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신령 능력 검정 시험을 실시하겠습니다
“어서 오시게, 설악 신령.”
흐릿한 분홍빛 안개 속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고요한 바람이 불더니 서서히 안개가 걷힌다.
어느새 강철남의 주변은 아홉 명의 신령 둘러싸고 있었다.
“헉, 이 영감들 다 뭐야?”
갑자기 나타난 신령들의 모습에 당혹스러운 멍구.
“나까지 포함해 우리 산을 지키는 열 명의 도사들이라네. 소개하지. 천마 신령, 태백 신령, 소백 신령, 팔공 신령, 지리 신령, 천관 신령, 백운 신령, 계룡 신령, 한라 신령.”
둥글게 늘어선 신령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해 주는 설악 신령.
어떤 노인은 빼빼 말랐고 어떤 노인은 배가 산만큼 불룩 튀어나왔다.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저마다 풍겨 오는 영험한 기운이 있었다.
“환영식이라도 하려고? 대접에 술 받아 마시면 되나?”
“어흠. 천박한지고.”
“누구야? 어떤 놈이 함부로 입으로 똥을 싸?”
멍구가 발끈한다.
“저, 저, 개놈의 자식이!”
“너냐? 일로 와. 한 판 붙자.”
흥분한 멍구가 이빨을 드러낸다.
“어흠. 이놈 멍구야. 자중하거라.”
설악 신령이 얼굴이 살짝 시뻘게진다.
데려온 신령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다.
“설악 신령. 그자들은 누구인가?”
“이미 느꼈다시피 내 도력이 많이 쇠약해졌네.”
“제발 저들이 차기 신령 후보라고 말하지 마시게.”
“안타깝지만.”
“이런 시발.”
“어허! 이보게!”
무심코 신령 하나가 불쑥 거친 말을 내뱉고 만다.
“충분히 자격이 있는 자들이네. 내가 보장하지.”
“자격은 우리 모두가 판단할 거라네.”
급기야 수군수군 대며 자기네들끼리 무언가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봐, 신령 양반. 지금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요? 우리 평가받는 거요?”
“아홉 신령들의 만장일치 동의를 받아야만 신령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네.”
“누가 우리 철남이를 평가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멍구.
여기에 있는 놈들 떼거지로 덤벼도 강철남 하나를 못 당해 낼 텐데.
“산신령이란 자고로 힘만 세서는 아니 되는 법. 힘에는 정의가 실려 있어야 하는 법.”
“우리 정의를 테스트하겠다는 거군.”
“그렇다네.”
솔직히 합격할 거라는 기대는 크게 없다.
신령이 된 계기란 신선계의 풀과 열매에 관심이 있어서니까.
“강철남이라고 했나? 하나 묻겠네. 자네는 왜 산신령이 되려고 하지?”
계룡 신령이 묻는다.
“신선계의 음식들 맛이 끝내준다고 해서 왔수다.”
필터링 없이 그대로 송출하는 방송사고.
멍구는 고개를 떨구고 설악 신령은 이마를 탁 짚는다.
그러나 반응은,
“음, 훌륭하군.”
의외로 감탄하는 계룡 신령.
“거짓이 없어. 적어도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은 아니군.”
계룡 신령은 거짓을 판별하는 데에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상대를 속여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자는 신령으로서 적합하지 않다.
만약 강철남이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면 바로 탈락했을 것이다.
“비록 동기가 적합하지 않을지언정 요즘 같은 시대에 진솔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주마.”
“거, 고맙군.”
“몇 가지 테스트를 진행하도록 하지.”
“한 가지만 해, 한 가지만.”
“저 앞에 길이 보이나?”
태백 신령이 가리킨 곳에는 좁은 오솔길이 나 있다.
길 양옆에는 나무가 무성히 자라 있었고 가지에는 안개가 구름처럼 걸려 있다.
“뭐 좀 먹고 하면 안 되나? 저기 나무에 달린 천도복숭아 하나만 먹어 보자.”
강철남이 가리킨 나무에는 탐스럽고 예쁜 천도복숭아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척 보기에도 신성한 기운이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 인간계에서는 맛보지 못할 천상의 맛이 기대된다.
“저건 신령만이 먹을 수 있는 열매다. 한낱 인간이 입에 댈 수 있는 게 아니다.”
“까짓거 신령이 되면 될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걸 위한 테스트를 한다고. 저기 앞에 길이 보이나?”
슬슬 빡치기 시작한 태백 신령.
“그래, 그래. 보여.”
“저 길로 걸어가 보거라. 그대를 위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노라. 끝까지 가는 것이 합격 조건이라네.”
어쩔 수 없지.
강철남은 길을 따라 걷는다.
멍구도 따라가려는 찰나,
“개는 여기서 기다려라.”
“아니, 왜?”
“이건 신령이 될 자의 시험이다. 그대는 여기서 지켜보거라.”
“쳇. 빨랑 끝내고 와.”
고개를 끄덕이는 강철남.
첫발을 내딛자 별 느낌이 없다.
길은 평범한 오솔길.
하지만 깊이 걸어 들어갈수록 묘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마침내 강철남을 기다리고 있던 것과 마주치는데,
“이런 시험이었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요괴였다.
그것도 18요괴 중 하나인 석귀(石鬼).
“여긴 어디냐?!”
석귀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뜸 화를 낸다.
“신령 놈들! 나를 잡아다가 어디로 데려놓은 것이냐.”
돌덩이 주먹으로 땅을 쾅쾅 내려친다.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대는 반면 신선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분노조절 장애인가? 시끄러워, 이놈아.”
“인간? 인간이 있다니! 흐흐. 마침 배가 고팠는데 잘 됐군.”
강철남을 보자마자 침을 흘리는 석귀.
한편 신령들은,
“이런 방식의 시험은 다소 강압적이지 않소?”
“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오. 신령이라면 자고로 요괴를 퇴치하는 자. 기본 실력을 갖추어야 하오.”
“그러다가 저 인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설악 신령이 자신만만하게 후임자를 데려온 건 처음이오. 한번 믿어 봅시다.”
구름이 비추어 주는 화면을 보며 숨죽이는 신령들.
멍구는 하품을 쩍 하며 낮잠이나 잔다.
쿵쿵-
석귀는 돌로 된 주먹을 부딪치며 위협해 온다.
신령들이 힘을 합쳐 잡아 온 석귀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과연 인간은 어떤 힘을 보여 줄까.
[석화]
석귀는 의외로 근접전을 펼치지 않았다.
멀리서 손을 펼치자 강철남의 발바닥부터 돌이 되어 굳기 시작한다.
이내 곧 강철남의 발이 묶여 버렸다.
그 상태로 달려드는 석귀와 시작된 난타전.
투타타탕!
“으하하, 어째서 인간이 내 주먹을 받아 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곤죽으로 만들어 주마.”
무자비한 석귀의 주먹 연타.
강철남은 무표정으로 주먹을 받아 낸다.
[들썩들썩]
“응?”
희한한 스킬이 발동된다.
강철남의 발밑이 들썩들썩하더니 이내,
쩌어억!!
석화된 발이 붙은 땅바닥이 통째로 뜯겨 나간다.
“이럴 수가! 신선계의 바닥을 뜯다니!”
“인간의 도력이 이 세계를 만든 우리의 도력을 웃돈단 말인가?”
번쩍 들린 땅 위에서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는 석귀.
“어! 어! 어!”
발바닥에 붙은 바닥을 살짝 기울이니 빗면을 타고 강철남을 향해 굴러온다.
[강화]
[오함마]
강철남이 양손을 맞잡고 힘차게 내려치니,
쿠와앙!!
돌덩이 같던 석귀의 몸이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석귀가 소멸하자 발을 묶은 석화가 풀린다.
“말도 안 되게 강하구만.”
“이런 무식한 전투 방식은 처음 보네.”
고상하게 싸우던 신령들에겐 그야말로 문화 충격.
신기해하면서도 난해한 모양이다.
첫 번째 가볍게 시험은 통과.
강철남은 계속해서 걸어 나간다.
분홍빛 신비한 안개로 가려진 길.
이 길을 걸으며 불어오는 향긋한 향기에 취한다.
“좋은 냄새군.”
조금 들뜬 기분으로 걸음을 걷는 강철남.
황홀한 향기에 취할 것만 같다.
그러다 안개에 가려 미처 보지 못한 무언가에 부딪치는데,
“아얏!”
웬 여자 목소리였다.
이런 곳에?
“괜찮소?”
“괘, 괜찮아요.”
손을 잡아 일으켜 얼굴을 보니 그 미모가 출중했다.
비단결 같은 피부에 부드러운 콧날.
커다랗고 선한 눈매에 촉촉한 입술.
시대에 따라 미인상이 달라진다 하거늘, 그럼에도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반해 버릴 만한 외모다.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소?”
“저는 하늘에 사는 선녀입니다. 신령님들의 후계자 시험을 치르는 지원자들을 모시는 몸이지요.”
“그런데 왜 여기에 있소?”
“그게 요괴가 있어서 발이 묶여 버렸답니다.”
“돌멩이를 말하는 거라면 내가 치워 버렸으니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아! 정말입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손을 모으고 강철남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선녀.
갑자기,
“아얏!”
“왜 그러시오?”
“도망치다가 발을 삐었나 봅니다.”
그녀의 말대로 발목은 팅팅 불어 있었다.
“신령님들에게 가면 금방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길의 시작점까지 업어 주시겠습니까?”
“나는 갈 길이 바쁘오.”
“곤경에 처한 여인을 무심이 지나쳐 버리는 것이 신령의 도리인가요? 흑흑.”
속으로 조금 빡친 강철남이었다.
하지만 ‘참을 인’자를 가슴에 새기며 참고 또 참았다.
“업히시오.”
“감사합니다.”
선녀를 등에 업자 향긋한 향기가 더욱 진해졌다.
마치 뇌 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향이다.
잠자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강철남.
머리가 아늑해지는 신묘한 감각에 휩싸인다.
이렇게 여인을 업고 있으니 전 마누라와 연애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새 구두를 신고 발가락이 까진 마누라를 업어 준 적이 있었다.
‘나 하나도 안 무겁지?’라며 버둥대던 마누라년.
X나 무거웠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이라 좋다 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헤어졌어야 했다.
지금 이렇게 여인을 업고 있자니 그때가 생각났다.
우뚝—
그 느낌에 강철남은 발길을 멈춘다.
“왜 그러시나요?”
등에 업힌 선녀가 의아한 듯 묻는다.
“여기서부터는 알아서 가시오.”
“네? 하지만…….”
“기어 가든 깽깽이 발로 가든 재주껏 가시오.”
“어째서 갑자기 그러시나요?”
강철남은 긴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나타난 여자.
다짜고짜 업어 달라는 시츄에이션.
그리고 떠올리기 싫었던 이혼한 전처에 관한 기억.
확실해졌다.
이 여자는 요물이다.
“꽉 잡으시오.”
“네? 무엇을?”
[뒤로 취침]
폴짝 뛴 강철남의 몸이 허공에 붕 뜬다.
말 그대로 뒤로 드러누워 버리는 희한한 스킬.
등에 업힌 선녀는 눈이 커다래진다.
쿠웅!
등에 선녀를 업은 채 바닥에 힘껏 몸을 던진 강철남.
그의 등에 뭔가 물컹한 것이 배긴다.
“이건…….”
그의 등에 깔린 것은 사람 크기만 한 볏짚.
선녀는 신령의 도술로 만든 가짜였던 것이다.
자고로 신령이란 유혹에 강해야 하는 법.
두 번째 시험도 통과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신령들은,
“세상에! 우리 도술을 간파하다니.”
“감각과 눈마저도 뛰어난 모양이군.”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을 뿌리치다니.”
“이건 높게 쳐줘야겠어.”
강철남.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났을 뿐이다.
공복에 바빠 죽겠는데 갑자기 업어 달라는 여자가 강제로 아픈 옛 기억을 소환했으니 오죽하겠나.
배고픈데 빨리 갈 길이나 가자.
주린 배를 감싸고 계속 걸어 나가는 강철남.
아까부터 나는 푸릇한 과일 향을 지표 삼아 따라 걸어간다.
그랬더니,
“오호!”
나무 한 그루에 천도복숭아가 탐스럽게 맺혀 있는 것이 아닌가.
열매는 단 하나.
귀하디귀하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똑—
그것을 똑, 따선 한 입 베어 먹으려는 순간,
신선계의 천도복숭아는 신령만이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린다.
“이건 합격 선물로 먹어 볼까.”
천도복숭아를 챙겨 들고 갈 길을 재촉하는 강철남.
얼마쯤 걸었을까 길가에 쓰러진 뭔가를 발견하는데,
인간이다.
그것도 다 죽어 가는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