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멍구가 혼자 다니면 생기는 일
깡깡깡!
던전이 되어 버린 63빌딩에서는 대장간에서나 들릴 법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이구! 내 머리야!”
“지, 진정하십시오, 마황제님!”
뒤늦게 마황제의 똘기… 가 아니라 위엄을 알아챈 몬스터들이 뒷걸음질을 치며 목숨을 구걸했다.
“질문은 하나다. 5살 된 하프 엘프 여자아이를 못 봤나?”
“못 봤습니다요! 죽어도 정말로 못 봤습니다요! 만약 찾으신다면 저희가 찾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요!”
“너희들이? 퍽이나 도움 되겠다. 그나저나 네 놈들은 여기 인간계까지 뭐 하러 왔냐?”
“그건…”
강철남의 물음에 뚱뚱한 오크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우물쭈물 뜸을 들였다.
따악!
“으아악!!”
강철 숟가락이 오크의 손가락을 때리자 으득 소리를 내며 손가락뼈가 작살났다.
“발가락까지 합하면 19개 남은 거 알지? 처신 잘하라고.”
“약! 약을 구하러 왔습니다요!”
“약? 무슨 약?”
“마력 도핑 약입니다요. 마력을 뻥튀기해주는 아주 비밀스러운 물건이죠.”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아마 두루미 신령과 냥고를 덮쳤던 자객 녀석이 먹었던 마력 도핑 약.
그딴 약이 요즘 같은 시대에도 줄곧 유통되고 있었다니.
“그걸 이 마황제가 몰랐다는 건 좀 기분이 나쁘군. 그거 만들어 파는 놈들 누구야?”
“그건 저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요. 항상 동네 건달들을 중계해서 파는지라 제조자와 생산지에 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요. 정말 입니다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약을 제조하는 녀석들은 제법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다.
“설렁설렁 마실 나온 기분으로 돌아다닐 때가 아닌 것 같군. 빨리 민하를 찾고 돌아가야겠어.”
강철남은 강철 숟가락을 뾰족이 세웠다.
그리고,
[초광속]
땅을 박차고 던전 안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 미친! 숟가락이 날아온다!”
“도, 돔황챠!!”
마치 터널을 뚫듯이 숟가락으로 던전을 삭삭 긁어내기 시작하자 몬스터들이 난데없이 날아오는 숟가락에 치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던전을 빠르게 훑어 가면서도 강철남은 안에서 민하의 기척을 찾으려 애썼다.
“있다!”
순간 어느 민하의 기척이 묻은 한 소녀를 발견해내고는 무사히 품에 안은 채 던전을 빠져나왔다.
“시봉방 것들. 더러워 죽겠네. 숟가락을 새로 바꾸던가 해야지 원.”
강철남은 숟가락에 묻은 피를 탈탈 털어내며 투덜댔다.
갑자기 벌어진 소란에 그의 품 안에 웅크리고 있던 소녀가 움찔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나는 강철남이라고 한다. 혹시 우리 딸 민하랑 아는 사이니?”
“민하? 아, 아침에 같이 놀았어요. 보물산에서 놀다가 학교를 가야 한다고 가버렸어요. 친해지고 싶었는데.”
소녀는 아쉬운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너는 왜 이런 곳에 있는 거니?”
“누가 보물산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놨더라고요. 왠지 모험의 냄새가 나서 구멍에 들어와 봤더니 이런 곳에 떨어졌지 뭐예요.”
일단 민하는 이곳에 없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이대로 구멍을 방치했다간 이 소녀처럼 엄한 마족들이 피해를 볼지도 몰랐다.
한 시라도 민하를 찾고 이 구멍을 뚫은 녀석들을 일망타진해야 했다.
“너는 집으로 돌아가거라.”
“집에는 어떻게 가죠?”
“걱정 말거라. 다 방법이 있으니.”
[소환술]
촤르륵!
퍼엉!
강철남이 허공을 향해 부적을 날리니 종이로 접은 거대한 학이 나타나 소녀를 등에 태웠다.
“우와! 아저씨, 마법사예요?”
“이건 도술이란다. 신령만이 부릴 수 있는 능력이지. 꼭 붙잡고 있거라.”
강철남의 손짓에 종이학은 하늘을 향해 훨훨 날더니 이내 펑! 하는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종이학이 무사히 마계로 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강철남은 부적 하나를 더 꺼내어 민하의 흔적을 쫓았다.
이번에 민하의 자취가 느껴지는 곳은.
* * *
강남의 고층 빌딩 위에 달린 거대한 스크린 TV.
그곳에서는 긴급 속보가 방송되고 있었다.
-이곳은 강남입니다. 갑작스러운 물폭탄에 강남이 물에 잠겼습니다. 차가 잠기고 물건들이 떠내려가며 사람들은 옥상에 고립되어 구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해의 원인은 급작스럽게 증폭된 마력이 그 이유입니다. 하지만 마력을 다루는 몬스터의 모습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아 시민들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기자의 말대로 강남은 완전히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강남에 물폭탄을 날린 것은 인간을 잡아 먹고 힘을 불린 수해귀(水害鬼).
문제는 녀석이 마력 도핑 약을 먹고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 힘이 완성될 거야. 내 힘이 완성되면 이 인간계는 통째로 물바다가 될 것이야. 우하하하하!!!”
마력이 차차 도핑되어가는 과정을 즐기던 수해귀.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뭐야?!”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돌아보는데 거기에 있는 건,
“얘, 너 괜찮니? 거기 있으면 위험해. 물에 빠지지 말고 여기에 올라타.”
커다란 나무 널빤지에 올라타 두둥실 표류하고 있는 민하였다.
민하의 순진한 눈에는 젖은 미역 같은 머리카락을 축 늘어뜨리고 음습하게 숨어있는 수해귀가 마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위험해? 나더러 위험하다고? 우하하하! 주위를 잘 둘러봐라. 모두 내가 일으킨 물난리에 허덕이고 있는 모습을! 자, 이제 다시 한번 지껄여보거라. 누가 위험하지?”
“뭐? 그러면 지금 여기를 이렇게 만든 게 네 짓이라는 말이니?”
“그렇다면 어쩔 건데?”
수해귀는 민하를 보며 낄낄거렸다.
이제야 자기를 보고 무서워할 민하의 반응이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름 솜사탕]
민하의 손끝에서 신묘한 힘이 모여들었다.
마력과 도력과 신력이 소용돌이치며 합쳐지더니 이내 하늘에서 뽀얀 솜사탕 같은 구름을 피워내는 것이었다.
이내 그 구름은 민하의 힘을 받아 하늘을 뒤덮을 만큼 거대해졌고 곧이어 지상의 물을 모조리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이, 이건 또 뭐야?”
수해귀는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것은 한낱 마족의 힘이 아니었다.
마치 신의 권능에 가까웠다.
마침내 물을 모조리 빨아들인 솜사탕 구름은 먹구름으로 짙어지더니 민하의 손짓을 따라 저 멀리 이동하기 시작했다.
땅은 다시 단단한 바닥을 드러냈고 고립되었던 사람들은 목숨을 구원받았다.
“저 먹구름은 어디로 가는 거지?”
“비가 필요한 곳으로 갈 거야. 엄마가 그러는데 세상에는 비가 안 와서 난처한 땅이 그렇게 많대.”
“…너는 대체 정체가 뭐냐.”
“나는 강민하. 5살. 오늘부터 크레톤 기초 학교의 학생이야.”
“5살?”
수해귀는 어이가 없었다.
본능이 이 아이는 건드리면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구나. 반가웠다. 나는 이제 그만 가보마.”
“잠깐!”
스리슬쩍 빠져나가려는 수해귀는 뜨끔했다.
“아빠가 그랬어.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으음. 이번에는 잘 몰라서 그랬으니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될까?”
“인간계 통째로 물바다가 어쩌고 했었잖아.”
“아, 그건 말이지… 거짓말이었어!”
“그럼 거짓말한 벌을 받아야겠네.”
“어라? 이게 아닌데.”
수해귀는 자기 멍청한 이마를 탁, 쳤다.
“그나저나 너 혹시 뚝배기가 몸에 어딨는지 아니?”
“응? 뚝배기? 갑자기 그건 왜?”
“아빠가 부적 쓰는 법을 알려줬었는데 주문을 써서 뚝배기에 붙이면 된댔어.”
“뚝배기는 머리를 말하는 거야. 그런데 부적을 붙이면 어떻게 되는데?”
“잠깐 기다려봐.”
민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물에 젖은 중국집 전단지를 발견해냈다.
거기에 가방에서 꺼낸 크레파스로 [정화]라는 글자를 적은 뒤,
“자, 이걸 뚝배기에 붙이면…”
수해귀의 이마빡에 부적을 철썩, 붙여버렸다.
“됐다!”
“이걸로 뭐가 되는데?”
“나쁜 짓을 한 만큼 벌을 받는데.”
“응? 뭐, 뭐?! 자, 잠깐만! 안돼! 안돼! 안돼에!!!”
번쩍-
성스러운 하얀빛은 번쩍 섬광을 뿜어내며 수해귀의 육신과 정신을 하늘로 데려가 버렸다.
“…얘는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대?”
시간은 초저녁 무렵.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늘을 보고 시간을 짐작한 민하는 이제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엄마한테 혼날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집에 가고 싶어… 아빠도 보고 싶고, 엄마도 보고 싶고, 멍구도 보고 싶어.”
민하가 슬슬 가족의 품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심전심이라고 그 마음을 십분 헤아린 강철남은 부리나케 민하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멍구 이 새끼는,
* * *
서울 헌터 연합.
이제는 전국의 헌터들을 총괄하는 헌터 본부 기관이다.
그런 곳의 회장을 맡고 있는 서필도는 갑작스런 몬스터들의 증가로 인해 골치가 아팠다.
“으음. 정말 골치가 아프단 말이지. 이럴 때 그들이 있었더라면.”
서필도가 떠올린 ‘그들’이라면 당연히 강철남과 멍구.
그 몬스터 담당 일진들이 있었더라면.
그때였다.
벌컥-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호랑이는 아니지만 개가 왔다.
“여어, 서필도. 오랜만이다!”
멍구가 흙발로 회장실의 카펫을 밟으며 등장했다.
“자네는 멍구가 아닌가? 세상에 이럴 수가! 안 그래도 자네와 철남씨 생각을 하고 있었네.”
“오? 내 생각도 했다고? 왜, 우리가 그리웠나?”
“당연하지. 인간계가 위기에 빠진 이 순간, 누구보다 그리웠다네.”
“이 새끼가. 네 인생도 위기에 빠져 볼래?”
노골적인 서필도의 의도에 멍구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 자. 너무 그러지 말게나.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나.”
서필도가 멍구를 살살 달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멍구 부대의 헌터들은 경악했다.
포푸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위에 선정된 적도 있는 서필도가 쩔쩔매다니.
대체 저 개는 정체가 뭐야?
“그나저나 철남씨는 어디가고 자네 혼자 왔는가?”
“그 치사한 새끼.”
“왜?”
“내가 똥 좀 쌌다고 손절 치더라.”
“똥을 어떻게 쌌는데?”
“…사람 정수리 위에.”
“손절 할 만하군.”
분위기를 전환할 겸 멍구는 엣헴, 헛기침을 하고 부대원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헌터 하나가 마력 도핑 약이 든 가방을 들고 왔다.
“이게 뭔가?”
“엄청난 물건이지. 마력 도핑 약이래. 몬스터들이 암거래 중이던 현장을 덮쳐서 손에 넣은 레어템이야.”
“오호, 마력을 증폭시키는 약이란 말인가. 이걸 연구한다면 헌터 무기의 성능을 극대화 할 수도 있겠구만.”
“어때? 탐나지?”
“연구적 가치가 상당한 물건으로 보이네.”
“성의만 보여준다면 넘겨줄 수도 있어.”
“그 성의라는 게 구체적으로 뭔가?”
작전에 넘어온 서필도를 바라보며 멍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주도를 내게 줘.”
“…응?”
“못 들은 척하지 말고.”
“왜 하필 제주도인가?”
“거기 경치가 끝내주잖아. 내 이름을 딴 도시도 있는데 섬도 있으면 뽀대 나잖아. 이름 하야 멍구도. 멋진 꿈 아냐?”
“음. 자네와 내가 종족이 달라서 서로 이해를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만…”
“방금 개라고 개무시한 거 맞지?”
“무슨 또 피해망상인가? 진정하고 내 얘기부터 들어보게. 제주도는 줄 수 없어.”
“왜? 네가 이 나라 짱 아니야? 대통령도 껌뻑 죽잖아.”
“헌터 협회는 힘이 별로 없어. 구멍이 막힌 후로 몬스터 수가 줄어드니 헌터들도 인원 감축에 들어가고 정부 지원도 줄어들었다네. 자네가 6년 전에 봐왔던 위상과 지금의 우리 입지는 하늘과 땅 차이라네.”
멍구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귀찮게 여기까지 친히 행차해주셨더니만 아무것도 건질 게 없다니.
“에잇! 이렇게 된 이상 대통령한테 가서…”
또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려고 하자,
“제발 멍구야. 제발! 우리 제발 좀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서필도는 멍구의 앞다리를 잡고 애걸복걸했다.
멍구 부대의 헌터들은 대체 저 미친개의 정체는 물론이거니와 뇌 구조까지 궁금해졌다.
* * *
민하는 수해 현장의 복구를 돕고 있었다.
신력으로 순식간에 현장을 깨끗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작은 손으로 물건들을 하나하나 옮기고 있었다.
“영차!”
“도와드릴게요.”
“고마워요!”
“이거 좀 마시고 하세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으쌰으쌰 힘을 합치는 모습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취해버린 것이었다.
‘인간들은 힘이 없어도 서로 힘을 합쳐 강해지는구나!’
그렇게 민하는 감동했다.
오늘 배운 것들 가운데 가장 멋진 공부였다.
“아이고, 우리 꼬마 아가씨도 도와주러 왔어요? 고마워라.”
시민들은 열심히 현장 복구를 돕는 민하를 보며 방긋 웃어주었다.
그 덕에 민하의 마음이 몽글몽글 부풀어 올랐다.
“영차.”
민하가 무거운 쓰레기를 집어서 들려고 할 때,
“내가 들어줄게.”
누군가 번쩍 들어주었다.
“고맙습니다.”
하며 그 사람을 돌아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빠아아~”
강철남은 눈물을 또옥또옥 흘리는 민하의 얼굴을 포근히 안아주었다.
“민하야, 이제 그만 집에 갈까?”
“응!”
민하의 무척이나 길었던 첫 하굣길은 이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