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마계에서도 자연인으로 살랍니다
강철남이 발표한 마계의 첫 개혁이란,
“마계 수목화 개혁이다!”
그의 발표에 웅성웅성 떠드는 소리가 일어난다.
수목화란 무엇인가.
울창한 나무와 숲을 가꾸어 푸른 산과 들을 가꾸는 환경 변화 작업.
초목으로 뒤덮인 산에서는 꾀꼬리가 노래하고 졸졸 흐르는 계곡과 시냇물에서는 물고기가 헤엄친다.
그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음이온과 피톤치트가 공기를 맑게 한다.
그 속에 노니는 즐거움은 이루 비견 할 바가 없다.
그런 풍류를 이 황무지와 돌산에 사는 마물들이 알 턱이 없다.
그들에게 나무와 숲은 먹을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잡초에 불가한 것이니 모조리 쓸어버리니까.
“지금 너희의 마음속에는 대체 저 병신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라는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아, 아닙니다!!”
급발진하여 가스라이팅을 시전하는 강철남의 말에 마물들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린다.
“나무와 숲. 이것들이 왜 필요한가. 그것은 바로 심신의 평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여태 마계는 항상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거기 너!”
강철남은 저 아래에 있는 말 머리를 한 몬스터를 지목한다.
“저 말씀이신가요?”
“그래, 너, 너, 너.”
“그야 싸움이야말로 마족이 사는 이유니까요.”
말 끝나기가 무섭게 강철남은 신발을 벗어 녀석에게 집어던진다.
영광스러운 마황제의 신발로 얻어맞은 녀석은 신발을 소중히 끌어안고 좋아하고 앉아있다.
“싸워서 남는 게 뭐냐. 깽값과 상처, 골절, 출혈, 부서진 이빨과 부서진 건물. 하나같이 손해 뿐이다. 내 말이 틀린가?”
강철남의 말에 듣고 보니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마물들.
“그대들의 아드레날린으로 절여진 뇌에는 힐링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자연과 휴목림이 적격이지.”
난간 앞에 한발 더 나아가 선 강철남은 한 줌 손에 쥔 무언가를 확, 뿌린다.
“이것은 내 고향에서 가져온 각종 식물의 씨앗이다. 집집마다 작은 화단을 설치해 줄 것이니 거기에 이 씨앗을 심고 화단을 가꾸는 즐거움을 누려보도록 하여라.”
하늘에서 내리는 씨앗을 마치 금싸라기처럼 받아 챙기는 마물들.
이 조그만 것이 대체 무슨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인고?
당장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마황제의 명이니 따라보기로 한다.
개표 결과 발표와 함께 이루어진 마황제의 일장 연설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철남. 수목화 계획이라니. 엄청난 계획을 꾸미는구나. 그야말로 마계가 달라질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가이아는 마황제 강철남의 개혁이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철남과 함께 숲길을 거니는 상상을 그려보니 벌써부터 행복에 잠기기도 한다.
“가이아. 네 힘이 필요하다.”
“내 힘이? 좋다. 원하는 건 모두 말해봐라.”
땅의 힘을 다루는 가이아가 협조해준다면 수목화 개혁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도 있고 이미 풍작의 땅으로 정평이 나 있는 도시도 있기에 강철남은 우선 도시 가이아를 수목화의 대표 도시로 꾸며보고자 한다.
“지구에 있는 묘목들을 가져다줄 테니 그것들을 심어 번식해 줄 수 있나?”
“문제없다.”
가이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강철남을 바라보며 한지영은 묘한 질투심에 불타오른다.
“철남씨! 저는 뭐 도울 거 없나요?”
“음, 그렇다면 지영 씨는 지구에서 묘목을 조달해줄 수 있소?”
“맡겨만 주세요!”
자기도 강철남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싱글벙글 신이 난 한지영이다.
“강철남님. 마계의 환경을 아예 바꾸실 생각이라면 역시 ‘그 힘’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카르텔이 은근히 다가와 제안한다.
‘그 힘’이라 함은.
“네, 에테르입니다.”
초대 마황제가 금고에 보관해 둔 힘의 결정체.
그것을 는 것으로 진정한 마계의 마황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금고를 열기 위해선 4마왕의 조력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금고를 열 수가 있나? 이미 두 마왕이 골로 가 버렸는데.”
“두 마왕의 마력이 남아 있는 물건이라면 상관없습니다.”
그러자 머릿속을 스치는 두 물건.
강철 숟가락과 차양막.
강철 숟가락은 크레톤의 강철 비늘로 만든 것이고,
차양막은 카오스의 검은 장막을 뜯어다가 만든 것이다.
둘 다 모두 마왕의 마력이 물씬 풍기는 물건이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인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국의 속담이야.”
“흥미롭군요.”
“언제 유학이라도 와서 많이 배우고 가.”
“하하하. 인간계로 유학이라. 그거 기대되는군요.”
마왕들의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헌터 연합의 파견팀장들은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엄청난 마력에 피로를 느낀다.
강철남은 그들의 피로를 눈치채고 이만 돌아가려 한다.
“이벤트는 끝났고 이제는 지루한 일들만 남았군. 우선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팀장들을 배려해 강철남은 자리를 마쳤다.
그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온 설악산 중턱의 황토집.
“푸학-”
황기민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젠장, 그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구만.”
마계를 뒤덮는 마력의 공기에 적응이 안 된 황기민이 힘겨운 숨을 토해낸다.
“그나저나 철남씨는 마계의 지도자가 되신 건가요?”
백진섭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뇌어본다.
“그렇게 됐네. 사람 팔자란 참 모르는 법이야.”
“사람이 맞기는 한 거냐?”
김성남이 비아냥댄다.
대체 어떻게 하면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갈수록 각이 안 나온다.
“강철남씨, 그렇다면.”
홍태진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아주 긴요히 할 말이 있는 듯하다.
“앞으로 몬스터들이 인간계로 넘어오지 못하게 구멍을 막아주실 수 있는 겁니까?”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에겐 헌터들이 목숨을 바친 사명과도 같은 몬스터 세계의 종말.
그것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아마 에테르를 찾고 그 뒤에 방법을 알아봐야 할 거요. 당장은 어렵지.”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껏 인간계에 몬스터들이 날뛰느라 무수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사람들의 행복이 빼앗겼습니다. 구멍을 막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홍태진은 머리를 깊이 숙인다.
이 빌어먹을 몬스터 시대를 끝낼 수 있다면 목숨은 아깝지 않다.
인간계의 평화를 위해 내놓은 목숨이다.
다만 자기 한 목숨으로 이 꿈을 이룰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그만큼 이 시대의 아픔이 크기 때문이다.
“좋소.”
“네? 방금 그 말씀은.”
“구멍을 막도록 힘 써보겠소.”
마침내 강철남도 구멍을 막는 데에 동의한다.
아주 작은 기대였지만 강철남이 응해주었다.
그것은 인류에게 크나큰 희망이었다.
“그렇다면 강철남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자연 속의 안빈낙도와 몬스터 별미를 즐기시는 삶은 포기하시는 겁니까?”
“미쳤소? 그걸 포기하게?”
홍태진의 말에 고개를 부르르 젓는 강철남이다.
“그렇다는 건?”
“또 이사를 가는 수밖에.”
“설마 마계로 가실 겁니까?”
“마계 수목화 개혁은 원래 그런 의도였소. 인간계로 통하는 구멍을 막고 당분간 마계의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것 말이오.”
“그렇다면 강철남씨는 이미 구멍을 막을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몬스터 새끼들이 어지간히 깽판을 쳤어야지.”
마왕이니 몬스터니 마계에서 건너온 잡것들이 인간계를 어지간히도 괴롭히는 꼴을 보니 강철남도 신물이 난 모양이다.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당신들은 이제부터 바빠질 거요. 마황제의 명령이라지만 꼭 말 안 듣는 녀석들은 있기 마련이거든. 인간계에 몰래 숨어서 나쁜 짓을 하는 몬스터나 구멍을 막기 전에 난동을 피우는 녀석들을 막아야 할 거요.”
“그건 맡겨 주십시오!”
가슴을 주먹으로 쿵 두드리며 자신하는 홍태진이었다.
그러던 와중.
충격을 받는 한 사람이 있다.
강철남이 마계로 가버리고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구멍이 닫힌다면 다시는 그와 만날 수 없는 게 아닌가.
“처, 철남씨! 그럼 우리 다시 못 만나는 거예요? 약속했잖아요. 내가 묘목을 조달해주겠다고.”
“여기에 놓아두면 내가 알아서 가져가겠소.”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잖아요.”
한지영이 울먹이기 시작한다.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나.
하지만 강철남의 삶과 한지영의 삶은 함께할 수 없다.
이미 서로 너무 많은 간극이 벌어졌으니까 말이다.
“우린 함께 할 수 없소.”
“알아요. 그래도.”
“당신은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강철남과 아무 것도 물을 수 없는 한지영.
두 사람을 바라보던 백진섭이 강철남을 보내주려 악수를 청한다.
“또 봅시다, 철남씨.”
“건강하시구랴.”
두 사람은 뜨거운 우정의 악수를 나누었다.
“나는 더 강해질 거다.”
김성남이 이를 꽉 물고 강철남에게 선언한다.
“그럴 것 같다.”
“기다려. 깜짝 놀라게 해줄 테니까.”
그런 말을 남기고선 돌아서는 김성남에게 황기민이,
“이제 쓰러뜨린다는 말은 못 하나 보네.”
“닥쳐!”
신경을 살살 긁으며 뒤따라 내려간다.
한지영이 애써 웃으며 달려 내려가고 홍태진과 백진섭도 목례를 하고 산을 내려간다.
다시 산 중턱은 고요해졌다.
“철남이, 조금 조용하네.”
“그렇군.”
쓸쓸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무래도 가을이 빨리 올 것만 같다.
“뭐라도 먹자.”
“그래. 여름 나물로 비빔밥이나 해 먹자고.”
* * *
이곳은 마황제의 금고가 보관되어있는 신전.
어설픈 마력으로는 이곳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만약 그랬다간 온몸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금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에테르의 힘이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카르텔은 금고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명색이 마왕이라 이 정도 방어 마력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인다.
“그럼 철남. 시작하지.”
가이아가 눈짓을 보낸다.
카르텔이 금고에 마력을 쏟아붓기 시작한다.
뒤이어 가이아도 거대한 마력을 쏟아붓는다.
두 마왕의 마력이 방출되자 어마어마한 힘의 파동이 느껴진다.
이제 강철남의 차례다.
강철남은 차양막을 금고 위에 얹고는 강철 숟가락을 쳐든다.
“에잇!”
자신의 마력을 담아 힘껏 내려치니 금고에 빛이 번쩍이는데,
“오옷!”
뒤에서 구경하던 멍구가 금고에서 나오는 빛을 보며 벌떡 일어난다.
안에 뭐가 있는 줄 알지만 보물 상자를 여는 순간은 언제나 짜릿한 법.
금고는 빛을 내면서 문을 열어준다.
안에는 이 세상의 모든 빛깔을 담은 듯 신비로운 빛깔을 띠는 구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에테르’.
초대 마황제가 남긴 힘의 원천이다.
“이걸 어떡하면 되는 거지? 씹어 먹나?”
“너는 오로지 먹을 생각만 하냐?”
멍구가 달려와 구체를 바라본다.
공놀이 하기에 딱 좋은 사이즈다.
“일단 잡아봐.”
멍구의 말에 일단 잡아보는 강철남.
그러자,
지이이잉---
빛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구체에서 나오는 빛이 강철남의 몸으로 흡수된다.
엄청난 파동이 온몸에 느껴진다.
마치 마계라는 하나의 세계가 몸속 깊숙이 흘러드는 느낌이다.
“철남이, 괜찮아?”
멍구가 불러도 대답 없는 강철남이다.
한동안 얼어붙은 채로 멍하니 서 있는 강철남은 이내 곧 고개를 돌린다.
“멍구야, 나 얼마나 이러고 있었냐?”
“한 10초 쯤? 왜 그래?”
강철남이 입을 연다.
“다녀왔다.”
“어디를?”
“빌어먹을 마황제의 덫에 한 10년간.”
강철남의 의식은 10년간 어디론가 날아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