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최초의 죄인
크레톤의 모습은 기괴하게 변해있었다.
이미 마계에서 보았던 위엄 넘치는 강철의 용족이 아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강철남.”
비늘은 군데군데 흠집이 나 있는데다 거칠게 벗겨져 있었다.
꼭 폐차 직전인 차량같이 꼴이 사나웠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생생한 광기로 번쩍이고 있었다.
“너는 왜 여기까지 떨어진 것이냐?”
“강해지기 위해서다. 지옥의 밑바닥에서 수련하여 언젠가 너를 죽이러 찾아가려 했다.”
“무모하군. 지옥에 떨어진 이상 나와 만나는 건 불가능할 텐데.”
“하지만 결과적으로 네놈이 이 지옥에 오지 않았나. 계획대로라면 천계를 휘저은 후 마계로 가려고 했거늘 조금 이르지만 여기서 널 죽여주도록 하지.”
크레톤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온몸에서 강철 가시를 뿜어냈다.
고슴도치처럼 가시 갑옷을 두른 녀석은 강철남을 향해 돌진해왔다.
“참교육을…….”
주머니에서 강철 숟가락을 꺼내려던 강철남은 그제야 민하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빈틈을 허용한 순간 크레톤은 강철남의 몸통에 박치기를 날렸다.
콰앙!
“네놈의 피를 보니 지옥 생활을 보답받은 기분이다.”
[강철 가시]
크레톤의 강철 가시가 더 뾰족하고 굵어졌다.
가시가 몸에 박힌 강철남의 상처는 더욱 벌어졌고 출혈이 심해졌다.
“무슨 일이지? 고작 이 정도냐? 피만 철철 흘리고 있는 게 네 작전이냐?”
피를 흘리는 강철남을 보며 크레톤은 희열을 느끼며 조롱했다.
“지옥에서 눈치는 길렀나보군.”
“뭐?”
“그렇다. 피를 흘리는 게 내 작전이다.”
[고체화]
강철남은 자신의 마력, 도력, 신력이 담긴 피를 굳혔다.
그러자 2m가 넘는 거대한 모양의 붉은 숟가락이 만들어지는데,
“씨바, 오래도 기다렸다. 기억나냐? 밥상머리 참교육. 아무래도 그날 교육이 모자랐던 모양이군.”
“어? 자, 잠깐!”
[피의 참교육]
방천화극을 휘두르는 여포처럼 강철남은 거대한 숟가락을 휘둘렀다.
뻐어억!!!
몽둥이에 뚝배기가 깨지듯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크레톤의 가시 갑옷이 깨지고 머리통도 깨졌다.
충격에 비틀거리는 크레톤은 눈에 초점을 잃고 의식도 잃었다.
한편, 호세를 물어뜯어 쓰러뜨린 멍구의 눈앞에도 익숙한 녀석이 등장하는데,
“키킥. 구독… 좋아요… 부탁드려요…….”
북한산에 잠입하여 몬스터에게 잠식당한 요괴 너튜버 박준범이었다.
“오, 너 오랜만이다. 우리 집에 와서 가마솥 뒤엎고 깽판 친 새끼 맞지?”
멍구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박준범은 참지 못하고 멍구에게 달려들었다.
“키에엑!!”
파앙!―
여전히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박준범을 향해 멍구는 백스텝 후 뒷발차기로 침묵을 선사한다.
“키켁…….”
“지옥에서는 반찬 투정하면 안 된다.”
뻗어버린 박준범을 정리하고 멍구는 강철남과 합세했다.
둘은 또다시 고요해진 지옥의 정경을 바라보며 섰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 폭풍전야와 같았다.
“탈옥 작전 플랜A가 개같이 망했으니까 플랜B로 밀고 들어올 거야.”
“주도자는 1번인가 뭔가 하는 놈일까?”
“그럴지도 몰라.”
그때 저 멀리서 대규모의 군대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벌떼같이 몰려오는 녀석들은 바로 지옥의 수감자들이었다.
“멍구, 전력은?”
“옘병, 전부 R랭크 이상이야. 지옥에서 수천 년을 썩어 문드러지면서 졸라리 수련만 쌓았나 본데.”
“간만에 진심 좀 발휘해 보자.”
강철남은 힘을 끌어올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메테오]
커다란 불덩이가 몰려오는 군대를 향해 떨어졌다.
불덩이는 큰 폭발을 일으키며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지면을 크게 흔들었다.
깨어진 불덩이는 2차 폭발을 일으키며 뒤따라오는 수감자들을 덮쳤다.
“오오 철남이, 화려한데.”
이에 질 수 없다는 듯 멍구도 공중으로 펄쩍 뛰어올라 힘을 발휘한다.
[신수화]
멍구의 몸이 신성한 빛으로 뒤덮이더니 거대한 빛의 댕댕이가 되어 하늘을 자유로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웅장한 백호가 구름 위에서 내려오는 듯한 위엄에 수감자들은 떨려 주저앉고 말았다.
[빛의 폭풍]
멍구가 입을 벌려 빛의 바람을 쏘아대자 그 폭풍에 휘말린 수감자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전투 불능 상태가 되고 만다.
그 폭풍 속에서 천둥 번개가 내리치며 반격하려는 수감자들은 무력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하늘에서 수감자들을 내려다보던 멍구.
순간 멍구의 동물적인 감각이 위기를 감지한다.
“이런, 씨불!”
멍구를 향해 날아 들어오는 것은 바로 검은 장막.
이 기술은 첫 번째 마왕, 카오스의 기술이다.
[빛의 장막]
멍구는 순발력을 발휘해 검은 장막의 카운터 기술을 발동했다.
“이미 한번 털린 새끼가 똑같은 레퍼토리로 또 도전하니?”
“후후후.”
“이제야 알겠어. 여기 있는 놈들 네 녀석의 [피의 주인]으로 조종당하고 있던 거지?”
“개 주제에 똑똑하군.”
“반려견 천만 시대에 개라고 무시하면 욕먹어, 인마.”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멍구가 바라본 땅 위에는 카오스가 서 있었다.
“너흰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까고 있네.”
“멍구, 넌 내 상대가 안 된다. 강철남을 데려…….”
퍼어억!!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카오스의 뺨다구에 빛의 손바닥, [신장]을 먹여주는 멍구.
“내가 6년간 처 논 줄로만 아나?”
“크윽, 그간 수련이라도 열심히 했나?”
“아니! 처 논 거 맞아!”
“그런데 뭘 그렇게 당당하냐! 나는 이를 갈며 수련했다. 여길 빠져나가 너흴 죽이기 위해!”
카오스는 손에서 검은빛을 응축시켰다.
“우리도 6년간 많은 일이 있었지. 민하도 태어나고 말이야. 그래서 제법 그 생활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거든. 네가 어떤 수련을 겪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은 죽어줄 생각이 없거든.”
[블랙홀]
카오스는 자기의 영혼을 깎아 거대한 블랙홀을 소환해냈다.
그 블랙홀이 빨아들이는 흡입력에 수감자들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멍구도 버텨 보지만 몸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워매, 이거 집에 가져다 놓으면 청소할 때 요긴하겠네.”
“웃기지 마라! 내 블랙홀을 그딴 용도로 밖에 생각 못 하는 거냐?”
그 순간,
“감히 청소를 무시해?”
카오스의 머리 위에 강철남이 다가와 있었다.
“강철남!”
“매일 같이 바닥을 쓸고 테이블을 닦는 가이아의 노고를 무시하는 거냐?”
“뭔 헛소리냐, 이 새끼가!”
머리 위에 있는 강철남을 향해 마탄을 날려보지만, 가뿐히 피한 강철남은 카오스의 머리통을 움켜잡는다.
“다시는 집안일을 무시하지 마라!”
콰앙!
“크아악!”
바닥에 카오스의 머리를 한 번 찍은 후 그의 몸을 블랙홀 안으로 던져버렸다.
“강철나아아아암!!!”
강철남은 품 안에 있는 모든 부적을 꺼냈다.
[봉인]
도술이 발동되자 블랙홀은 부적과 함께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지옥에 있는 새끼들은 대체 얼마나 사회에 불만이 많은 거야.”
“멍구, 1번이라는 녀석을 찾을 수 있겠나?”
“틀렸어. 특별한 냄새가 안 나. 더구나 온통 불쾌한 냄새들로만 가득하고 말이야.”
1번.
지옥에서 가장 강하다 알려진 최초의 수감자.
녀석을 찾아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그때,
“나를 찾는 모양이군.”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척도 냄새도 느끼지 못한 채 접근한 것이다.
“네가 1번이냐.”
“남들은 그렇게 부르더군.”
“네 원래 이름은 뭐지?”
“잊어버렸어. 이름을 불려본 적이 하도 오래되어서.”
강철남은 드디어 1번을 만났다.
녀석은,
“너 인간이냐?”
“그렇다.”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는 지옥의 수감자가 인간이라니.
“귀여운 개로군.”
“뭘 좀 아는구만.”
“맛있게 생겼어.”
“…방금 한 말 취소.”
1번은 농담이라는 듯 옅게 웃었다.
“넌 여기 왜 갇혔냐?”
“모르겠다. 오래되어서.”
“네가 알고 있는 건 뭔데?”
“글쎄.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쯤은 알지.”
“철남이, 이 새끼 아무래도 나사가 두어 개 빠진 것 같은데?”
멍구는 1번과의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혹시 당신은 철학자요?”
“그런 거창한 인물이 아니야.”
“당신은 이 지옥을 나가고 싶지 않소?”
“어딜 가든 마음이 불만족스러우면 거기가 지옥이야.”
강철남은 대화를 나눌수록 이 1번이라는 인간이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사람이 지옥에 있는 걸까.
무슨 악한 죄를 저질렀기에…
“알겠군. 당신은 수감자가 아니야.”
“…….”
“혹시 이곳의 총책임자요? 염라대왕 같은 그런 건가?”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보이겠지.”
의표를 찌르는 강철남의 말에 멍구는 ‘눈’으로 확인해봤다.
“철남이, 이 인간 상태창이 안 떠.”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군.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소. 나는 이곳의 질서를 정리하고자 왔소.”
“그렇다면 이미 정리된 것 같군. 피를 이용해 수감자들을 조종하던 녀석을 쓰러뜨렸으니.”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소.”
그래,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허리케인, 왜 일으킨 것이오?”
“뭐? 이 사람이야?”
강철남의 추궁에도 1번은 여전히 무표정할 뿐이었다.
“…마음이 약해진 것이겠지.”
“그게 변명이 되오?”
“지옥이라도 이름과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로 오래 살아가다 보면 그곳에 동화되어버리기 마련이지. 나는 어느새 이곳의 녀석들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거야.”
1번은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듯이 말했다.
“만약 우리가 막지 않았더라면 천계는 물론이고 마계와 인간계까지 혼란에 빠졌을 것이오.”
“그걸 원했을지도 모르지.”
“당신이 동화된 지옥이라서?”
“그래.”
“당신 역시 죄인이구만.”
“그렇다네. 그러니 나를 그만 해방 시켜주게. 또 허튼짓을 저지를지 모르잖아.”
1번은 양팔을 벌리고 강철남이 자기를 소멸시켜주길 기다렸다.
“잊었어? 여긴 감옥이야. 반성의 여지가 있는 놈들은 교화시키는 곳이지. 널 처분하는 건 옥황상제에게 맡기겠다.”
지옥에 너무 오래 살아 망가져 버린 인간 1번을 그대로 두고 강철남은 옥황상제에게로 돌아갔다.
* * *
강철남은 옥황상제에게 지옥에서의 일을 모두 보고하였다.
옥황상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1번이라 불리는 자는 염라대왕이네. 본디 인간이었던 그를 지옥의 관리자로 임명했지. 본디 생각이 깊은 자라 그 이외에 아무도 버텨낼 수 없는 지옥의 환경 속에서도 단단한 철학으로 꿋꿋이 살아갔다네. 그런데 그 역시 인간이었던지 수감자들에게 정이 들고 말았던 거구만.”
“끄응. 인간이란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네.”
“넌 단순해서 좋겠구나, 멍구.”
“그거 욕이야, 아니야?”
“…아닐걸?”
“찌릿.”
흠흠, 헛기침을 하고 화제를 전환하는 강철남.
“옥형 그렇다면 금정산환을 주실 수 있겠소?”
그 말에 옥황상제는 빙그레 웃었다.
어느새 강철남과 멍구의 눈앞에는 붉은색 나무 상자가 놓여있었다.
“한시가 급한 듯하니 어여 가보거라.”
“이 은혜 잊지 않겠소.”
강철남과 멍구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한지영이 민하와 가이아를 간호하고 있었다.
천계에서 돌아온 둘이 들고 있는 붉은색 상자를 보자 한지영의 표정이 밝아진다.
민하는 살짝 눈물이 고였다.
조선 경옥고, 마계삼, 금정산환.
강철남은 세 가지 약재로 약을 달였다.
마음을 담아 완성된 약을 가이아에게 가져다줄 일만 남았다.
이제 가이아가 깨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