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가이아가 마왕이 된 이야기
때는 오래전.
가이아가 마왕이 되기 전의 이야기다.
아주 어린 아기 때부터 부모를 여인 소녀는 자연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그녀는 자연을 사랑하는 평범한 엘프 소녀였고 엘프의 숲 또한 그녀를 사랑했다.
엘프의 숲에는 요정이 날아다녔고 소녀는 요정들과 함께 대화하며 나무와 풀잎들에 대해 노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엘프의 숲에 한 마물이 방문했다.
마물은 자신을 나인이라고 소개했고 엘프의 숲이 걱정된다며 한탄했다.
자세히 얘기해보라는 선왕의 말에 그는 엘프들이 번창하려면 영토를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인의 감언이설에 현혹된 선왕은 영토를 넓히기 위해 확장 공사를 시작했고 이내 땅과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군사를 키워 전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우리 엘프들의 영광과 부흥을 위하여, 일어나라 전사들이여!”
엘프에게 덧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부흥이라는 말이 선왕의 입에서 나왔다.
급기야 선왕은 원정 정벌에 나섰다.
왕이 자리를 비운 엘프의 숲은 신록을 잃어갔다.
선왕이 자리를 비우자 나인은 기다렸다는 듯 마물 군대를 이끌고 엘프의 숲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숲에서 놀던 요정들은 영원의 땅으로 피신하였고 마물들의 발에 짓밟힌 땅에서 나무와 풀잎의 노래를 들어줄 이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엘프의 숲이 불타버리는 모습을 본 소녀는 홀로 맞서려 했으나 미미한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소녀는 자신의 무력함에 한탄했다.
그때 초대 마황제가 소녀 앞에 나타나 말하기를,
내 손을 잡고 마왕이 된다면 저들을 무찌를 힘을 주겠노라고 했다.
불타는 엘프의 숲을 바라보던 소녀는 깊게 고민할 새도 없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마왕으로 각성한 그녀는 개화한 힘으로 나인의 마물 군대를 무찔렀다.
소녀의 사투에 마물들은 물러가고 마침내 엘프의 숲은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떠나야 했던 건 마물들뿐만이 아니었다.
엘프들은 마왕이 된 소녀를 불쾌해했다.
소녀가 엘프의 숲을 위해 어떤 공을 세웠건 말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마왕을 엘프의 숲에 품어둘 수는 없었다.
더 이상 나무와 숲을 사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소녀는 엘프의 숲을 떠났다.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나마 세상에 자연의 선물을 나눠주고자 풍작의 땅을 세워 가이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 * *
가이아는 이야기를 마칠 동안 강철남은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들어주었다.
멍구는 킁킁대며 풀의 흔적을 찾으며 건질 게 없나 살펴보고 있었다.
“그 녀석이 다시 돌아온 것이로군.”
“그렇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아마 새 군대를 꾸렸을 것이다. 녀석은 마물을 소환하고 제멋대로 부리는 교활한 놈이다.”
“여기는 왜 다시 쳐들어온 거지? 이 땅이 그렇게 탐이 나나?”
“녀석의 성격으로 짐작하자면 단순히 지난번의 패배가 분해서 앙갚음을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격 한번 배배 꼬인 녀석이로군.”
“그리고 또 하나 짚이는 게 있다.”
“그게 뭔데?”
“엘프의 땅에 숨겨진 보물이다. 그 보물에는 엘프의 신성한 비밀의 힘이 담겨있다고 한다.”
엘프의 땅에 숨겨진 보물.
너무 어린 나이에 땅을 떠나야 했던 가이아는 그 힘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만약 그 힘을 나인이 알고 있고 이용하려 한다면 저지해야만 했다.
강철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완전히 버려진 숲은 폐허와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땅을 파헤쳐 놓은 구덩이와 폭격을 맞은 듯한 누더기 같은 나무.
역시 녀석이 노린 것은 엘프가 아니라 엘프의 땅 자체일 것이다.
“철남. 녀석을 얕보면 안 된다. 아마 비겁한 수를 준비했을 것이다.”
강철남의 생각도 같았다.
엘프들을 인질로 삼는다거나 땅 밑에 흑마법을 걸어두었을지도 모른다.
“멍구야, 일단 녀석의 냄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자.”
강철남의 [공간 이동]은 그가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는 곳이어야만 가능한 스킬.
녀석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선 길을 따라 걷는 수밖에 없었다.
“지뢰를 심어 놓은 것 같은데?”
“당연히 그렇겠지. 그럼 모두 밟고 간다.”
“뭐? 왜 굳이?”
“격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지.”
강철남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발아래에서 커다란 지네가 튀어나와 그를 덮치며 지껄이는 말이,
“푸하하하! 요건 몰랐지?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이 멍청한 녀석! 이 대왕 지네님의 먹이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멍구는 가시가 돋친 턱을 쩍 벌리며 껄껄 쪼개는 지네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야.”
“흐흐흐. 너무 놀라서 굳어 버렸나?”
멍구가 앞발을 휘두르니 지네의 다리가 모조리 뽑혀 나갔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지네는 순식간의 지렁이가 되고 말았다.
“크허헉!”
“나인이라는 새끼 목적이 뭐냐?”
“뭐, 뭐야. 네놈들은!”
“묻잖아. 대답 안 해?”
멍구가 지네의 싸대기를 때린다.
“나, 나는 아는 게 없어. 그냥 소환술사에게 소환당한 무고한 지네라고!”
“무고는 아무 죄가 없는 놈한테나 쓰는 말이고, 우릴 잡아먹으려 했잖아.”
“겨, 결과적으로 안 먹었잖아!”
“이 새끼가 말장난을.”
꿀밤 몇 대를 더 먹여주니 지네는 꾀꼬닥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쩝. 영원의 땅으로 가셨구만.”
“멍구. 영원의 땅은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다.”
가이아가 질색팔색을 했다.
“요기나 하지.”
[점화]
강철남은 직화 구이로 지네를 불에 구웠다.
마력이 꽉 찬 녀석이라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바닥에 지네 기름이 뚝뚝 떨어졌고 불이 닿자 플람베가 화악 올라오며 불맛을 더했다.
살짝 그을린 부분은 보기만 해도 바삭바삭해 보였다.
멍구가 지네의 몸통을 찢자 녹색 피가 걸쭉하게 흐르며 하얀 속살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맛있겠당!”
허기를 참을 수 없었던 멍구는 허겁지겁 지네를 맛보기 시작했다.
맛있게 구워진 지네를 먹으려던 강철남은 강철 숟가락을 꺼내 지네의 하얀 속살을 살살 파내어 가이아에게 한입 권한다.
“맛볼래?”
“으, 응.”
평소 육식을 그다지 즐기진 않는 가이아는 물론 충식 따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강철남이 권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나.
하얀 속살을 보며 게살과 비슷하다며 자기 암시를 걸고 한입 꿀꺽 먹어본다.
“오호, 생각보다 먹을만 하구나.”
나쁘지 않았다.
이런 게 바로 새로운 맛의 발견이라는 걸까.
맛집 탐방을 즐기는 미식가들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갔다.
흡족해하는 가이아의 얼굴을 보고 만족한 강철남은 자기도 한입 먹으려 지네를 향해 숟가락을 뻗었는데,
“야, 그걸 그새 다 처먹었니?”
“내가 먹는 거만 봐도 배부르지 않니?”
“개소리를 해?”
“개니까.”
강철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강철 숟가락을 탈탈 털었다.
싸울 필요 없었다.
또 반찬거리가 하나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스르륵-
커다란 뱀,
아니, 날개와 팔다리가 없는 용.
이무기였다.
“끼에엑-”
굉음을 지르며 돌진하는 이무기는 입을 쩍 벌리며 그대로 강철남 일행을 삼키려 했다.
“철남이, 다음은 뱀고기다! 찢어버려!”
강철 숟가락으로 뚝배기를 깨려 하는 그 순간,
[동작 그만!]
강철남이 움직임을 봉쇄하는 스킬을 썼다.
그대로 굳어버리는 이무기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이무기 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니 마치 길가의 돌멩이처럼 초점이랄 게 없었다.
녀석은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정화]
이무기의 몸에 정화 스킬을 걸자 몸에 걸려있던 흑마법이 씻은 듯 사라졌다.
녀석은 마법에 걸려있었던 것이었다.
“뭐해?”
“세뇌 마법이 걸려있었어. 이 기다란 지렁이의 의지가 아니야.”
잠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이무기는 금방 다시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었다.
두리번거리며 강철남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뇌를 걸어? 성격 지독한 놈이구만. 카오스 새끼 같아.”
“철남. 이제 나인이 어떤 자인지 알겠나?”
“아주 잘 알겠다. 한 대 쥐어 박아줘야겠어.”
* * *
나인.
한때 마왕이 되고자 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구렁이 수인 몬스터.
실력은 분명히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초대 마황제의 별스러운 성격 탓에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마왕의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제기랄 영감탱이!”
마왕과 초대 마황제를 향한 분노와 증오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언젠가 그를 없애리라 다짐하고 있을 때, 초대 마황제가 종적을 감추었다.
마계는 마왕들의 패권다툼 시대로 넘어갔다.
마왕들의 권위가 더욱 강해지자 나인은 더욱 마왕의 자리에 군침을 흘렸고 마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크레톤에게 도전하려 했었다.
그러던 중 군대를 모으고 전략을 세우는 중에 크레톤이 한 인간에게 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호시탐탐 노리던 마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그 인간이 마황제가 되었다.
“죽이지 않고는 못 배기겠군.”
예로부터 엘프의 땅에는 힘의 보물이 잠들어 있다고 했다.
전설에 불과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그 힘은 바로 봉인의 힘.
그것을 취하면 마황제조차 봉인할 수 있는 궁극의 스킬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마황제를 봉인하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겠다.
그것이 나인의 계략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눈앞에 그 인간이 와 있다.
강철남, 멍구, 그리고 가이아.
“가이아. 안 그래도 네년을 죽이러 가려 했다. 굳이 방문할 수고를 줄여줘서 고맙다.”
“이제 다 끝났다, 나인. 네가 설치한 마력 지뢰도 모두 제거되었다. 앞서 설치한 함정들은 철남과 그대 사이의 힘의 차이만 부각 시킬 뿐이었다.”
절대 강철남을 이길 수 없다고 단정하는 가이아의 말에 나인의 성질이 욱 올라왔다.
“그래, 그 인간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건 인정하지. 그래서 준비했지.”
“준비? 관짝과 병풍을 준비했냐?”
멍구가 후딱 조지려는 듯 앞으로 나왔다.
“개는 빠져라. 지금부터 저 인간과 숭고한 1:1 승부를 펼치겠다.”
“이 새끼가 네가 뭔데 빠져라 마라야? 그 전에 나랑 먼저 붙자.”
“크흠. 그건 곤란하고 나는 저 인간하고 볼일이 있는데.”
“아, 그니까 날 이기면 되잖아.”
“아니, 너랑 붙으면 내 계획이 틀어진다니까.”
“철남이, 이 새끼 뭔가 꿍꿍이가 있는데?”
“아 존나 말 많네. 그냥 인간! 컴온!”
강철남은 막무가내로 우기는 나인의 성미에 어울려주기로 한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곧 죽을 사람 소원도 못 들어주겠나.
“그래. 네가 신청한 사형 집행인 여기 등장했다. 어떻게 죽여줄까? 머리를 터뜨려줄까, 배를 터뜨려줄까?”
“흐흐흐. 대신 이걸 터뜨리지!”
나인은 엘프의 땅에 묻혀 있던 힘의 보물, ‘봉인의 구’를 터뜨렸다.
“저건?!”
가이아는 경악했다.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응축된 엘프의 힘을 감지한 순간 보물의 전설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구슬은 녹색섬광을 일으키며 강철남을 삼켰다.
“철남이!”
“철남!”
강철남이 봉인의 구에 갇혔다.
나인이 미친 듯이 웃어대자 그가 모은 몬스터 군대가 일제히 덤벼들었다.
분노한 가이아가 땅을 일으켜 몬스터를 갈라진 대지 밑으로 가라앉혔다.
눈이 돌아간 멍구도 신수의 빛을 뿜어내며 몬스터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강철남은
봉인의 세계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