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모털 도사와 18 요괴
설악 신령.
옥황상제로부터 이곳 설악산에 발령받은 지 어언 수천 년.
인간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보고 마귀들의 양상을 관찰하며 살아온 그다.
즉, 별의 별꼴을 겪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 산신령이다.
인간들은 산신령을 우러러보고 떠받들었다.
마귀들도 그의 도력에 경외심을 갖고 알아서 질서를 지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설악 신령의 입지는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고고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그런데!
살다 살다 이런 또라이는 처음 본다.
산신령의 지팡이를 훔쳐 가?
“야, 이 미친놈아!!”
설악 신령이 수천 년 만에 샤우팅을 날린다.
메아리치는 신령의 고함을 뒤로한 채 강철남은 달리고 또 달린다.
저도 모르게 각성한 새로운 스킬 [초광속]으로.
도망치는 속도가 엄청 빠르다.
주변의 나무들이 그 풍압에 쓰러진다.
속도를 간신히 제어하여 브레이크를 거니 어느덧 저도 모르게 중턱에 다다랐다.
“철남 씨. 금방 다녀오시는군요.”
집터에서 황토를 지키고 있던 모털 도사가 맞이한다.
혹여나 머리가 자랄까 싶어 황토를 민머리에 치덕치덕 바르고 있다.
그런다고 자라겠소, 라고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그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므로 침묵했다.
모털 도사는 땀이 송글송글 맺힌 강철남의 얼굴을 보다가 이내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라?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아니! 그건 스승님의 지팡이 아닙니까?!”
당연히 놀랄 수밖에.
스승이신 설악 신령이 몸에서 결코 떼어 내지 않던 지팡이가 아니던가.
“스승님께서 그 지팡이를 하사하신 겁니까?”
“그럴 리가. 뽀렸어.”
“네에?!”
황당함을 넘어 쇼킹하다.
대체 이 남자는 뭐란 말인가.
신령의 지팡이를 가지고 와?
“그, 그걸 멋대로 빼앗아 오시면 어떡하십니까?”
“그 양반 요괴도 못 잡는다며? 종일 연못에 죽치고 있으면 대체 이런 지팡이는 왜 필요한 건데.”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다.
확실히 설악 신령이 감당하기에 요즘 요괴들은 너무 강력했다.
모털 도사 또한 요괴를 퇴치하기엔 머리털이 모자랐다.
효율을 생각하면 실력 있는 강철남에게 지팡이를 맡기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설득해서 받아 오시지 그걸 왜 함부로 가져오십니까?”
“왠지 고집 세 보이는 영감이더라. 내 말 듣겠니?”
“그건 그렇습니다. 관상 볼 줄 아시는군요.”
아뿔싸.
그만 강철남의 페이스에 휩쓸려 납득을 하고 마는 모털 도사.
그가 벙찐 사이 강철남은 짐꾸러미에서 탕약기를 꺼내 온다.
“뭐 하시려구요?”
“이 지팡이 벼락 맞은 무궁화 나무야.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무궁화는 대단한 약나무지.”
“그래서 설마 지팡이로 약 달여 드시게요?”
“짚고 다닐 수는 없잖아. 보관은 뱃속에다 하는 게 최고야.”
배를 톡톡 두드리며 싱긋 웃어 보이는 강철남.
어이가 털린다.
모털 도사는 그를 허망하게 건너다볼 뿐이다.
똑— 똑—
지팡이를 똑똑 분지르는 장면 보니 온몸이 아찔아찔 저려 온다.
수많은 설악 신령의 전설을 만든 신령의 지팡이가 막대 과자처럼 부서지고 있다.
모털 도사와 달리 무표정으로 탕약을 끓이기 시작하는 강철남.
부글부글—
탕약기가 쓰디쓴 냄새를 풍기며 푹 고아지고 있다.
부채질로 불을 키우다가 뭐가 또 바쁜지 일어난다.
약이 우려지는 동안 황토 반죽이나 하려 한다.
‘자, 시작해 볼까!’
“…….”
“멍구야?!”
없다.
멍구가.
아하…….
두고 온 것 같다.
* * *
한편 멍구는,
“그니까, 왜 나보고 지랄이세요.”
“어흠! 네놈의 동료이니 네가 가서 지팡이를 찾아와야 할 거 아니냐!”
설악 신령과 멍구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원인은 당연히 강철남이 멋대로 가져간 지팡이.
“나도 몰랐다니까 그러네. 그 새끼가 여간 또라이가 아니라서 예측이 불가능해. 멋대로 날 연못에다 집어 던지는데 난들 어쩌라고.”
“정말 몰랐느냐? 너도 계획에 동참한 것 같은데?”
“아니, 이 영감탱이가 노망이 났나.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X부럴, 이쯤 되면 그냥 믿을 생각이 없는 거지?”
동방예의지국은 옛말.
원래 예의 따윈 쌈 싸 먹은 멍구다.
말려줄 강철남이 없으니 더욱 막 나가며 앞발을 쳐든다.
“이 고얀 것 같으니라구. 내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그간 얼마나 노력해 왔는데. 하여간 젊은것들이란, 쯧쯧쯧. 노인을 등쳐 먹지를 않나, 때리려 들지를 않나.”
설악 신령이 서럽게 끄억끄억 댄다.
“이봐, 울지 마. 다 늙어서 우는 것만큼 추한 것도 없어.”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건네보는 멍구.
이렇게까지 반응하니 아무리 싹바가지 없는 멍구라도 살짝 기세가 누그러든다.
토닥토닥하며 설악 신령의 어깨를 두드려 준다.
“철남이도 나쁜 맘으로 훔쳐 간 게 아니야. 요괴 놈들 때려잡으려고 그런 거지.”
“정말인가?”
“그럼 우리가 그딴 구닥다리 지팡이 가져가서 어디다 쓰게?”
“무슨 말을 해도 꼭.”
“아무튼, 이제 은퇴하고 푹 쉬라고. 요괴 놈들이 건방지게 굴면 우리가 간간이 기강 잡을 테니까.”
“흠흠. 그렇게 해 준다면 내 지팡이쯤이야 윤허해 줄 수 있지.”
“하긴. 허락 안 하면 어떡할 건데?”
“뭐… 어찌할 수는 없지.”
기어이 설악 신령을 풀 죽게 만드는 멍구.
하여간 성질머리 하고는.
“무튼 그런 고로 마음 푹 놓고 지내쇼. 혼자 틀어박혀 있지 말고 친구들 불러서 게이트볼도 치고 그래.”
“그럼 이 설악산은 자네들에게 맡기도록 함세.”
산신령은 멍구에게 설악산 수호를 약조 받는다.
실의에 빠진 설악 신령을 잘 달래고 멍구는 집터로 곧장 달렸다.
그리고 황토 반죽을 치대고 있는 강철남을 보자마자,
퍼억!
“쿠헉!”
옆구리를 들이받는다.
“X바, 사전에 합의는 하고 던져야 할 거 아니야?”
“거참, 말로 합시다. 허리 나가겠네.”
날아가면서 손에 묻은 황토 반죽이 다 튀었다.
대강 손을 닦고서는 탕약기로 걸어가는 강철남.
“어디가?”
“지금부터 도핑 타임이다.”
“도핑?”
“모털 도사, 당신도 이리로 오쇼.”
“저도요?”
두 사람과 멍구는 탕약기 앞에 앉는다.
강철남은 면포에 지팡이 조각을 걸러 탕약을 쭉쭉 짜낸다.
검고 쓰디쓴 향이 나는 탕약이 추출된다.
비주얼도 향도 영락없는 사약이다.
“오우, 냄새 강렬한데.”
“자, 한잔들 쭉 들이켜.”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잔에 채워진 탕약.
그 앞에 사약을 앞에 둔 죄인들 같이 무릎을 꿇고 경건히 앉는다.
“냄새 진짜 못 참겠네.”
후각이 예민한 멍구는 인상을 찌푸린다.
“철남 씨. 마시기가 좀 그런데요. 스승님이 그 지팡이를… 뭐랄까… 별별 용도로 다 쓰셨단 말이에요.”
모털 도사는 구역질이 날 뻔한 걸 억지로 참는다.
힘들게 달여 놨더니 마시지는 않고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못난 녀석들.
아무래도 자극이 필요한 모양이다.
“멍구, 요괴들한테 개무시 당하면서 살래?”
그 말에 살짝 자존심이 상한 멍구.
“그럴 순 없지!”
아무리 개팔자라지만 개무시 당하고 사는 건 못 참지.
“모털이, 자네 황무지 같은 두피에 꽃밭이 자랄지도 모르는데 정말 나 혼자 다 마셔?”
그렇다! 이것은 도력이 담긴 명약이 아닌가.
머리카락은 즉 도력.
이걸 마시면 잃어버린 모발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미, 밑져야 본전이죠!”
강철남의 회유에 멍구와 모털 도사는 코를 막고 약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애초에 몸에 좋은 건 거르지 않는 강철남.
시원스레 원샷을 때린다.
“크아!!”
셋이 동시에 걸쭉한 탄성을 지른다.
“우윽! 무, 물!”
“사탕! 사탕!”
모털 도사와 멍구가 입 안을 헹굴 만한 걸 찾으며 호들갑을 떤다.
“가만히들 좀 있어. 약발 떨어지게.”
“헥헥헥!”
혀를 길게 빼고 혓바닥을 바람에 씻어 내는 멍구.
약을 마시자마자 정신이 번쩍 뜨인다.
“내, 내 머리는?”
모털 도사는 기대에 부풀어 설마 하는 마음에 머리를 더듬어 본다.
하지만
뽀드득— 뽀드득—
반질반질한 민머리만 잡힐 뿐이었다.
실망을 넘어 절망한 모털 도사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
“멍구, 어때. 상태창이 뭐가 달라졌어?”
강철남의 말에 멍구가 ‘눈’으로 확인해 본다.
그 결과 상태창은,
[모털 도사
레벨: 87
도력: D
힘: A
맷집: A
속도: S]
[멍구
레벨: 482
도력: R
마력: RR
힘: RR
맷집: RR
속도: RR]
[강철남
레벨: 591
도력: R
마력: RRR
힘: RRR
맷집: RRR
속도: RRR]
“도력이 추가되었군.”
“이걸로 요괴 새끼들도 문제없겠지!”
멍구가 불러 주는 상태창을 듣고 모털 도사가 이의를 제기한다.
“당신들은 없던 도력도 생겼는데 왜 나는 도력이 그대로인 거죠?”
그건 아무래도 강철남과 멍구만이 먹어서 강해지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특성에 대해 상세히 알 리가 있나.
“평소에 산에서 나는 음식을 골고루 팍팍 먹으시오.”
이 무슨 근거 없는 낭설인가.
머리도 잃고 도력도 못 찾은 모털 도사.
허망해진 마음에 머리가 아찔하다.
“그렇게 마음이 심란하오?”
“앞으로 설악산은 요괴들의 소굴이 되겠군요.”
모털 도사는 이 아름다운 설악산을 요괴들에게 빼앗길까 염려되는 것이다.
“그건 걱정 마시오.”
“앗, 설마 철남 씨가 요괴들을 소탕해 주실 건가요?”
“그럴 리가.”
귀찮은 건 딱 질색이거든.
단호하게 희망을 분질러 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사는 한 녀석들이 함부로 못 설칠 거요.”
“그 말씀은 이 산의 질서를 잡아 주시겠다는 거군요?”
“하아.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되겠지.”
이미 운명을 체념한 강철남이었다.
인간 냄새를 맡고 몰려올 정도니.
적당히 몇 마리 싸다구 후리며 참교육을 해 주면 소문이 나서 요괴들도 잠잠해질 것이다.
“그럼 철남 씨와 멍구만 믿을게요. 저는 도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더 찾아봐야겠어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오. 모근이 완전히 닫혀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런 끔찍한 말 하지도 마세요!”
모털 도사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사뭇 진지하게 고쳐 잡는데,
“철남 씨!”
“갑자기 왜 무게를 잡고 그러쇼?”
“이것만은 꼭 말씀드리고 가야겠네요.”
“뭐요?”
“이 설악산에는 18마리의 강한 요괴가 있어요.”
“왜 하필 18마리인데? 너 욕했지?”
“스읍, 멍구야, 좀.”
멍구를 진정시키고 말을 계속 들어 본다.
“요괴 녀석들은 몬스터와 달라서 간사하고 영악해요. 정면 승부를 걸어오는 대신 몰래 숨어서 일상을 야금야금 갉아먹죠.”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구만.”
“요괴란 본디 그런 녀석들이에요. 야비한 족속들이죠.”
“그런데 그 18요괴가 왜?”
침을 꼴딱 삼키고 모털 도사가 말을 잇는다.
“녀석들은 아마 강철남 님에게도 찾아올 거예요.”
“오라 그러슈.”
“하하하하. 역시 믿음직하네요. 그럼 전 도력을 회복하려 다시 수련에 열중해 볼게요.”
“어디 가서 또 두드려 맞지 말고.”
“그땐 또 잘 부탁드릴게요.”
“안 도와줄 거요.”
모털 도사가 손을 흔들며 떠났다.
한시름 놓고 하늘을 보니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다.
황토는 이제 반죽 단계인데 막막하기만 하다.
“철남이, 나 배고파.”
“그래, 밥이나 먹자.”
둘은 하던 일을 팽개쳐 두고 식사 거리나 찾으러 간다.
강철남과 멍구가 떠난 빈 집터.
검은 거머리 같은 것이 스멀스멀 기어와 황토 반죽에 스며든다.
“인간, 인간, 인간. 크크크.”
그러곤 엄청난 요력을 뿜어내며 강철남을 노려보곤 입맛을 다신다.