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조선 경옥고
천계와 마계의 중간지점, 영원의 땅.
그곳은 삶을 충분히 누린 엘프들이 엘프의 땅을 떠나 건너오는 생의 종착지다.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엘프들이 평화로이 살아가는 이곳에 웬일로 북적이는 일이 생겼다.
“모두들 모이셨소?”
영원의 땅의 촌장 격인 엘로드가 엘프들을 모아 스윽 훑어보았다.
우로스와 폰토스의 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영원의 땅 모든 엘프가 하던 일을 놓고 도와주러 온 것이다.
“오늘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소. 다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로스와 폰토스의 딸에게 고난을 극복할 지혜가 필요하오. 우리 식견 높은 엘프들의 고견을 나누어주면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강철남은 엘로드의 뒤에 서서 이 고마운 엘프들을 향해 경의를 표했다.
“저는 강철남이라 합니다. 우로스님과 폰토스님의 사위 되는 사람입니다. 지금 제 아내는 광마 도사라는 자의 흡성대법에 당해 기력이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부디 아내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인 강철남.
엘프들은 조용히 저들끼리 의견을 공유했다.
그중 한 수염이 긴 엘프가 입을 여는데,
“흡성대법은 알다시피 환상의 도술이라 그 정보가 많지 않소. 그렇기에 처방 역시 추측에 근거하여 내릴 수밖에 없을 텐데 괜찮겠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든 할 생각입니다.”
“허허. 각오가 대단하군.”
강철남의 굳은 의지에 엘프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아낌없이 터놓았고, 열띤 토론을 끝에 의견을 모았다.
수염이 긴 엘프는 강철남에게 다가와 종이쪽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이것이 치료제라고 확신은 할 수 없소. 하지만 기력을 빠르게 회복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오.”
종이쪽지에는 세 가지 약재와 그 장소가 적혀있었다.
강철남은 고개를 숙여 깊은 감사를 표했다.
이제 할 일은 정해졌다.
* * *
민하는 힘없이 누워있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다.
멍구는 민하를 등에 얹은 뒤 침대로 데려가 눕히고 이불을 꼭 덮어주었다.
펑!
“철남이, 왔는가.”
“별일 없었지?”
“응. 민하는 잠들었어. 방법은 알아낸 거야?”
“엘프들이 지혜를 나눠줬어.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약재들이 유일한 희망이야.”
“좋아. 할 일을 말해줘.”
“멍구와 나는 분담을 해서 약재를 찾으러 갈 거야.”
“이 집은 누가 지켜?”
강철남과 멍구가 집을 비운 사이 집에 변고가 닥친다면 큰일이었다.
누구보다 믿음직한 호위가 필요했다.
“그런고로 키켈, 부탁하겠네.”
“맡겨만 주십시오, 마황제님.”
급작스러운 강철남의 부름에도 키켈은 불만 없이 달려와 자신 있게 장담했다.
“이미 마황제님께 구원받은 목숨입니다. 이 목숨을 바쳐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겁니다.”
“고맙다. 오히려 내가 은혜를 입는군.”
“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제 미약한 힘이 도움이 되어서 기쁩니다.”
마왕의 직무를 잠시 내려놓으면서까지 키켈은 강철남 집의 호위에 긍지를 가졌다.
그만큼 키켈에게 있어서도 이 임무는 영광이었으니까.
“아빠, 어디가?”
“응. 엄마를 치료할 약을 구하러 갈 거란다.”
“멍구도?”
“금방 다녀올게.”
민하는 아빠와 멍구가 나가는 것에 쓸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엄마를 위해 힘든 길을 가려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웃으며 응원했다.
“꼭 엄마를 구해줘. 그리고 무사히 돌아와.”
“약속할게.”
강철남은 민하에게 도술을 걸어 둔 강철 숟가락을 꼬옥 쥐어주었다.
“이걸 들고 아빠나 멍구를 부르면 곧장 달려올 거란다. 우리가 필요하거나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부르거라.”
“응!”
더는 지체할 수 없었던 강철남은 떠나기 위해 민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멍구는 민하의 얼굴에 복슬복슬한 뺨을 비볐다.
펑!
강철남과 멍구는 각자 공간 이동 도술로 흩어지고 집안은 금세 허전해졌다.
“도마뱀 삼촌.”
“…키켈입니다. 그리고 용족이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민하는 아픈 엄마를 위해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지요. 바로 엄마의 손을 잡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일입니다.”
다정하게 웃어주는 키켈의 말을 듣고 민하는 쪼르르 엄마에게 다가가 손을 꼬옥 잡았다.
“엄마, 힘내.”
그 바람이 전해졌는지 눈을 감은 가이아의 눈꺼풀이 사르르 떨렸다.
* * *
강철남이 찾아야 할 약재는 총 세 가지.
그러나 그 세 가지 약재는 모두 각기 다른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첫 번째 약재는 인간계에 있는 조선 경옥고.
조선 시대 어느 임금 시절의 명의가 만든 경옥고로 지금은 왕릉에 묻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것을 찾으려거든 역사적 고증에 밝은 자의 힘이 필요했다.
즉, 강철남에게는 인간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결정했다면 망설일 시간이 없다.
강철남은 곧장 서울 헌터 연합으로 이동했다.
한편 헌터 연합은 구멍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들에 대응하기 위해 인력을 충원했고 그에 따라 서필도의 업무량도 늘었다.
은퇴를 했던 헌터들이 복귀해 몬스터들을 퇴치해주었고 그들을 적시 적소에 파견하기 위해 서필도는 대한민국 지도를 펼쳐두고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쌓아둔 서류 뭉치가 날렸다.
설마 몬스터의 기습인가 싶어 맞설 태세를 하였지만,
“아니, 강철남씨!”
6년 만에 강철남을 보는 서필도가 깜짝 놀라 그를 반겼다.
“오랜만이오. 잘 지냈소?”
바쁜 업무 와중이었지만 무슨 일이 되었건 강철남의 방문보다 중요할 수 없었다.
그야 몇 번이고 인류를 구원해준 강철남인데 어찌 홀대하리.
“어쩐 일이십니까, 갑자기? 우선 이리 앉으시지요.”
“아니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오.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하오.”
“저희의 도움이요?”
강철남에게서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서필도는 바로 자리로 달려가 서랍을 열어 웬 버튼을 눌렀다.
“곧 다들 올 겁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헌터 팀이 서필도의 협회장실로 들이닥쳤다.
“뭐야? 급습이야?”
“이 새끼들, 다 덤벼!”
마치 누가 먼저 도착하나 내기라도 했는지 김성남과 황기민이 문을 박살 낼 기세로 들이닥쳤다.
“협회장님 괜찮으십니까?”
백진섭이 창문으로 들이닥치며 서필도를 호위했다.
열린 창문으로는 단도가 강철남의 목을 노리며 날아왔지만 가뿐히 잡아냈다.
“적은 몇 명이죠?”
한지영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침투했다.
“아니, 적이 아니야.”
너덜너덜해진 문으로 들어오는 홍태진은 놀라운 동시에 반가운 마음이 들어 씨익 웃었다.
“철남씨!”
단도를 날렸던 한지영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다들, 안녕들 하시오.”
“강철나암!!”
미소로 인사하는 강철남을 향해 또 칼을 겨누는 김성남.
하지만 역시 강철남은 가뿐히 칼끝을 손으로 쳐내고 김성남의 팔을 제압했다.
“여전히 건강하군.”
“크윽! 이 자식!”
김성남의 팔을 놓아주며 강철남은 그가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해서 엄청 강해졌음을 느꼈다.
“협회장님, 긴급 호출 버튼을 누르신 이유가 뭐죠? 그리고 강철남씨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뭔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가 보군요.”
홍태진은 이 두 가지 사실을 연결해 강철남에게 급한 일이 있음을 간파했다.
“부탁이 있소. 내 아내가 많이 아픈 상태요. 아내가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약재가 필요한데 그중 하나가 이 인간계에 있소. 하지만 나 혼자서 찾는 건 역부족이오. 그래서 여러분께 도움을 구하고자 하오.”
강철남은 마음을 담아 부탁했다.
그 어떤 미사여구를 덧붙이지 않아도 진중한 목소리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어떤 약재입니까?”
백진섭이 가장 먼저 물었다.
“앗! 내가 먼저 물어보려고 했는데. 걱정말마요, 철남씨. 저희가 꼭 아내분을 위한 약재를 구해다 줄게요!”
한지영이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인간계는 몇 번이나 강철남씨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지금 아무런 힘도 보태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 실격이겠죠.”
항상 그에게 은혜만 입어왔던 홍태진은 드디어 강철남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형님이라 부르면 도와주지.”
“찌질한 새끼가 분위기 존X 깨네.”
심술이 난 김성남이 헛소리를 하자 황기민이 그의 목에 초크를 걸었다.
“필요한 물건은 조선 경옥고입니다.”
“아, 알고 있어요! 아마 왕릉에 있을 거예요!”
“지영 씨가 어찌 그걸 아시오?”
“헤헤. 저 사실 헌터가 되기 전에 고고학과를 나와서 박물관에서 일했었거든요.”
“그런 과거가 있었군. 정말 고맙소. 이 일을 맡아주시겠소?”
“기꺼이요!”
강철남은 선뜻 부탁을 들어주는 한지영의 고운 마음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들을 믿었기에 강철남은 헌터 팀에게 조선 경옥고 탐색을 일임하고 다른 약재를 찾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자, 그럼 다들 야근할 각오는 됐겠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섭씨보다 내가 더 열심히 할 거예요.”
“바까스 한 박스 가져와.”
“먼저 찾는 사람한테 보너스 없수?”
헌터 팀의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그들은 헌터 생활로 단련된 튼튼한 체력으로 지치지도 않고 일에 전념했다.
이제껏 숱하게 구해온 목숨 중에 있었던 역사학자와 문화재청 사람들을 방문해 조선 경옥고의 행방을 캐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알아낸 사실은,
“도굴꾼 새끼들이 물건을 쌔벼갔다고?!”
한지영으로부터 정보를 전해 들은 황기민이 어이가 없어서 소리를 질렀다.
“네, 물건을 실은 배가 지금 부산항을 떠나려 한다고 해요. 부산이랑 가장 가까운 기민씨가 가서 배 좀 세워주세요.”
“어떤 배인데?”
“그게… 컨테이너를 잔뜩 실은 배일 거예요.”
“오케이.”
하지만 산골 출신 황기민은 전혀 몰랐다.
부산항에 컨테이너를 실은 배가 한두 척이 아니라는 걸.
“뭔 배가 주말 마트 주차장보다 빼곡해?”
수두룩한 배들을 보니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복잡하고 머리를 굴리는 건 황기민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 뒤져라!!”
황기민은 편곤을 휘둘러 가장 앞에 있는 배를 작살내버렸다.
“크크크. 이러면 뒤에 있는 배들은 오도 가도 못 하겠지.”
상식 밖의 발상에 부산항에 도착한 한지영은 말문이 막혔다.
“이 또라이…….”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어쨌든 배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결과만 좋으면 됐지, 안 그래?”
“하하하… 반박은 못 하겠네요.”
몬스터들의 소행으로 착각한 선박 직원들은 모두 숨어있었고 그들을 진정 시키며 황기민과 한지영은 선박으로 접근했다.
한지영은 배들 가운데 조선 경옥고를 실은 컨테이너를 발견했다.
“저 컨테이너에 있어요.”
“오케이, 저것도 부수자고.”
황기민이 편곤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자 총을 든 사내들이 그를 막아섰다.
“어쭈. 나랑 한판 해보겠다고?”
“당신들은 도굴을 저지른데다 불법 매매까지 하고 있어요. 이젠 살인까지 하려는 건가요?”
“이봐, 살인은 아니지. 미수에 그칠 거야. 그야 나는 안 죽을 테니. 하하.”
타다다당!―
호탕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황기민의 기세에 겁먹은 녀석들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신속]
[풍압]
빗발치는 총알을 번개처럼 피한 황기민은 편곤을 휘둘러 녀석들을 한 방에 날려 바다에 빠뜨려버렸다.
몬스터들을 상대로 산전수전 공중전 모두 겪은 베테랑 헌터에게 인간 용병쯤은 가벼워도 너무 가벼웠던 것이다.
“조선 경옥고 확보. 이걸로 철남씨에게 작은 보답을 할 수 있겠어요.”
물건을 챙긴 한지영은 활짝 웃었다.
한편, 또 하나의 약재를 찾기 위해 마계로 간 멍구는,
“아, 씨팍쉐키덜!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이렇게 생긴 뿌리를 찾으라고!”
멍구가 종이 쪽지에 그려진 그림을 팔랑랑 흔들며 광분하고 있었다.
두 번째 약재인 마계삼을 찾기 위해 오랜만에 도시 멍구를 방문한 멍구.
하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시비나 걸어오는 건방진 동네 양아치 오크들을 흠씬 두들겨 패서 잔뜩 부려 먹고 있다.
“저 형님…….”
“뭐?”
“죄송합니다! 마왕님!”
“뭐야?”
“정말 마왕님 맞으세요?”
“아니, 이 새끼가 뚝배기가 덜 깨졌나?”
“앗, 죄송합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모습과 달라서요.”
“뭐가 다른데.”
“저희는 털이 검다고 들었거든요.”
“네놈 새끼 코피 터지면 붉은 색이 될 거 같은데.”
“히익! 죄송합니다.”
“됐고, 뭐 좀 찾았어?”
“이거 아닌가요?”
“이건 눈감고 봐도 더덕 뿌리다. 넌 어떻게 이게 마계삼으로 보이냐?”
따악―
“꾸엑!”
한 놈이 딱밤에 널브러지자 다른 오크들이 부리나케 마계삼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때 숲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듣고 누군가 나타나는데.
“너는 누군데 내 숲을 헤집어 놓느냐?”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뭐? 내 숲? 너는 누군데?”
어이가 없어진 멍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흘기며 물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나는 멍구. 도시 멍구의 마왕이다.”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녀석을 보아하니 웬 털이 검은 똥개다.
“너였구나, 겁대가리를 상실한 댕댕이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