생도 이 계획에 무척이나 관심이 생겼는지 약간 벅차오르는 표정이었다.
“참으로 위대하신 생각입니다, 마황제님.”
“공감해주셔서 고맙소. 이 계획을 위해서는 우리에겐 하림 선생의 힘이 필요하오. 혹시 힘을 빌려줄 수 있겠소?”
강철남의 권유에 하림 선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에 한 획을 그을 역사적인 사건에 동참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안을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뭐든 괜찮소.”
“의술을 집도하려면 조수가 필요한 법이오. 실력 있고 나와 마음이 잘 맞는 조수가 말이오.”
“조수가 필요하면 구해드리리다.”
“저는 그 조수를 강민하 양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우리 민하가?”
하림 선생의 전혀 예상 못한 발언에 베거와 강철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왜 하필 우리 민하요?”
“아시다시피 민하 양은 잠재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그 힘이라면 어느 분야에 가더라도 훌륭한 업적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일이 의술이라면, 그것도 인간과 마족의 화합을 위한 일에 쓰인다면 이보다 더 귀중한 공부가 또 있을까요.”
하림 선생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선택은 마황제이자 아버지인 강철남이 내려야 했다.
“의술을 익히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소?”
“민하 정도의 재능이라면 1년만 공부해도 수준급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강철남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아버지지만 이건 본인 독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하의 마음이니까.
* * *
강철남은 가족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티타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말할 참이었다.
“할 얘기가 있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일에 관한 얘기야.”
가이아는 강철남의 손을 잡으며 지지를 보내주었다.
“나는 마계와 인간계가 함께 어울려 사는 세계를 만들고 싶어. 언젠가 또 나쁜 마음을 먹은 마족이 인간들을 괴롭힐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인간과 마족은 친구 관계라는 걸 분명히 해두고 싶어.”
“멋진 생각이다, 철남.”
“고마워. 하지만 아마 쉽지는 않을 거야. 마족들이 인간계를 먼저 침략했고 인간들은 아직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마족들의 사과는 아마 길고도 험난한 길이 될 거야.”
“나 같아도 먼저 때린 새끼들이 사과하면 빡칠 것 같은데.”
“스읍, 멍구야.”
강철남이 멍구를 꾸짖자 멍구가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한다.
“좀 투박하긴 해도 멍구의 말은 틀리지 않았어. 그러니까 마족들은 더 큰 성의를 보내야 해.”
“우리가 무얼 해 줄 수 있겠나?”
“그래서 생각한 게 먼저 의술 지원이야. 인간계에는 아직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들이 많아. 하지만 수준 높은 마법이라면 치료할 수 있지.”
“의료 지원이라니. 좋은 생각이다.”
“그렇지 않아도 벤티 학원의 하림 선생이라는 마족이 상당히 실력 좋은 의사 출신이라더군.”
“우와, 하림 선생님!”
민하가 마음에 드는 하림 선생의 이름이 나오자 기뻐했다.
멍구는 치킨 선생의 오동통한 닭다리살을 떠올리며 침을 츄릅 흘렸다.
“그런데 한 가지 제안을 했어.”
“그게 뭔가?”
“민하를 조수로 삼고 싶다더군. 한 1년간 의료 마법에 관한 지도를 받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해왔어.”
강철남과 가이아는 민하를 바라보았다.
멍구는 1년간 의학 공부를 해야 할 민하를 바라보며 넌더리가 났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빠, 그건 좋은 일이에요?”
“인간을 돕는다는 점에서는 좋은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 하지만 민하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쁜 일이 될 수도 있어. 명심하렴, 민하야. 좋고 나쁨은 남이 판단하는 게 아니란다. 민하 스스로의 마음에 물어봐야 한단다.”
강철남은 부드럽지만 합리적으로 대답해주었다.
“음… 그러면 재미있을까요?”
“공부가 항상 재미있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민하가 펼친 마법으로 인간의 병을 고치고 슬퍼하는 가정에 웃음을 가져다준다면 그건 재미쯤은 가뿐히 뛰어넘는 기쁨을 줄 거야.”
민하는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 강철남과 가이아가 마주 보며 웃었다.
“우리 딸이니까 뭐든 원하는 건 다 이룰 수 있을 거란다.”
아빠의 말을 듣고 민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작은 머리에서는 온갖 생각과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마침내 민하가 내린 결정은,
“해볼래요!”
그렇게 민하는 학교를 마치고 하루 두 시간 하림 선생에게 의술을 배우게 되었다.
하림 선생은 처음에는 세 시간을 제안했으나 강철남과 가이아는 민하에게 무리한 공부를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귀중한 첫 임무를 맡은 인재이긴 하지만, 그 전에 민하는 부부의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딸의 인생을 희생하여 목표를 이룰 생각 따윈 없으니까 말이다.
민하는 학교에서도 열심히 수업에 집중했다.
마력을 다루는 솜씨가 늘어 칭찬을 들으니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고 그 마음으로 노력하니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특히 헤라 선생님의 문학과 역사 수업은 벤티 학원의 어떤 선생님보다도 재밌는 수업 시간이었다.
민하는 언젠가 꼭 교과서에 실리는 문학 작품을 써보고 싶다는 꿈까지 생겼다.
“강민하, 타.”
“헤헤, 고마워.”
학교를 마치면 민하는 샤를의 마차에 올라타 벤티 학원으로 향했다.
샤를은 민하와 함께 벤티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항상 홀로 학교와 집을 오고 가던 샤를의 마차는 아침에는 민하의 집 근처, 방과 후에는 벤티 학원으로 향했다.
샤를의 집사 알베르트는 부쩍 말수도 늘고 웃음도 많아진 샤를 아가씨를 보며 민하 아가씨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샤를, 너는 벤티 학원에서 어떤 수업을 신청했어?”
“나는 경제 수업을 신청했어. 언젠가는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상권을 만들 생각이거든.”
“우와. 그렇게 되면 크레톤의 시장은 모두 샤를 게 되는 거니?”
“그릇이 작구나? 크레톤 뿐만이 아니라 카르텔의 상권도 모두 내가 차지할 거라구.”
“대단하다. 그럼 청수 폭포 뒤편에 있는 몬스터 시장도 샤를 게 되겠다!”
“뭐? 거긴 어딘데? 설마 아직도 내가 모르는 시장이 있을 줄이야.”
민하는 예전에 멍구와 함께 놀러 갔던 인간 세계 북한산의 청수 폭포 몬스터 시장을 떠올렸다.
유일하게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마계 수송단이 다니는 곳.
카르텔, 가이아, 크레톤, 멍구. 이 네 개의 대표 도시들의 특산물들이 모두 모이는 마족들의 화개장터 같은 곳.
민하는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짜릿한 흥분을 샤를에게 설명해주려 애를 썼지만 모두 전하기에는 어려웠다.
“으으… 안 되겠어. 우리 이번 주말에 같이 놀러 가보자.”
“뭐? 인간계에 가보자고?”
몬스터 시장에서 느꼈던 즐거움이 말로 다 표현이 안 되자 답답했던 민하는 결국 직접 가보자고 제안했다.
“응. 분명 재밌을 거야!”
호기심에 초롱초롱 빛나는 민하의 눈빛을 보면 그 누가 안 된다는 말을 꺼낼 수 있겠나.
“으음. 물론 경영 공부를 위해 시장 견학은 중요한 법이지.”
“멍구도 데려가면 엄마 아빠도 허락해주실 거야.”
“당연하지. 다른 누구도 아닌 마왕이 경호원으로 붙는 건데.”
샤를은 다시 한번 마왕을 반려견으로 키우는 민하네 가정이 신기했다.
“그럼 나도 부모님께 말씀드려볼게.”
“응! 잘 됐으면 좋겠다!”
민하는 샤를과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며 학원에 도착했다.
샤를은 경제 수업 교실로 갔고 민하는 하림 선생과 함께 의술을 공부했다.
“민하 양. 마력을 활용한 의술은 인간의 의술과 아주 다릅니다. 인간의 의술은 생물학이라는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지만 마법은 환자의 몸에 흐르는 기를 느끼는 법이죠.”
“기요?”
“네 맞습니다. 민하 양은 다양한 기를 가지고 있지요. 마력뿐만이 아니라 도력과 신력 또한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에게도 그런 기가 있습니다. 그것을 무어라 부를지, 또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 없지만요.”
하림 선생은 인간의 몸에 흐르는 기에 관해 설명했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 인간의 기라는 것이 바로 마황제가 찾고 있는 인간만의 힘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 판단에 앞서 신중할 뿐이었다.
“건강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기는 다릅니다. 민하 양은 앞으로 환자의 기를 느껴보고 흐트러진 부분의 기를 다스리는 수업을 받게 될 겁니다.”
“네!”
실습 위주의 수업에 민하는 안도했다.
지루하게 책만 보는 수업이었더라면 뛰쳐나왔을 것이다.
수업은 생각 이상으로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환자의 몸에서 기가 흐트러진 부분을 찾는 섬세함은 아직 부족했어도, 다친 기를 치료하는 능력은 천재적인 수준이었다.
하림 선생은 민하의 출중한 능력을 보며 놀란 동시에 흐뭇해했다.
* * *
그날 저녁 민하가 집에 돌아와 손을 씻고 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어라?”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집 앞에서 부르고 있었다.
“알베르토 아저씨?”
“민하 아가씨. 또 뵙는군요.”
“어쩐 일이세요?”
“오늘 샤를 아가씨와 몬스터 시장에 놀러 가신다는 이야기를 나누시지 않았습니까? 아가씨께서 그 이야기를 주인님께 말씀드렸더니 민하 아가씨와 부모님을 뵙고 싶다고 모시고 오라셨기에 이렇게 왔습니다.”
알베르토는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시를 내린 샤를네 부모의 방식은 다소 무례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다짜고짜 호출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통보식의 부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강철남도 가이아도, 심지어는 멍구조차 눈치채고 있었다.
샤를의 부모님은 강철남네 가족을 살짝 깔보고 있다는 것을.
“철남.”
가이아는 강철남의 손을 잡았다.
살짝 신경이 거슬렸다는 감정이 전해졌다.
“강철남 패밀리. 준비하자.”
강철남 가족은 외출 준비에 들어갔다.
멍구는 샤를 부모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궁금해서 벌써부터 킥킥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