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흡성대법과 잘린 손
옥황상제는 천계에서 자라는 천환목의 뿌리로 달인 차를 내왔다.
“이게 그 마력 도핑 약의 재료란 말이오?”
“허허. 원래는 기관지에 참 좋은 차로 유명한데 말이야.”
차를 받아든 강철남은 그 향을 맡아봤다.
씁쓸하고 구수한 향이 백도라지 차와 비슷했다.
한 모금 마시니 감옥에서 마신 먼지들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좋은 차로군.”
“크으. 이런 좋은 나무뿌리로 그런 이상한 약이나 만든다는 거야?”
멍구도 차를 마시며 그 맛과 향에 감탄했다.
“잘못된 신념을 가진 자가 힘을 행사하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법이지.”
옥황상제는 차를 바라보며 광마 도사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봤다.
광마 도사는 인간이 나약한 존재라 한탄하며 마족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마력 도핑 약을 만들어 유통하는 것도 조금씩 인간계를 갉아 먹기 위해서였다.
“마력 도핑 약을 인간계에서 유통하는 이유가 있는가?”
“인간계로 마족들을 끌어들이려는 수작일 거요.”
“철남이, 놈이 감옥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 약을 유통한 거야?”
멍구가 던진 의문은 가장 큰 의문점이었다.
감옥에 있던 녀석이 어떻게 마력 도핑 약을 만들고 유통했을까.
“빙의로 늑대 수인의 기억을 엿보았을 때 봤어. 간수 한 명과 내통하고 있더군.”
“이런, 천계의 관리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로군. 그 간수는 누구였는고?”
“아까 감옥에서 찾아봤는데 진작에 도망쳤는지 없었소.”
“내 놈을 책임지고 잡아야겠구만.”
광마 도사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수감 되어 있으면서도 마력 도핑 약을 제조하고 유통한 조직을 거느린 것도 모자라 마족들을 인간계로 유도하는 계획까지 짠 것이다.
지금 약을 얻기 위해 인간계로 넘어와 행패를 부리는 마족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광마 도사의 꼭두각시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었다.
“상당히 두뇌 회전이 빠른 녀석이로군. 옥형한테 호되게 당한 적이 있으니 더 치밀하게 움직일지도 몰라. 놈은 우선 손을 되찾아서 그 흡성대법이라는 도술을 부리려 하겠지.”
강철남은 녀석이 어떻게 움직일지 가늠해봤다.
우선 대장장이 마법사를 찾아서 의수를 제작할 것이다.
그다음 녀석의 목적은 무엇일까.
“옥형. 혹시 의수를 만들 정도의 솜씨 좋은 대장장이 마법사가 어디 있는지 아시오?”
“글쎄다. 우리 천계에서는 신력으로 물건을 만드는 대장장이들이 있긴 하지만 광마 녀석이 천계에 돌아다닐 것 같지는 않구나.”
“맞는 말이야. 또 돌아다니다가 옥형한테 참교육 당하면 어떡하려고.”
멍구는 차를 홀짝이다가 또 뭔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옥형은 천리안 그런 거 없어? 광마가 어디 있는지 볼 수 있는 기술 같은 거.”
“허허허. 안타깝지만 그런 능력은 없단다. 판타지 소설이 만든 상상력이지.”
강철남은 생각에 잠겼다.
녀석의 흡성대법은 모두가 무서워하는 무시무시한 힘이다.
그런데 그 힘이 민하에게도 있지 않은가.
대체 민하는 어떻게 그런 힘을 타고난 것일까.
“옥형, 내 딸이 말이오…….”
“뭣?! 딸이 있었는가? 이름은 뭐고 나이는 몇 살인고?”
“이름은 강민하. 5살이오.”
“왜 돌잔치 때 안 불렀는가?”
“…안 했소.”
“왜 결혼식 때 안 불렀는가?”
“…안 했소.”
“돌잔치도 안 하고 결혼식도 안 했단 말인가?”
“그렇소.”
“아내가 누구인가?”
“가이아요.”
“남편을 아직까지 살려둔 게 보살이로군.”
옥황상제는 껄껄 웃으며 농을 던졌다.
그러고는 뜨끈한 차를 입에 가져다 대는데,
“우리 딸도 흡성대법을 다루더군.”
“푸흡!”
옥황상제가 뿜은 뜨거운 차는 멍구의 얼굴을 뒤덮었다.
“꺄울!”
폴짝 뛰어오른 멍구와 사레들린 옥황상제 때문에 난리가 났다.
이토록 당황하는 옥황상제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왜 그리 호들갑이오?”
“하마터면 옥황상제가 차 마시다 죽을 뻔했구나.”
“흡성대법을 다룬다는 말이 옥형까지 놀랄 일이요?”
“으음. 그 힘은 아는 만큼 놀라움도 비례한다네.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 깜짝 놀라는데 그치겠지만,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지.”
옥형은 젖은 수염을 닦아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멍구는 벌게진 코를 문지르며 식히고 있었다.
“흡성대법 말고 다른 비범함을 보인 적은 없었나?”
“멍구의 말로는 지맥의 힘을 끌어올려 식물의 성장을 촉진했다고 들었소. 대지의 힘을 다루는 가이아의 능력과는 다른, 그야말로 섭리를 초월한 힘이었 댔소.”
“맞아. 그건 내가 똑똑히 봤어.”
강철남과 멍구의 확언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진 옥황상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천계를 다스리면서도 신령들을 두어 인간계를 지키도록 하였다.
비록 인간계를 직접 관리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존재에 관해 지켜보고 때때로 철학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강철남이라는 인간은 미스터리였고 그에게서 태어난 딸은 더욱 알 수 없는 존재란 말인가.
“철남이, 신력을 어디에서 얻었나?”
“영원의 땅에서 자라는 음식을 받아먹었소.”
“천계와 마계의 중간 위치인 그 영원의 땅 말인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구나. 통과 의례를 거치고 얻은 힘이로군. 그렇다면 자네는 마력, 도력, 신력을 모두 갖추었겠구나. 딸도 마찬가지인가?”
“맞아. 내가 ‘눈’으로 봤어.”
“상당히 축복받은 아이로구나.”
생각을 하느라 옥황상제의 차는 다 마시지도 못한 채 식어 있었다.
옥황상제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을 열었다.
“철남이, 자네의 딸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누구 딸인데. 내 목숨보다 귀하니 당연하잖아.”
“허허허. 흡성대법은 섭리를 벗어난 힘. 그리고 지맥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섭리를 초월한 힘일세. 그런 힘을 가졌다는 건 자네의 딸이 인간계, 마계, 천계를 초월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네.”
“왠지 스케일이 큰데.”
“그런 존재라면 마황제나 옥황상제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존재인 셈이지.”
“오! 우주신 정도 되려나?!”
“우주신이 정확히 무얼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멍구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존재를 가리킨다면 맞겠구나.”
잠자코 듣고 있던 강철남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민하가 어떤 존재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한 존재로 키워가고 싶소.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졌는지 시험해 볼 기회조차 없도록 말이오. 방해하는 녀석이 있다면 내가 쳐부술 거요.”
“허허. 항상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던 철남이가 이제는 진짜 애비가 다 되었구나.”
옥황상제는 늠름해진 강철남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광마 새끼는 어디로 갔을까?”
“마계일 거야. 손을 되찾기 위해 대장장이 마법사를 찾으러 갔다면 천계는 아니고 인간계는 더더욱 아닐 테니.”
“현상 수배라도 걸면 어떨까? 현상금도 두둑하게 걸어서.”
“시간이 오래 걸려. 그 사이 녀석은 손을 되찾을 거야.”
“그렇다면 손을 되찾고 어디로 달려갈까?”
“그야 흡성대법으로 영양분을 보충하러…….”
멍구와 대화를 나누다 그제야 강철남의 머리가 번뜩였다.
“이런 젠장,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깜짝이야. 짚이는 데라도 있어?”
“녀석은 강한 녀석들의 힘을 흡수할 생각이다. 그렇다는 건 4마왕과 마황제를 노릴 거야.”
“엥? 일단 마황제와 마왕, 우리 둘은 여기 있잖아. 그렇다면…….”
순간 멍구의 표정도 굳어버렸다.
“가이아와 민하가 위험해.”
* * *
어느 으슥한 골목길.
광마 도사는 한 마족의 머리를 발로 짓밟고 쓰러뜨린 후 그의 옷을 빼앗았다.
죄수복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거리를 휘적였다.
그가 도착한 곳은 후끈한 열기가 올라오는 대장간이었다.
“주인장 계시오?”
“일이 밀려서 뭘 만들던 이 주일은 걸릴 거요.”
주인장은 손님이 들어온 입구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준비된 대답을 했다.
일이 몹시 바쁜지 쉴 새 없이 손을 놀리고 있었다.
“돈은 원하는 대로 주겠소.”
“돈 문제가 아니오. 고객과의 약속이오.”
“내 무리하게 강요하지는 않겠소. 만약 당신이 목숨보다 약속을 더 중시하는 자라면 말이오.”
예의 없는 손님의 은근한 협박을 들은 주인장은 입구 쪽을 째려봤다.
“그만 가시오. 평범한 대장장이처럼 보여도 내 몸 하나 지킬 실력은 있으니까.”
“그럼 그 잘난 실력 좀 구경해 보실까? 오랜만에 감옥에서 나왔더니 몸이 찌뿌둥해서 말이오.”
광마 도사는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불망치]
용암이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망치가 광마 도사를 덮쳤다.
손님의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깨닫고 곧바로 모든 힘을 쏟아붓기로 한 것이다.
[봉인]
철컥―
광마 도사가 고개만 까딱했을 뿐인데 망치에 붙은 불이 꺼져버렸다.
대장장이가 빨갛게 열이 잔뜩 오른 인두를 들어 휘둘러봤지만 광마 도사의 돌려 차기에 가뿐히 제압당할 뿐이었다.
[결박]
짤그랑―
“아악!!”
광마 도사의 도술로 대장장이는 왼발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치 다리가 돌덩이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내가 요구하는 물건을 당장 만들지 않는다면 나머지 사지도 결박해주지.”
“흥. 그딴 협박에 무서워서 내가 굴복할 줄 아느냐?”
“깨나 강직하군. 가족이 있지?”
“그런 쓰레기 짓까지 할 셈이냐?”
“나도 그러기는 싫어 원래 이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상황이 급해서 말이야. 네 놈 가족들 손가락이 온전하건 말건 따질 때가 아니거든.”
“이 비겁한 새끼!”
“자, 빨리 작업을 시작하자고. 제한 시간은 5시간. 1시간 늦을 때마다 손가락 1개. 안타깝게도 네가 손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나도 약속은 반드시 지키자는 신념이 있어서 말이야.”
그로부터 정확히 4시간 30분 후, 광마 도사의 양손에는 드래곤의 비늘이 뒤덮인 의수가 생겼다.
대장장이의 마법으로 신경까지 연결하여 완벽한 손이 된 것이다.
“훌륭하군. 이 정도면 의사를 하지 왜 대장장이나 하고 있나?”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얼른 돌아가. 네놈 때문에 밀린 일을 처리하려면 정신없이 일만 해야 하니까.”
“멋있군. 조금 쉬고 싶으면 말해. 내가 그 손님을 처치해서 의뢰를 없던 일로 만들어 줄 테니까.”
“그만 가라고 했을 텐데.”
“하하하. 그래, 그래. 나를 빨리 내보내고 싶겠지. 그래야 빨리 기폭 마법을 가동할 것 아닌가.”
“무, 무슨 소릴?”
“내가 그것도 눈치 못 챌 줄 알았나? 이 의수에 폭발 마법을 심어 놨다는 걸.”
대장장이는 호흡이 가빠지면서 눈이 시뻘게졌다.
“이렇게 된 이상 같이 죽는 거다. 너 같은 놈을 이 세상에 풀어 놓을 수 없으니까.”
“자폭인가? 열사 납셨군.”
[폭발]
대장장이는 의수에 심어둔 기폭 마법을 발동했다.
하지만,
“왜 안 터지지?”
“내가 먹어버렸거든. 반신반의했는데 역시 능력은 죽지 않았어.”
“먹었다고? 내 마법을?”
“손도 받았고 능력 테스트도 도와줬으니 목숨은 살려주지. 어때, 고맙지? 거스름돈은 가지라구.”
광마 도사는 웃으면서 사라졌다.
대장장이는 자기가 악마를 부활시켰다는 죄책감에 울부짖었다.
“이제 식사나 하러 가볼까.”
손을 되찾은 광마도사는 힘을 키우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맛있는 건 제일 먼저 먹는 타입이니까 마황제를 먹으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