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민하와 멍구의 시장 나들이
청수 폭포 뒤편으로 들어간 멍구와 민하는 수리부엉이를 만났다.
수리부엉이는 여전히 젠틀한 자태로 우아하게 서서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부엉이다!”
민하는 커다란 수리부엉이를 보자 멍구의 등에서 폴짝 뛰어올라 수리부엉이의 몽실몽실한 가슴팍에 폭 안겼다.
“오호, 이 아이는 설마…”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이렇게나 자라다니, 세월 참 빠릅니다.”
“장사는 어때?”
“하하하. 덕분에 잘 되고 있지요.”
마계에 구멍이 막히고 청수 폭포 시장은 몇 달간은 운영이 어려웠었다.
하지만 마황제가 추진한 시장 개혁으로 인해 다행히 손님이 늘어났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듯, 수리부엉이는 게임장을 폐쇄하고 작은 동굴 도시를 건설하여 마족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사업 수완을 발휘해 인간계에 남아있던 마족들이 대거 청수 폭포로 이주를 오도록 만든 것이었다.
시장은 더욱 활기를 띠었고 마족들의 방문도 늘었다.
즉, 청수 폭포 시장은 인간계에서 가장 활발한 마족 커뮤니티가 된 것이다.
“단물 다 빠지고 장사 접고 싶으면 말해. 언제든 환영이야. 마계에서도 좋은 영업장 기대할 테니까.”
“하하. 그때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멍구는 앞장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민하는 축축한 동굴 안을 둘러보며 마치 미지의 탐험을 하는 기분에 두근두근했다.
“멍구야,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멍구는 대답 대신 말없이 씨익 미소만 지었다.
곧 깜짝 놀랄 준비나 하라는 의미였다.
호기심에 들뜬 민하를 데리고 스톤 골렘의 앞에서 패스워드를 입력했다.
톡- 토도독- 톡톡-
쿠르르릉-
스톤골렘이 일어나며 길을 터줬다.
그 광경에 깜짝 놀라 민하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여긴 신기한 것들이 차고 넘쳤다.
“우와!”
“아직 놀라긴 일러. 더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이 곧 펼쳐진다고.”
민하의 눈에 멍구는 환상의 나라로 이끄는 팅커벨처럼 보였다.
“두근두근, 과연 뭘까.”
잔뜩 기대하는 민하의 기대는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물론 그 기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야 바로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몬스터 시장에 온 걸 환영해.”
환상의 나라가 펼쳐졌으니까.
마석이 환하게 빛나는 동굴 안은 마치 무수한 별빛으로 밝혀 놓은 축제장 같았다.
마족들은 활기를 띠며 장사를 했고 맛있는 냄새와 반짝이는 물건들이 손님들을 유혹했다.
6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몬스터 시장을 보자 멍구도 잠시 넋을 잃을 정도였다.
“멍구야, 멍구야!! 우리 빨리 놀러 가자!”
민하가 깡총깡총 뛰며 멍구의 앞다리를 잡고 재촉했다.
“어, 어, 어. 잡아 끌지마.”
앞다리가 잡힌 멍구는 이족보행으로 낑낑대며 민하에게 끌려갔다.
“어서옵셔! 맛있는 도마뱀 구이가 있어요!”
“구경하고 가슈, 드래곤의 가죽으로 만든 핸드백이요.”
“쌉니다, 싸요. 만년 묵은 진짜배기 산삼이 있습니다.”
몬스터 시장은 장사치들의 우렁찬 호객 행위로 열기가 대단했다.
손님들은 5년 전 발행된 마계 화폐로 물건을 샀다.
시장이 활성화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마계 수송단의 정거장이 있기 때문이다.
카르텔, 가이아, 크레톤, 멍구, 이 네 개의 도시의 모든 상품이 모여드는 환상의 시장이다.
즉, 몬스터 시장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와 같은 곳이란 말씀.
상인들은 정식 절차를 거쳐 마계와 오고 가며 물건을 떼왔고, 손님들은 주말이나 휴가를 얻어 이곳으로 쇼핑을 하러 왔다.
“이거 하나 주셔!”
“서비스 좀 팍팍 넣었수다!”
“많이 파셔!”
호황기라는게 실감이 났다.
손님들은 돈을 팍팍 썼고 상인들은 서비스를 팍팍 담아주었다.
시장 개혁이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 낸 듯해 멍구는 절로 흐뭇해졌다.
“멍구야, 이거 뭐야?!”
호기심에 취해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민하는 어느 한 상품에 시선이 팍, 꽂히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이건 달고나잖아? 이게 왜 여기서 나와?”
“허허허, 어서오십시오.”
달고나 집의 주인장은 염소였다.
그가 인기 드라마를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지만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것과 똑샅이 설탕을 녹여 만든 달고나에 별, 세모, 동그라미, 우산 모양의 스탬프를 찍어 늘어놓았다.
“꼬마 아가씨, 어서 오렴. 찍혀 있는 모양대로 떼어내면 하나를 더 준단다.”
“우와, 정말요? 멍구야, 우리 도전해보자!”
멍구는 자기 앞발을 내려다 보았다.
“스읍, 어려울 것 같은데.”
그냥 두 개 사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텐데,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초롱초롱-
민하의 빛나는 저 눈빛을 보고 어찌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나.
“그, 그럼 쉬운 세모로 도전하자.”
“아니, 우산으로 하자!”
“왜 하필 가장 어려운 우산인데?”
“그야 가장 어려우니까!”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멍구였다.
그냥 민하에게 인생은 쉽게 쉽게 살아가는 게 짱이라고 알려줄까?
‘아니야, 그랬다간 애엄마한테 작살이 날 거야.’
결국 우산 두 개를 주문한 멍구.
탁자 앞에 쪼그려 앉아 바늘을 집었다.
“에잇, 옘병! 개 앞발로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열심히 허덕이던 멍구는 간신히 발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럼, 시작한다?”
“오케이, 가자고.”
톡- 톡- 톡-
“아오, 안구건조증 와.”
멍구는 손잡이 하나 따는 데도 눈이 따가웠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 노동에 가까웠다.
민하가 없었다면 육두문자를 남발했을 것이다.
“민하야, 잘 되고 있니?”
반면에,
“만세! 성공이다!”
민하는 1분 만에 우산 모양을 완벽하게 도려내었다.
“뭣?! 벌써 다 했다고?!”
원체 뭐든 잘하는 재능꾼 민하이긴 했지만 이런 소소한 게임마저 잘할 줄이야.
“아저씨, 나 하나 더 주세요!”
“그래, 솜씨가 훌륭하구나. 여기 있단다.”
염소 주인장으로부터 달고나 하나를 더 받은 민하가 날아갈 듯 기뻐했다.
“저리도 좋을까.”
피곤했던 멍구지만 민하가 방방 뛰는 모습을 보니 결렸던 어깨 통증이 싹 낫는 듯했다.
“그 우산 모양 달고나는 안 먹니?”
“응! 가져 갈려고.”
“으이그, 다 녹겠다.”
“히히, 조심히 들고 가면…”
그때였다.
툭-
와그작-
웬 도깨비 몬스터가 지나가다가 민하를 툭 치는 바람에 우산 모양 달고나가 부서지고 만 것이다.
“내 달고나…”
민하가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이건 못 참지.
“야, 인마. 거기서.”
멍구가 부르자 도깨비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뭐야?”
“사과해야지.”
“개가 개소리를 쳐 지껄여? 누가 거기 길 막고 있으…”
콰직-
멍구는 참지 않았다.
도깨비가 땅에 꽂혔다.
몸통이 땅바닥 깊숙이 처박힌 채 대가리만 빼꼼 나와 있는 꼴이 되었다.
“사과는?”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도깨비가 울먹이며 사과했다.
“아이한테 해야지.”
“미, 미안해. 아저씨가 잘못했어.”
풀이 잔뜩 죽어 버린 민하였지만,
“괜찮아요. 달고나 하나 때문에 아저씨를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으니까요.”
“히익!”
민하는 도깨비의 머리통을 잡고 땅에 꽂힌 몸을 쑤욱 뽑아냈다.
“이럴 수가!”
이 작은 아이에게서 어떻게 이런 힘이?
마치 밭의 무를 뽑듯 땅바닥을 잡아 뜯는 민하의 놀라운 힘에 도깨비는 벌벌 떨고만 있었다.
“멍구야, 나 배고파.”
“그래, 밥 먹으러 가자.”
도깨비는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고 허망하게 앉아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개와 쫄래쫄래 뒤따라가는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
서, 설마?
그제야 그들이 누구인지 깨달은 도깨비는 혼절해버렸다.
* * *
살쾡이 식당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주인장의 마케팅 수완이 제법 효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마황제가 앉아서 식사를 하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건 마황제가 드셨던 요리, 이건 마황제가 즐겨 마셨던 술! 자, 자, 줄을 서시오!”
장사가 잘 되니 살쾡이는 아주 신이 났다.
“아주 살판났네. 행복허냐?”
엉덩이를 씰룩씰룩대는 살쾡이의 등 뒤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어라? 너, 너는?!! 아니지, 당신은 마왕…!”
“쉿!”
멍구는 앞발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지금 우린 조용히 놀러 왔거든. 소란스러워졌다간 깽판 칠 거니까 입단속 잘해. 쥐도 새도 모르게 밥만 먹고 갈 테니까 구석진 자리로 안내해줘.”
“네, 네! 그러죠!”
서둘러 주방으로 달려간 살쾡이는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마왕 멍구가 여기에 오다니!
설마 마황제 성지순례 컨셉으로 장사하는 걸 트집 잡지는 않겠지?
긴장된 손으로 살쾡이는 음식을 준비했다.
내놓을 음식은 요즘 최고 인기인 자장면.
어떤 무림인이 연구 개발한 자장면의 레시피를 비밀리에 입수했는데 손님들에게 상당히 반응이 좋은 음식이었다.
“드셔보시지요.”
살쾡이는 자장면 두 그릇을 내놓고 반응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이 꼬마 아이는 누구지?
“맛있어!”
민하가 입가에 검은 자장면을 묻히며 좋아했다.
살쾡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주인장, 거 좀 딱딱하게 굴지 좀 마쇼.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마왕인데 너무 거리낌 없이 지내기가 좀…”
“거, 자꾸 마왕, 마왕 하지 말고 좀.”
살쾡이는 숨죽여 말했다.
멍구는 즉위도 조용히 마친데다 평소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시장에 돌아다니는 멍구를 보고 마왕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어디에나 흔히 있는 개 정도로 볼 뿐이었다.
만일 마왕이 나타났다는 걸 알면 이 시장 바닥이 뒤집어 질 것이다.
“그나저나 여기 이 분은… 설마?!”
“대충 짐작하는 그거 맞아?”
“멍구님이 어찌 사람의 아이를 다 가지고.”
“아니, 이 새끼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끼잉.”
그 사이 민하는 감칠맛이 싹 도는 자장면은 삭삭 긁어먹은 뒤였다.
“한 그릇 더!”
“들었지? 곱빼기로 만들어 오라고.”
“아, 예엡!”
자기 새끼는 아니지만 조카를 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멍구는 민하가 잘 먹는 모습만 봐도 참 배가 불렀다.
“민하야, 밥 다 먹고 어디 갈까?”
“이히히, 여기 있는 모든 곳에 다 들러보자!”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멍구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만해도 허리가 휠 것 같아…“
몬스터와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든 게 육아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멍구와 민하의 꼴이 참으로 볼만했다.
멍구가 육아에 지친 스트레스를 달래기 위해 미친 듯이 플렉스 해버린 것이다.
멍구의 눈에 걸쳐진 선글라스,
머리에 쓴 중절모,
꽃무늬가 빼곡하게 박힌 하와이안 셔츠.
민하는 알록달록한 핑크색 뿔테 안경.
밀짚모자에 샤랄라 한 여름 원피스.
블링블링한 귀걸이에 목걸이에 반지에 큐빅이 박힌 샌들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것도 아주 센스가 개판인 코디로 완벽하게 돈지랄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마왕 멍구의 이름을 딴 도시 멍구.
작은 산속의 오두막집에 멍구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멍구.”
“응…”
차마 눈을 들지 못하는 멍구.
가이아는 어이가 반쯤 나간 표정으로 민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 나 예쁘지?”
한 바퀴 돌며 한껏 자랑스러운 포즈를 잡는 민하를 보자 화난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이 예쁜 딸을 보고 어찌 화를 낼 수 있을까.
어흠, 그래도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야지.
“돈은 어디서 났나?”
“그, 어흠, 탁자에 지갑이 있길래. 그걸로 놀다 오라는 줄 알고.”
“지갑은 서랍 속에 있었는데.”
“크흠, 가이아가 수백 년 살았나? 나이가 들면 원래 기억이 가물가물…”
으드득-
땅속에서 뿌리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X됐다.
이건 식인 식물의 소리다.
’정신차려, 멍구! 주둥아리를 털어!‘
멍구는 전략을 바꿔 강하게 밀어붙였다.
“아니, 민하가 난생처음 몬스터 시장에 갔으면 눈이 돌아갈 법도 하지. 안 그래? 가이아는 민하한테 쓰는 돈이 아까워?”
“그대가 걸친 옷이 더 비싼 옷인거늘?”
“어흠, 원래 개 옷은 더 비싸거든.”
“그대도 그게 개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 뭐랄까, 원래 개소리가 내 특기라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멍구였다.
가이아는 골치가 아팠지만 온종일 민하와 놀아주느라 고생했으니 그만 혼내기로 했다.
창밖에는 해도 저물고 저녁이 찾아오고 있었으니 이제 곧 그이가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밭일을 마친 강철남이 돌아왔다.
“아빠!”
민하가 안기려 달려들었다.
“어이쿠, 아빠 흙투성이라 더러운데.”
“괜차나!”
시원스레 대답하고는 아빠에게 안기는 딸.
민하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꽃이 피었다.
“우리 딸, 오늘은 뭐하고 놀았어?”
“멍구랑 시장 다녀왔어!”
그러고 보니 민하와 멍구의 패션이 색달랐다.
“오, 오늘 멋진데?”
“그렇지?!”
강철남이 진심으로 감탄하자 멍구가 뿌듯해했다.
둘은 괴상한 센스까지 닮은 모양이다.
“이 남자들은 참…”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이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