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신령, 은퇴합니다
광폭귀(狂暴鬼).
녀석은 본디 설악산을 떠도는 약한 마귀였다.
하지만 사악한 마음은 다른 어떤 마귀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설악 신령을 피해 떠돌아다니던 고려 시대의 어느 날,
마귀는 한 이방인을 발견한다.
이방인은 북쪽의 다른 나라에서 온 자였다.
그의 마음에 거대한 사악함의 그릇이 있다는 것을 알아본 마귀.
마귀는 망설임 없이 그의 몸으로 들어갔다.
마귀에 휩싸인 이방인은 전장을 휩쓸며 사람들을 베고, 물건을 빼앗고, 여인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
수라장에서 무거운 업보를 쌓아 오길 수년.
마귀는 드디어 인간의 정신에 파고들어 육체마저 지배하게 된다.
“인간, 인간을 먹어야 해.”
고려로 쳐들어와 무수한 사람을 잡아먹은 마귀.
점점 피에 취해 갔으며 강해지는 자기 힘에 심취해 갔다.
광폭귀, 미친 듯이 날뛰는 마귀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광폭귀를 보다 못한 신령들.
“더 이상 내버려 둘 수가 없소.”
“지상의 질서를 위해 나서야 하오.”
“뜻이 있는 자들은 따라오시오!”
터전인 산에서 직접 내려와 퇴치에 나선다.
하지만 산을 벗어난 산신령들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으하하하. 신령은 어떤 맛인지 먹어 볼까?”
광폭귀는 급기야 신령을 입에 대는 천인공노할 우를 범하고 만다.
이에 하늘에 있던 옥황상제가 노하니,
“한낱 미개한 마귀 주제에 천명을 부여받은 신령에게 몹쓸 짓을 하다니.”
하늘에서 노란빛이 번쩍하더니 광폭귀가 작은 구슬 안에 찌그러지고 만다.
그렇게 녀석은 본래 지내던 설악산의 바위 무더기 아래에 봉인 당해 버린다.
긴 세월이 지났다.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몬스터들이 설악산에 들이닥쳤다.
마귀들은 몬스터를 잡아먹고 또 사람을 잡아먹어 요괴가 되었다.
전설의 18요괴들도 하나둘 깨어나면서 설악산의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이봐, 일어나 광폭귀. 설악 신령의 가죽을 뜯어 먹으러 가야지.”
18요괴 중 하나인 택귀(澤鬼)
늪에서 깨어난 녀석은 바위를 헤집고 광폭귀를 깨운다.
광폭귀를 이용해서 설악 신령을 해치울 심산이었다.
하지만 택귀는 몰랐다.
광폭귀는 다른 마귀들이 일부러 깨우지 않은 미치광이라는 걸.
“크아악! 배고파 죽겠다! 먹을 걸 가져와!”
“진정해. 여기서 내려가면 인간들이 있어! 나는 먹지 마! 안 돼! 우왁!!”
택귀는 그렇게 광폭귀의 식사 거리가 되었다.
18요괴 중 하나인 택귀로 첫 끼니를 채운 광폭귀.
금방 기운을 차리고 산을 내려가며 닥치는 대로 요괴들을 잡아먹어 배를 채운다.
“좀 더 필요해! 그래, 인간을 먹자!”
신령만 건드리지 않으면 옥황도 눈치 못 챌 것이다.
이제부터 인간계는 내가 집어삼켜 주마!
광폭귀는 인간이 고팠다.
설악산 아래를 내려가 짠 바닷바람 냄새를 맡고 해변으로 달려가 난동을 부린다.
그리고 마침내,
[해일]
커다란 해일을 일으킨다.
바닷가 도시 전체를 물에 묻어 버릴 셈이다.
“꺄악!”
“해, 해일이야!!”
“사람 살려!”
“엄마, 엄마!!”
도시 전체가 대혼란에 빠졌다.
산보다 높은 파도는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들이닥치고 있었다.
파도가 지붕처럼 하늘을 덮자 암전된 것처럼 껌껌해졌다.
운명을 직감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꽉 끌어안으며 마지막을 준비했다.
파도가 도시를 덮치기 겨우 1m 정도 남았을 무렵,
[일격필살]
저 멀리서 운석 같은 것이 날아왔다.
그 정체불명의 덩어리는 파도에 뛰어들더니 이내,
쿠콰카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충돌했다.
그러자 파도가 조각나더니 수천억 개의 물방울이 되어 바다를 향해 되돌아갔다.
하늘은 맑게 개고 도시는 다시 고요해졌다.
“너 제법 화끈하구나. 스타일은 마음에 들어.”
강철남은 모래사장 위에 앉아서 이 모든 걸 구경하고 있는 광폭귀에게 다가간다.
“주먹 좀 쓰는구만. 신령인가?”
“인간이다.”
“뭐?”
눈을 찡그리며 강철남을 자세히 관찰하는 광폭귀.
“너 정말 인간이냐?”
“그렇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산에서 나는 음식을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으면 된다.”
“이상한 녀석이로군.”
“너만 할까.”
광폭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통 요괴들이라면 강철남의 강함을 보자마자 도망치기 바쁠 테지만,
광폭귀는 달랐다.
저 인간을 먹으면 분명 설악산을 통째로 뽑아낼 만큼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며 군침을 흘린다.
[파괴]
광폭귀의 발굽이 땅을 차며 굉장한 속도로 달려온다.
강철남은 녀석이 내지르는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 낸다.
묵직한 주먹이었다.
[화염 이빨]
뒤늦게 합류한 멍구.
이글거리는 이빨로 광폭귀의 허리를 콱, 깨문다.
“앗, 뜨거!”
[화염창]
놈의 손을 뿌리치고 강철남은 화염창을 소환해 녀석에게 투창한다.
콰직!
“크아악!!”
복부에 화염창이 박히자 비명을 지르는 광폭귀.
순식간에 일어난 연계였다.
“젠장, 비겁하게 기습을 하다니.”
“X바, 쌈박질에 그런 게 어딨어. 꼬우면 니도 쪽수 데리고 오던가.”
동족마저 씹어 먹은 광폭귀.
데려올 동료가 있을 리 없다.
“후훗. 끝이라 생각하나?”
“피 질질 흘리는 주제에 또 덤비려고?”
“쿠헤헤헤. 하등한 인간과 개 따위는 꿈도 못 꿀 힘을 보여 주지.”
광폭귀는 가죽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낸다.
캡슐 모양의 알약이다.
“뭐여, 비타민이여?”
“쿠헤헤. 이 약이 어떤 약인지 아느냐?”
“뭔데?”
“안 가르쳐 줄 거다!”
“아니, 이 새끼가 개를 갖고 놀아?”
한입에 알약을 꿀꺽 삼킨 광폭귀는 쓰러진 몸을 다시 일으켰다.
찢어진 근육이 다시 붙고 화상 입은 허리가 말끔히 나았다.
오히려 마력도 더 증폭하였고 더 위험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흐흐흐. 인간 놈들에겐 불가능한 일도 우리 요괴들에겐 간단한 일이지.”
“추잡한 새끼. 하나도 안 부럽다.”
[광속]
이번엔 강철남 쪽에서 먼저 달려든다.
폭발적인 스피드에 힘을 실어 무릎 차기를 날린다.
파앙!
그 공격을 막는 광폭귀의 팔뚝이 부러진다.
놈이 억지로 버티며 다리를 들어 강철남을 발굽으로 걷어차려는데,
[프렌드 실드]
“뭐?”
강철남이 뱉은 말에 멍구가 깜짝 놀란다.
강철남은 펄쩍 뛰어오른 멍구를 광폭귀의 눈에다 집어 던진다.
시야가 흔들려 조준이 흐트러진 광폭귀.
빈틈이 생겼다.
[명존쎄]
명치를 X나 쎄게 때렸다.
“커흑!”
침을 뱉어내며 쓰러지는 광폭귀.
침 범벅이 된 멍구도 같이 튕겨 나온다.
때를 놓치지 않고 녀석의 머리통을 꽉 움켜쥐는 강철남,
[분신]
화마귀의 스킬을 흉내 내 본다.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화염.
강철남의 마력과 도력이 뒤섞이며 푸른 불길이 치솟는다.
폭발적인 화마였다.
젖었던 땅이 마르고 바닷물이 수증기를 일으키며 증발한다.
“이, 이건! 도술! 역시 넌 그냥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어!”
강철남이 자기소개에서 빼 먹은 부분.
그는 참고로 마왕이자 설악산의 최고 도력을 가진 인간이다.
“끝이다.”
화르르륵—
“인간에게! 내가 인간 따위에게!!”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광폭귀.
싸움은 끝이 났다.
손에 묻은 검은 재를 털어 낸다.
“우쒸, 프렌드 실드는 또 뭐야!”
“우정의 힘이지.”
“웃기고 있네.”
폴짝 뛰어 강철남의 엉덩이를 팍, 차는 멍구.
“이제 지팡이 빚은 청산했군.”
“무슨 소리. 아직 하나 더 남았잖아.”
“응?”
그렇다.
약속이 하나 더 남아 있다.
* * *
“으하하하.”
설악 신령이 호탕하게 웃는다.
어렵게 공수해 온 백제주.
옛 맛이 난다며 벌컥벌컥 마구 들이켜더니 결국 취하고 말았다.
“정말 대단하구만, 자네. 그 광폭귀를 물리치다니.”
“녀석이 약했을 뿐이야.”
“그런 화통한 점도 마음에 드는군. 으하하. 오늘 같은 날은 마셔 주자고.”
흥이 잔뜩 오른 설악 신령.
그런데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는 설악 신령의 손이 덜덜 떨린다.
“철남이, 이 영감 괜찮은 거야?”
“설마 죽기야 하겠어, 신령이.”
그러자 설악 신령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떽, 소리를 낸다.
“신령이 뭐라고. 신령도 죽는다네.”
“언제 죽는데?”
“도력이 다 되었을 때지.”
“언제 도력이 다 되는데?”
“그게, 나는 조만간이라네.”
조금 쓸쓸한 눈빛으로 고백하는 설악 신령.
그 꼴을 보자 멍구가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이 미친놈이. 좋은 술 잘 처마시다가 분위기 깨고 있어.”
“이 고얀 놈! 감히 신령의 뒤통수를 때리다니!”
“꼬우면 한 판 붙던가!”
덕분이랄까,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방식이 좀 과격하긴 하지만.
“인간으로 치자면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네. 나는 살면서 설악 신령으로서 해야 할 소임을 충분히 했어. 이제 다음 세대에게 일을 맡기고 떠나야지.”
“어디로 떠나?”
“귀천(歸天). 하늘로 돌아가야지. 옥황상제님 곁으로.”
“뒷세대라면 모털 도사를 말하는 거요?”
“아니, 모털이는 도력을 잃었어. 신령이 될 그릇이 못 돼.”
“그러면 이 설악산은 누가 지킨단 말이오.”
그러자 강철남을 빤히 쳐다보는 설악 신령.
“뭘 꼬라 봐, 이 늙은이. 할 말 있으면 꼽 주지 말고 입으로 뱉어 내.”
“스읍, 멍구야.”
“그래,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할 말은 분명히 전해야 하거늘.”
설악 신령이 목을 가다듬고 분위기를 잡는다.
어쩐지 X나게 불안하다.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게 분명하다.
“강철남이. 자네…….”
“거절하오.”
“아니, 아직 아무 말도…….”
“닥쳐!”
술잔을 내려놓고 그대로 연못을 등지고 달리는 강철남.
펑!
그러나 순식간에 그의 앞에 등장하는 설악 신령.
“우왓! 텔레포트 귀찮구만!”
“부탁이네.”
“신령 양반. 내 가치관 잘 알잖소.”
“그래 잘 알고 있지. 그래서 하는 말이네.”
“뭔 개뼈다귀 같은 소리요?”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 설악 신령.
꿍꿍이가 있는 미소를 띤다.
“이 설악산에는 신선계로 통하는 입구가 있지.”
“그게 뭐요?”
“신선계에는 어떤 맛집이 있을까?”
“……!!”
* * *
설악 신령에게 완전히 당했다.
허점을 완벽히 찔린 강철남.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자, 준비는 되었나?”
“그래, 가 보자고.”
설악 신령의 동행하에 신선계로 떠나는 강철남과 멍구.
과연 어떤 진미를 맛보게 될까.
기대하며 떠나는 둘.
그들이 먼저 도착한 곳은 국내에서 가장 길다고 알려진 토왕성 폭포.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니 그 영험함에 마음이 경건해진다.
“이곳에서 조금만 기다리게.”
파도 뒤편에 숨은 동굴이라도 있는 건가.
그때 하얀 안개가 주변을 가득 메운다.
“킁킁.”
“왜 그러나, 멍구야.”
“뭔가 좋은 향이 나.”
“그러게. 마치 신선한 과일 향 같기도 하면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향이야.”
정체 모를 고운 향에 취하며 넋이 나가 있을 무렵, 안개는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더니 이내 시야를 완전히 가려 버렸다.
“앗, 뭐지?”
“이보슈, 신령 양반.”
“허허허. 이제 다 왔다네.”
설악 신령의 목소리 울림이 달라졌다.
즉, 공간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강철남과 멍구는 서서히 걷히는 안개에 집중했다.
분홍빛 안개가 바람을 따라 흘러가자 눈앞에 보인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