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우리 같이 살래?
셋의 힘이 하나로 모이자 엘프의 숲이 신록의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영롱하기가 보석 같았으며 온도는 봄날의 햇살 같았다.
우두둑-
땅 밑에서 뿌리가 일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쓰러졌던 줄기에 다시 생명력이 돌아왔다.
“철남, 멍구. 저걸 봐라.”
가이아가 가리킨 나무에서는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수분이 쪽 빠져 죽어버린 가지에도 물기가 촉촉이 채워지고 새순이 올라왔다.
“생명이 다시 자라는구나.”
강철남은 이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했다.
세상 어느 곳을 돌아다녀도 볼 수 없었던 절경이었다.
어느새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마저 들을 수 있었다.
자연의 축복이 다시 엘프의 숲에 찾아온 것이다.
“이럴 수가.”
망연자실 쓰러져있던 엘론은 울창해진 숲을 보더니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엘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다.
“어찌 된 일이긴. 네가 찌질하게 찌그러져 있는 동안 우리가 개 뺑이 친 덕분이지.”
멍구가 다가와 팩폭을 날린다.
“이건 정말이지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어안이 벙벙한 엘론은 여전히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에잇!”
찰싹-
멍구가 갑자기 엘론의 뺨을 때린다.
“아얏! 왜, 왜 그러나?”
“그냥, 존나 때리고 싶은 표정 짓길래.”
“그, 그만 둬.”
“너 저번에 나인이 쳐들어와 숲이 망가진 게 마황제 때문이라고 했지? 그게 무슨 개 같은 논리야. 깽판을 친 건 나인인데 왜 우리 탓을 해? 게다가 엘프의 왕이라는 게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땅을 빼앗기고 주저앉아 있어?”
멍구가 호되게 혼을 내며 앞발을 쳐든다.
“끄응…”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엘론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멍구. 그쯤 해두거라. 적어도 부끄러움은 아는 자 같으니.”
가이아가 막고 나섰다.
“나는 가이아. 두 번째 마왕이자 엘프의 숲에서 나고 자란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다.”
“역시 당신이 그 가이아였군요.”
“나를 알고 있는가?”
“잘 알고 있소. 먼 옛날 나인이 처음 우리 엘프의 숲을 침공하였을 때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그들과 맞선 용감한 전사라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 원로파들의 공작으로 내쫓기긴 했지만 마왕이 되면서까지 엘프들의 터전을 지킨 것에 대해서 많은 엘프가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엘론의 말투는 어느새 공손해져 있었고 두 손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전설 속의 위대한 엘프 소녀를 마주한 영광에 황송하다는 반응이었다.
가이아는 울컥하는 마음이 솟았다.
여태 고향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인정받고 있었구나.
“가이아, 잘 됐구나.”
“응.”
강철남을 향해 돌아본 가이아는 마음을 담아 전했다.
“철남, 그대를 만나 그대를 따라오니 좋은 일만 있구나. 평생 가슴에 묻어두고 살았던 부모님을 만나고 잃어버린 내 옛 명예도 되찾았다. 거듭 감사한 일만 생기는구나.”
“내가 뭘 했다고.”
쑥쓰러워진 강철남은 딴청을 피웠다.
그때 여기저기서 숨어 있다가 풀려난 엘프들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감사드립니다. 저희 숲을 되찾아주시고 살려주셔서.”
“가이아님에게는 오래전 은혜를 입고 이번에도 큰 은혜를 입고 말았습니다.”
“당신들은 저희 엘프들의 영웅입니다.”
엘프들의 감사와 칭송이 끊이질 않았다.
고마운 마음을 누군가는 노래로 전했고 누군가는 음식으로 전했다.
가이아는 노래를 감상했고 멍구는 닥치는 대로 음식을 처먹었다.
그때,
낯익은 엘프 하나가 다가왔다.
“강철남?”
“어, 그…”
누구였더라.
잠시 가물가물하다가 떠오른 얼굴.
“도둑년이로군.”
“세레나다!”
도둑과 합심해 온돌을 훔쳐 카르텔로 가게 만들었던 장본인.
후에 드래곤과 싸우며 헌터들을 돕기도 했던 마법을 쓰는 엘프다.
“아는 여자인가?”
가이아가 전에 없던 싸늘한 시선으로 세레나를 바라봤다.
마치 얼음 마법이 휘몰아치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내 온돌을 훔쳐 갔었어.”
“인간계를 지켜줬다는 얘기는 왜 쏙 빼놓지?”
“내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우쒸, 진짜 인간 맞아?”
가이아는 이 여자가 강철남과 아옹다옹하는 모습에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대는 제법 힘을 쓸 줄 아는 자 같은데 어찌 숨어 있었나?”
“그게… 얻어맞고 기절했었어.”
“그건 어쩔 수 없구나. 와중에 살아남아서 잘 됐구나.”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는 세레나의 이야기를 들으니 가이아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세레나는 가이아와 강철남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읽어냈다.
“그나저나 당신 완전 의외네. 산에 틀어박혀 사는 초식남인 줄 알았는데. 제법이야.”
“초식남? 무슨 소리냐. 나는 고기도 좋아한다.”
“으휴, 말을 말아야지. 가이아님. 저 남자 좀 확 붙들어 매. 끌려다니면 피곤할 거 같은 인간이니까.”
“후후. 고맙다.”
두 여자는 강철남 모르게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대화를 나누었다.
셋이 이런저런 이야기로 떠드는 와중에도 찬사는 이어지고 멍구의 먹방은 계속되었다.
강철남은 이런 낯 간지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슬슬 갈 때가 된 것 같군. 이봐, 엘프왕!”
“네, 마황제님.”
갑작스러운 호출에 깜짝 놀란 엘론이 헐레벌떡 강철남의 앞으로 달려간다.
“엘프의 숲의 묘목들을 챙겨 줄 수 있나?”
“네? 그건 어째서요?”
“마계 전체를 녹색으로 물들일 수목화 계획의 중대한 한 걸음이 될 거니까.”
마계에서도 자연인 생활을 하기 위한 마계 수목화 계획.
그 계획을 듣고 싫어하는 엘프는 없다.
“아주 멋진 계획이십니다. 가능한 최대 수량을 맞춰서 드리겠습니다.”
엘론도 흡족해하며 그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다.
약조도 받아냈으니 이제 정말로 떠날 때가 되었다.
“돌아가자.”
“멍멍! 밥부터 먹자!”
“밥은 아까 영원의 땅에서 먹지 않았는가?”
“고기가 없는 식사는 에피타이저일 뿐이야.”
멍구의 개논리에 가이아는 머리가 아찔했다.
* * *
가이아의 마력과 강철남의 도력과 신력은 조화롭게 마계 곳곳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황폐한 돌산에 잔디가 돋아나고 황무지에 밭을 일굴 수 있는 흙이 생겼다.
서로를 잡아 먹으며 살던 마족들은 작물을 길러 먹기 시작했고
동굴에 숨어 살던 트롤들은 숲으로 나와 새들과 어울려 지냈다.
호수에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바위를 깎아 만든 계곡으로 나들이를 오는 마족 가족들도 있었다.
산과 들.
강과 호수.
마계의 수목화 계획은 100% 아니, 200% 성공했다.
나무를 거쳐 불어오는 바람에 취한 마족들은 마황제의 위업에 감탄하며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냈다.
크레톤의 마왕성에 돌아와 이 모든 걸 지켜보는 강철남과 가이아는 만족감을 느끼며 쉬고 있었다.
“철남. 그대는 이 마계를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뭐, 사실 내 개인 취향으로 꾸민 거긴 하지만.”
이런 게 바로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라 해야 하나.
겸사겸사 좋은 결과가 뒤따른 것뿐이다.
“나는 행복하다.”
“그거 잘 됐군.”
“그대는 행복하지 않은가?”
행복.
행복이라.
강철남은 생각에 잠겼다.
행복이란 무언인가.
자연인으로 살아가면서 행복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평화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가이아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을 더 오래 보내고 싶었다.
이건 마치.
“지금 이렇게 더 있고 싶군.”
“그런가? 그런 말을 들으니 기쁘다.”
가이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좋은 냄새와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가이아.”
“응.”
“나랑 같이 살래?”
그날은 봄 하늘에 천계의 빛이 빛나던 찬란한 날,
연화초에서는 꽃이 만발하여 마왕성을 뒤덮었다.
그 향기가 어찌나 멀리 퍼지던지 저 먼 카르텔까지도 행복의 바람이 불어갔다.
* * *
마계의 구멍이 막힌 지 6년이 지났다.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협회장 박장혁의 비인도주의적 실험이 세상에 폭로되면서 서울 헌터 연합은 붕괴 되었다.
부협회장 서필도는 대국민 사과를 하며 물러났고 산하에 있는 조직은 해체되었다.
구멍이 막히면서 몬스터는 더 이상 새로 생겨나지 않았다.
물론 몰래 숨어 살아가는 잔당들이 있지만 그들을 찾아다니며 사냥하는 데에 많은 인원이 필요하진 않았다.
때문에 헌터들의 대거 실직 사태, 이른바 헌터 쇼크가 찾아왔다.
“어이, 장씨! 이것 좀 들어줘!”
“사람 오지게 부려 먹는구만.”
[강화]
“오오! 역시 노가다에서는 전직 헌터 만한 인재가 없다니까.”
“크레인보다 싸니까 말이지.”
헌터들은 육체노동에 적합한 인재가 되었다.
[강화] 능력으로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신속] 능력으로 로켓 배송을 한다거나 말이다.
몬스터 시대에는 인류의 구원자, 영웅으로 칭송받던 이들이 이제는 중장비 기계 정도의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당연히 헌터들은 아주 자존심이 상해서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헌터 시험에 꾸준히 응시했다.
“내 능력은 이런 데서 썩힐 힘이 아니라고!”
국내에 남은 헌터들은 100명 남짓.
그 100명 가운데 들어가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다.
바늘구멍으로 낙타가 통과하는 수준이 아니라 드래곤 열 마리를 집어넣는 수준이었다.
결국 구멍이 닫히고 4년 차에 접어들어서 헌터 시험은 폐지되었다.
탈락자가 지나치게 많은 것이 이유였다.
그도 이해가 될 것이 헌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인생을 바치는 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헌터들이 활약하는 시대는 끝났어’ 라는 종언이 내려진 것이다.
그렇다.
헌터들의 시대는 끝이 났다.
물론 소수의 정예 헌터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어딜 가든 상위 0.1% 실력자들은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다.
“김성남, 또 흥분해서 날뛰지 마라.”
“알았수다!”
홍태진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김성남이 칼춤을 춘다.
홀로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 있는 몬스터들을 베어 가른다.
이곳은 북한산.
몬스터들의 잔당이 남아 있다고 보고 받은 곳이다.
“김성남이, 이 새끼 또 지 혼자 다 해 처먹을라 그러네.”
황기민이 투덜대며 뒤쫓았다.
“흥, 남아있는 찌끄래기들 따위 잡아봤자 누가 인정해준다고.”
김성남은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다.
강한 몬스터를 만나지 못해 인류 최강 검사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형권. 좀 센 녀석 없나?”
헉헉 대며 뒤따라온 감별사 최형권이 ‘눈’을 사용해 주변을 둘러본다.
탐지되는 몬스터들은 모두 B급과 A급.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거물급 몬스터다.
“성남씨. 또 혼자 치고 나간겁니까?”
백진섭이 환도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합류했다.
“진짜 제 멋대로네. 언제 철들래?”
한지영도 잽싸게 발을 놀리며 함께 왔다.
이제는 모두 파견팀으로 뭉쳐졌기에 팀장의 직함은 홍태진만 갖고 있었다.
서로 같은 팀원이 되어 활동하는 그들은 6년간 한국 땅에 남아있는 몬스터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해왔다.
“헉, 헉, 아무래도 성남씨가 찾는 강한 몬스터는 없는 것…”
말을 하다말고 최형권의 심장이 크게 울린다.
이 느낌은.
마왕급 몬스터의 기운이다.
최형권은 비틀대며 눈알을 굴렸다.
설마 구멍이 뚫린 건가?
어째서 이렇게 강한 기운이.
그때였다.
최형권의 시선에 걸린 상태창이 보였다.
【강민하】
레벨: 302
마력: RS
도력: RS
신력: RS
힘: R
맷집: R
속도: R
그 어마무시한 상태창을 띤 채 걸어오는 것은,
작고 눈이 똘망똘망 귀여운 여자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