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옥황상제랑 친하다고? 강철남,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영원의 땅.
그곳은 선택받은 엘프들이 머무는 삶의 종착지이며 천계와 가까운 평화의 땅이다.
한 농부가 그들을 영원의 땅으로 이끌어준 옥황상제를 위한 제를 올리고 있었다.
“옥황상제님. 이번에도 작물이 풍년입니다. 산딸기 맛이 아주 그만입니다.”
산딸기 농장을 일구던 농부가 콧노래를 부르며 제기에 수확한 산딸기를 얹어 놓았다.
보람찬 땀을 닦으며 뒤돌아서 남은 일을 마무리하러 가려는데 등뒤에서 의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허. 참말이로구나. 아주 맛이 그만이야.”
뭐라고?
누군가 제기에 올려둔 산딸기를 처묵처묵 하고 있었다.
누가 감히 상제님께 올리는 산딸기를 함부로 주워 먹는단 말인가.
불경한 일을 참을 수 없었던 농부는 씩씩대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어? 어… 어어어?”
농부는 계속 어? 어? 어? 하는 소리만 바보처럼 중얼거리다가 허둥지둥 마을로 달려간다.
“어! 어어어! 어어엉어엉!!”
미친 물개마냥 희한한 괴성을 지르며 엘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내달려간 농부는 저기 좀 보라며 손을 휘젓는다.
“어허, 이 친구야. 뭐가 그렇게 넋이 나가 있는가? 말을 하게.”
경박스러운 농부의 행동 가짐을 꾸짖던 엘프는 저 멀리서 느긋하게 걸어오는 황금빛 곤룡포를 보자,
“어버버… 어버버버…”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에, 엘로드니임!!”
간신히 자기 허벅지를 꼬집고 정신을 차린 엘프는 엘로드가 머무는 집으로 달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평화로이 고대 엘프사 서적을 탐닉하고 있던 엘로드는 정적이 깨지자 불쾌해져 밖으로 나왔다.
“소란스럽게 어찌 고함을 지르느냐?”
“나, 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최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영원의 땅에 머무는 동안 이렇게 어수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생겼느냐?”
“몹시도 중한 일입니다.”
위기를 직감한 엘로드는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밖으로 나섰다.
“누가 이 영원의 땅의 평화를 어지럽히느냐.”
문을 열고 조용하지만 카리스마 있게 무게를 잡아본다.
하지만 보이는 광경이란 눈앞에 마을의 모든 엘프가 넙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진풍경이 아닌가?
“이 무슨…?”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군중의 중심을 보는데,
“어허허, 너는 엘로드구나.”
근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기 이름을 부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오, 오, 옥황, 옥황상제님?”
순간 엘로드의 머릿속에는 수천,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뭐지?
진짠가?
환상인가?
마물의 장난인가?
몰래카메라?
의심이 들었던 것은 0.1초.
0.2초 만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옥황상제님이시여!”
엘로드는 무릎을 꿇고 예의를 표했다.
와중에 신력을 느껴보니 그가 진짜 옥황상제라는 걸 알아봤다.
꼭 국방부 장관이 군부대를 방문한 것 같은 진풍경이 벌어졌다.
“다들 일어나게. 다리 저릴 것 아닌가? 일어나서 일들 보게나.”
옥황상제의 말에 그제야 엘프들은 몸을 일으킨다.
군중을 헤집고 앞으로 튀어나온 엘로드는 옥황상제에게 차마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 있지도 못하는 애매한 거리를 두고 그를 맞이한다.
마치 스타를 만난 팬이랄까 몹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옥황상제님. 어인 일로 여길 찾아주셨습니까?”
“허허. 그렇게 긴장할 것 없네. 내 친구의 초대로 한번 들러봤을 뿐이니.”
“치, 친구요?”
빙그레 웃으며 옥황상제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 있는 산딸기 농장을 가리켰다.
엘로드가 엘프의 눈으로 바라보니 강철남이 웬 개 한 마리와 산딸기를 우적우적 처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옆에는 말도 안 되게 아리따운 엘프 여인이 그들을 말리려다…
같이 처먹고 있다.
“철남이와 친구라고요?”
“친한 동생이지.”
뿌듯하게 말하는 옥황상제의 말투에는 제법 그를 아끼는 애정이 묻어났다.
마왕이었다가 지금은 마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설악산의 신령이자 옥황상제의 친한 친구라고?
대체 강철남, 당신은 뭐 하는 인간이야?
* * *
엘로드는 우로스와 폰토스와 함께 옥황상제를 대접할 상차림을 준비했다.
한사코 마을 잔치를 열겠다는 걸 옥황상제가 뜯어말리느라 애를 써야 했다.
세 엘프는 각종 과일과 채소를 마련해 봤지만 옥황상제에게 대접할 수라상으로 너무나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엘로드님. 어쩌죠? 내어 드릴 게 산 열매나 푸성귀뿐이니.”
“어쩔 수 없네. 옥황상제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먹는 평범한 밥상을 마련해달라 했으니 그분을 속일 수는 없지 않은가.”
강철남이 극찬을 했던 밥상이긴 하나 그들에게는 매일 먹는 밥상이라 그리 대단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엘프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을 차려주자 옥황상제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기뻐하였다.
“허허허. 참으로 진수성찬이로구나.”
“차린 게 없어 부끄럽습니다.”
“아니다. 이 찬거리 하나하나를 기르기 위해 그들의 노고와 정성, 시간이 들어가 있지 않느냐. 그대들이 내게 올린 이 상은 그대들의 삶이 묻어있네. 감사히 먹도록 하지.”
우로스와 폰토스는 옥황상제의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보기만 해도 만족스러운 상 앞에서 옥황상제는 젓가락을 들려다 문득 잊은 것이 떠오른다.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으흠. 철남아! 언제까지 거기서 놀고 있을 게냐?”
나긋이 말하는데도 목소리가 산울림처럼 울려 퍼졌다.
신력이 담긴 신통한 신술이었다.
“가요 가!”
강철남도 소리를 지르는데 그의 목소리에도 신력이 담겨 쩌렁쩌렁 울렸다.
신력을 받은 지 단 하루 만에 이 정도 경지에 오르다니.
놀랄 노 자가 따로 없다.
강철남, 멍구, 가이아가 우로스와 폰토스의 집에 들어온다.
“아오, 속 쓰려.”
산딸기를 미친 듯이 주워 먹은 멍구가 속쓰림을 호소한다.
“그래도 맛있었어.”
강철남은 혀끝에 남은 달달함을 다시며 여운에 잠긴다.
“철남, 멍구. 나중에 농장 주인에게 꼭 사과하고 보답하도록 하여라.”
“가이아, 너도 먹었잖아.”
“으흠. 멍구는 닥치고 있거라.”
가이아는 얼굴을 붉히며 머쓱하게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때,
“가이아? 당신이 가이아인가요?”
폰토스가 조심스레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선뜻 그럴 수 없는 망설임이 느껴졌다.
“가이아…”
용기를 내어 조금씩 가이아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어여쁘고 아름다웠다.
폰토스는 가이아를 눈에 담았다.
폰토스의 눈에는 아기 때의 가이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엄마는 딸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이아 역시 그녀가 자기에게로 다가올수록 강한 운명의 끌림을 느꼈다.
“제 어머니이신가요?”
“미안해요. 아무것도 못 해주고 일찍 떠나서 정말 미안해요.”
폰토스는 눈앞의 아이를 안아주고 싶지만, 일찍이 아이를 떠났다는 죄책감에 안아 줄 자격조차 없다고 여겨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때,
아이가 엄마를 안아준다.
“천천히, 천천히 서로 이해해 나가봐요.”
멀리서 손을 떨고 있던 우로스도 다가온다.
아내에 비해 더 격렬한 죄의식에 사로잡힌 우로스는 아이와 멀찌감치 거리를 둔 채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아빠에게 손을 내밀었고 아빠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 손을 맞잡았다.
* * *
“중대한 문제가 있다.”
마침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나 싶었는데 멍구가 대뜸 분위기를 깬다.
“왜, 또, 뭐?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고기가 없잖아! 혹시 엘프들은 채식주의자니 그런 건가?”
멍구가 설마설마하는 표정으로 식탁을 톡톡 건드린다.
빨리 대답해보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네. 단지 육식을 즐기지 않을 뿐이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영원의 땅에는 동물이 없다네.”
“뭐? 고깃덩어리들이 없다고?”
우로스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멍구는 앞발로 머리를 감싸고 절레절레 흔든다.
“내버려두쇼. 반찬 투정하는 놈은 한번 굶겨야 정신을 차리는 법이오.”
강철남은 멍구를 엄하게 대하고는 앞에 차려진 푸릇푸릇한 찬거리들을 맛깔나게 먹는다.
여전히 싱그럽고 산뜻한 맛이다.
가이아도 아버지가 기르고 어머니의 손을 거친 음식들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제 무얼 할 것인가?”
“황폐해진 엘프의 숲을 되살리려 합니다.”
“작은 나무조차 번듯이 자라는데 천 년이 자라거늘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엘프의 숲의 선왕이었던 엘로드는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감사함을 느꼈지만 그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엘프의 숲은 고대부터 천천히 자라온 세월의 보고다.
그런 역사적인 숲을 잃었으니 회복이 쉬울 리 없다.
“제 힘이 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그렇다고 물러설 가이아가 아니다.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해주었던 엘프의 숲이 사라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옥형, 어떻게 안 되오?”
강철남은 옥황상제에게 도움을 구해본다.
“엘프의 숲에 있는 나무들은 아직 그 뿌리들이 전부 죽은 것은 아니다. 생기를 불어넣으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지.”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그 방법이 뭐요?”
강철남은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물어본다.
아무래도 가이아의 바람을 이루어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 마음을 느낀 건지 옥황상제는 빙그레 웃으며 답한다.
“가이아의 자연과 동화하는 능력, 철남이의 신성한 도력과 인과율을 조정하는 영원의 땅의 힘인 신력을 조화롭게 발휘해보게. 엘프의 숲은 그대들의 힘에 반응을 할 걸세.”
“그게 뭐요?”
“그니까 어쨌든 파이팅 해보게.”
“아니, 퀴즈를 낼 게 아니라 정답을 줘야지 이 양반아.”
“어허허. 내가 끼어들면 반칙이지 않는가?”
“하여간 은근 속이 검다니까.”
고개를 가로 젓는 강철남을 보며 재밌다는 듯 웃는 옥황상제.
엘로드는 옥황상제와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강철남이 아직도 놀랍기만 하다.
수수께끼 같은 해답만 얻은 채 식사를 마쳤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떠나려던 순간, 폰토스는 작은 모종을 담은 화분을 가이아에게 건넨다.
“이건 영원의 땅에 사는 연화초라는 식물이에요. 이 아이를 키우는 자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낄 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식물이랍니다. 당신이 꼭 이 연화초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삶을 살길 바라요.”
“네, 어머니. 감사합니다.”
젖은 눈으로 웃음 짓는 가이아는 화분을 감사히 받아든다.
“철남씨, 우리 딸을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마시오.”
우로스가 염원을 담아 청한 악수에 강철남은 자신 있게 손을 맞잡았다.
“그럼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로구만.”
옥황상제가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커다란 구름이 날아와 그 앞에 덜컥 섰다.
“잘들 지내게. 인연이 닿는다면 또 봄세.”
짧고 쿨한 인사말을 남기고 옥황상제는 하늘 높이 사라졌다.
“어지간히도 바쁜가봐. 총알택시를 타고 날아가네.”
“우리도 가자.”
강철남은 도력과 신력을 모았다.
[공간 이동]
펑!
강철남, 멍구, 가이아는 다시 엘프의 숲으로 돌아왔다.
죽어버린 나무와 시들어버린 꽃잎이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울고 있었다.
나인의 인질이었던 엘프들은 몬스터들이 사라지자 탈출해 한 데 모여 있었고 그들을 엘론이 위로하고 있었다.
“당신들은…?”
엘론은 갑자기 나타난 강철남 일행을 수상히 여겼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멸망해버린 엘프의 땅을 보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주저앉아 한심하게 멍 때리고 있는 엘론을 향해 가이아가 걸어갔다.
짝!
“엘프의 왕이라는 자가 한심하구나.”
가이아가 엘론의 뺨을 후려갈겼다.
보는 강철남과 멍구도 속이 후련했다.
엘론은 이게 무슨 일인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부어오른 뺨만 어루만질 뿐이었다.
“철남.”
“그래, 가이아. 시작하자. 멍구도 좀 도와.”
“내가? 뭘 하면 돼?”
“손.”
척-
멍구가 손을 척 내민다.
한 인간과 한 엘프와 한 개가 손을 모은다.
각자 마력, 도력, 신력 가지고 있는 잠재 의식 속 힘을 모조리 끌어낸다.
“가즈아!!!!”
“아, 깜짝이야! 뭔 개지랄이야?!”
“아니, 그냥 왠지 파이팅이 필요할 것 같은 분위기라서.”
느닷없이 소리를 지른 멍구가 머쓱 해했다.
그럼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힘을 집중한다.
엘프의 숲이 반응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