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다시 열린 마계의 구멍
107화 – 다시 열린 마계의 구멍
마차에서 내린 강철남은 소매를 걷고 거대 지네를 덥석 움켜잡았다.
“죄, 죄, 죄송합니다!”
“힘 빼고 가만히 있어.”
강철남이 조금 힘을 주어 밀자 거대 지네는 짐짝 마냥 옆으로 밀려나 버렸다.
“엄마, 이 벌레는 왜 이렇게 커?”
“세상에는 이렇게 큰 벌레도 있단다.”
어느새 마차에서 내린 민하가 거대 지네를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다.
“저기, 꼬마야. 나는 벌레가 아니라 곤충이란다.”
“감히 말대꾸를!”
가이아의 얼음 같은 눈빛을 정통으로 맞자 거대 지네의 의식이 흔들려 기절할 뻔했다.
“이 엄청난 기백… 역시 마왕…”
거대 지네는 입에 게거품을 골골 물면서 탄복했다.
“철남이, 이거 다리 뜯어서 가는 길에 뜯어 먹을까? 입 심심할 때 딱 일 거 같아.”
멍구가 거대 지네의 통통한 다릿살을 보더니 군침을 질질 흘렸다.
“히익! 사, 살려주세요! 다리가 없으면 저는 그냥 지렁이나 다름없어요!”
“그러게 누가 길막 하래?”
“죄송합니다! 다시는 행차하시는 길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거대 지네는 눈물로 호소했고 강철남은 이런 들판에서 시간을 끌기도 안 내켰다.
“바쁘니까 그냥 가도록 하지. 지네, 너는 여기 있는 사체들을 싹 치우도록 해라.”
“네넵!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거대 지네는 땅에 머리를 처박고 복종했다.
그런데 뭔가 궁금한 게 있는 듯 슬금슬금 입을 떼는데,
“그런데 혹시 저 어린 꼬마 아이는 누구신지요?”
사실 민하는 아직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마황제 강철남과 마왕 가이아가 산속에 들어가 살면서 민하를 낳고 조용히 살았으니 아무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누굴 것 같냐?”
멍구가 씨익 웃으며 한 마디 던져주고는 뒤를 돌았다.
강철남 가족의 마차가 힘차게 굴러가고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지네는 그제야 그 꼬마 아이의 정체가 짐작되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래도 이 거친 황야도 새로 개혁이 필요하겠군.”
“여기저기 손 볼 곳이 아직도 남아 있었구나.”
강철남과 가이아는 마계의 소외된 곳들을 둘러보며 아직 마왕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들이 얼마나 척박한 환경인지 몸소 느꼈다.
거친 땅을 지나는 중에 민하는 콧노래를 불렀다.
민하는 어디를 가든 엄마, 아빠, 멍구와 함께라면 그곳이 황무지라도 상관없다는 듯 들떠 보였다.
그런 민하와 함께하니 강철남 부부는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민하야 저기를 보거라.”
강철남이 가리킨 황야의 끝에는 푸릇푸릇한 초목이 펼쳐져 있었다.
호숫가를 경계로 마치 그림 같은 꽃밭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와아! 꽃밭이에요! 멍구야, 우리 저기까지 누가 빨리 가나 경쟁하자. 준비, 땅!”
멍구가 준비도 채 하기 전에 민하가 땅을 차고 달려 나갔다.
나름 속력을 내서 헥헥 대며 뒤쫓아가는 멍구였지만,
“골인!”
민하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멍구가 달리기에서 지다니.
아무래도 점점 민하의 잠재 능력이 점점 더 개방되는 것 같다.
“깨갱. 내가 졌네.”
“그럼, 벌칙!”
“벌칙도 있었어?”
“응, 당연하지. 우움. 벌칙은 뭘로 할까?”
“생각도 안 해 놓은 거니?”
“그래! 꽃 왕관을 만들어줘!”
“정말 그거면 되겠어?”
“응!”
멍구는 꽃밭을 킁킁대며 떨어진 꽃잎들을 주워 꽃 왕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이아와 강철남은 마차에서 내려 점심 식사를 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때,
“샤아아!! 어린아이가 있다니, 점심 식사로 딱이로군!”
웬 건방진 구렁이 한 마리가 민하를 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누가 식사래?”
콩!!
강철남은 핵꿀밤으로 구렁이의 두개골을 박살 내 버렸다.
하지만 구렁이 뿐만이 아니었다.
이 숲에는 민하를 노리는 검은 그림자들이 득실댔다.
“철남, 진정해라. 아무래도 분수도 모르는 자들 같구나.”
“흐음.”
살짝 빡이 친 강철남이었지만 애 아빠인 만큼 민하 앞에서 깽판을 치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렇다면 힘을 쓰지 않고도 제압하면 되는 일이었다.
“마물들은 듣거라.”
강철남이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는 말에 신력을 담은 [언령]을 발동했다.
[언령]이란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에게 따를 수밖에 없도록 하는 권능적인 힘이다.
“마황제가 명령하노니 아무 짓도 하지 마라.”
그의 말에 실린 언령에 압도된 마물들은 공포와 위압감에 얼어붙어 그가 정말 마황제임을 깨달았다.
“히익! 진짜 마황제님이셨어.”
“죄, 죄송합니다! 감히 몰라뵙고.”
“부디 저희 결례를 용서해주시길!”
마물들은 자신들의 무례함에 깊이 사과하면서 얼른 이빨을 거두고 후다닥 물러났다.
검은 그림자들이 사라져 평화가 찾아온 꽃밭에서 가이아는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준비했다.
“그럼 내가 가서 민하와 멍구를 불러올게.”
“잠깐, 철남.”
“왜 그래?”
“둘은 한참 재밌게 놀고 있는 것 같은데…”
“응, 그런데?”
“우리도 잠시 둘만의 시간을 갖지 않겠나?”
가이아가 그 예쁜 눈으로 올려다보며 애교를 부리니 강철남도 차마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을 수 없었다.
“크흠, 그럴까? 간만에 육아에서 벗어날 겸.”
강철남은 가이아의 옆에 앉았고 가이아는 강철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민하가 벌써 5살이라니. 시간이 참 빠르구나.”
“그러게. 걸음마를 막 뗀 게 엊그제 같은데.”
6년 전, 마황제의 업무를 잠시 내려놓은 강철남은 가이아와 함께 멍구를 데리고 조용한 산속으로 들어가 휴양을 하며 지냈다.
그동안 민하가 태어났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 살아온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군.”
“어머, 잊었느냐? 나는 엘프, 영원히 아름다울 존재다.”
가이아는 기분 좋은 듯 후훗, 웃었다.
“그대도 여전히 멋지다. 언제 봐도 반하겠구나.”
초월초를 먹고 젊어진 강철남은 신력을 품게 된 뒤에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멋진 외모는 여전히 출중했다.
분위기가 달콤해지고 둘이 서로의 입술을 마주하려던 그 순간,
“멍! 멍!”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위기가 와장창 깨져 둘은 머쓱하게 웃었다.
“멍구야,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하라!”
민하와 멍구를 부르러 갈 겸 강철남이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그 분위기가 우스꽝스러워지자 가이아는 참지 못하고 또 웃고 말았다.
* * *
초저녁 무렵, 마차는 열심히 달려 교육 도시 크레톤에 도착했다.
강철남은 말을 조심스레 이끌어 도시 뒤편으로 은밀하게 접근했다.
[전파]
마력을 집중하여 강철남은 마왕성안으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그 신호를 감지한 누군가가 헐레벌떡 도시 밖으로 날아왔다.
“마황제님.”
크레톤의 마왕 키켈이었다.
키켈은 오랜만에 만난 강철남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용족인 그는 늠름한 날개를 퍼덕이며 마차가 있는 지상까지 내려왔다.
“용이다, 용이다! 그런데 사람 같이 생겼어.”
민하가 처음 보는 용족이 신기한 듯 키켈의 날개와 비늘을 이리저리 만져봤다.
“마황제님. 이분은 설마?”
“그래, 내 딸 민하라네.”
그러자 키켈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인사 올리겠습니다. 저는 도시 크레톤의 마왕, 키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마황제님의 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웅?”
갑자기 자세를 낮추어 장황한 말을 읊는 키켈의 태도가 어리둥절한 민하.
아빠를 쳐다보며 얘 왜 이래? 하는 표정이었다.
“그만 일어나도록 해. 서신을 봐서 알고 있겠지? 우리는 최대한 조용히 정체를 들키지 않고 살아갔으면 해.”
“네, 모두 준비해뒀습니다. 마황제님의 거처, 그리고 민하님의 학교까지 모두 알아봐 두었습니다.”
“고마워, 고생했어.”
“아닙니다. 이 정도는 너무 약소합니다.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키켈의 안내를 받아 강철남 가족은 크레톤 안으로 들어갔다.
마족들의 눈을 피해 거처로 이동한 뒤 그들은 짐을 내려놓고 한숨 돌렸다.
새로운 집은 크레톤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였다.
게다가 너른 텃밭이 있어 채소를 재배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자연인 가족을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집터였다.
“장소 끝내주는 곳으로 잡았네.”
“기뻐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마황제님께는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무지몽매했던 제 목숨을 살려주신 것도 모자라 마왕이라는 분에 넘치는 자리까지 앉혀주셨지 않습니까.”
“뭐, 그런 건 둘째치고 크레톤을 잘 이끌어준 건 너야, 키켈. 그건 순전히 네 능력이 뛰어난 거야. 자부심을 가져도 돼.”
“아닙니다. 저는 마황제님께서 남겨주신 매뉴얼 대로 했을 뿐. 제 능력만으로는 이 도시가 이토록 훌륭한 교육 도시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짜식, 왜 이렇게 겸손해졌어?”
“하하하. 아무래도 제 위에 아무도 없다 보니 투정이 고팠나 봅니다.”
강철남은 못 본 사이에 듬직해진 키켈과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떠돌아다니는 한 소문에 관해 듣게 되는데.
“마황제님, 혹시 그 이야기 아십니까?”
“무슨 이야기?”
“확증 없이 떠도는 소문이긴 한데 어떤 세력이 인간계와 통하는 구멍을 다시 열고자 한답니다.”
“뭐?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아시다시피 워낙 강하신 마황제님이 마계의 패권을 잡은 후부터 나쁜 짓을 하는 마족들이 기를 못 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인간계로 가려는 거죠.”
“나쁜 짓을 하러 가겠다는 거로군.”
강철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인간계에는 아직도 아름다운 강산이 남아 있으며 민하를 데리고 소풍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웬 잡놈들의 손에 인간계가 농락당하는 건 못 참지.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라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는 법. 키켈, 한 번 조사해보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키켈은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구멍을 뚫으려는 세력들을 찾기 시작했다.
* * *
한편 인간계의 헌터들은 야근으로 혹사당하고 있었다.
갑자기 몬스터들의 수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늘어났기 때문이다.
“X발, 몬스터 새끼들. 어디서 이렇게 자꾸 기어 나오는 거지?”
김성남이 고블린의 목을 찌르며 투덜댔다.
“인간계에 잔존 해있는 몬스터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을 텐데.”
황기민도 오우거의 머리를 박살 내며 의아해했다.
서걱-
“케엑!”
하늘에서 거대한 쥐 대가리가 떨어져 바닥에 철푸덕거렸다.
“옴마야!”
황기민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서 위를 보니 비번인 백진섭이 천으로 환도를 닦고 있었다.
도시에 출몰한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 온 것이다.
“진섭씨, 어제 야근해 놓고는 피곤하지도 않수?”
“몬스터들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다닐 걸 생각하면 잠도 안 옵니다.”
“하여간 사람 참 정의감 넘쳐요.”
그의 열정에 감복한 황기민이 편곤을 들쳐메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만하면 얼추 정리가 끝난 듯싶다.
“이제 그만 돌아가 봐도 되겠지?”
“아직 홍팀장님의 지시를 기다려야 해요.”
“에효, 헌터들 추가로 고용해야 한다니까. 정부 예산 줄인다고 우리만 개고생하고 이게 뭐야.”
투덜투덜 대며 황기민이 널브러진 몬스터의 사체 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백진섭. 강철남에 관한 소식 들은 거 없나?”
“없죠. 벌써 6년이로군요. 그 사람을 못 본 지가.”
“흥, 언제 한번 붙어야 하는데.”
“어딘가에서 낮잠이나 자면서 밭이나 갈고 있지 않을까요.”
강철남을 추억하며 담소를 나누던 백진섭과 김성남의 이어폰에 갑자기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헌터들은 전원 강남역으로 집합!”
홍태진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6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홍팀장님, 저건.”
“그래, 설마 하는 그거다.”
현장에서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본 한지영과 홍태진은 활동하고 있는 현역 헌터들을 모조리 소집했다.
이건 어쩌면 예비 헌터들까지 불러들여야 할지도 모를 사태였다.
그야말로 국가 초비상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구멍이,
다시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